검은 머리 앰흑 의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퓨전

새글

세상밖으로
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최근연재일 :
2024.09.19 18:30
연재수 :
12 회
조회수 :
4,526
추천수 :
321
글자수 :
61,940

작성
24.09.11 18:35
조회
528
추천
26
글자
12쪽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DUMMY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흐아아아암. 하품에 밀려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다. 삐― 삐― 거리는 전자음이 가득하고 낙상을 방지한다고 켜 둔 낮은 조도의 조명 때문에 잠시 눈을 붙이려 해도 잠조차 자기 어려운 대학병원의 한 귀퉁이.


추위를 타는 중노년과 여성들이 있다 보니 냉방이 좀 약해서, 신체 건강하고 혈기왕성한 남자에게는 살짝 땀이 나도록 덥다. 벌써 몇 년째인가? 슬슬 적응이 될 법도 하지만 혈기가 점점 줄어들지언정 몸이 불편한 건 적응되질 않는다.


“나가서 잠이나 푹 자고 싶다···.”


치킨에 맥주 한잔하고 자취방 침대에 퍼질러져 자면 그만한 게 없을 텐데.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 타닥, 타닥. 오더를 넣고 밀린 일을 하고 있자니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월급은 따박따박 찍힌다. 본봉은 근무시간으로 나누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워낙 일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제법 돈이 된다. 바쁜 탓에 쓸 시간도 없으니 돈이 더 잘 모인다


가끔 이렇게 일이 덜 오는 시간대에 이런 자기소개서 첨삭이나 논문 지도같은 알바를 하면 그것도 나름 쏠쏠한 부업이다.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엄격하신 아버지와···.”


생판 남의 진부한 가정사를 읽고 있자니, 왜 문득 우리 부모님 생각이 날까.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만 머리는 그래도 좋아서 한국대학교 의대까지 왔다. 그래도 쉽진 않았다. 공부할 것은 많고, 등록금은 끼니마냥 돌아오고, 돈 나갈 데는 생기지만 줄어들 곳은 없었으니까.


잘살아 보세!


기뻐하는 부모님 모습을 보며 호강시켜 드리겠단 그 일념 하나로 버텼다.


“···.”


왜 또 눈물이 고이는지.


돈이 없어서 어머니가 일수쟁이한테 머리끄댕이를 잡힌 채 시장바닥에 내팽개쳐지는 꼬라지를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가 불편한 다리를 끌고 아파트 경비원을 하시다, 웬 미친년한테 뺨따귀 맞는 모습도 눈에 선하다.


이 악물고 공부해 한국대 의대를 왔더니 인간 승리라며, 남의 가정사를 언론지에 박제를 했다.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이셨다. 댓글의 웬 미친놈은 부모가 자식을 빨아먹는다며 조롱했지만, 그렇게 받은 ‘취재료’로 부모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아들이 부모님에게 소고기를 사 드렸을 때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방금은 ‘코인으로 땄다’며 자기소개서 첨삭해서 번 10만 원을 부모님께 송금해 드렸다.


그 명목으로 보냈으니, 제발 내가 사드린 에어컨 좀 켜고 살라고 하면 좀 더 시원하게 주무실 수 있겠지. 잘 시간까지 쪼개고 쪼개 알바로 번 돈이란 걸 아시면 절대 안 받으실 분들이니까···.


어?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 허억···!”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게 아프다. 응급실 인턴을 돌 때 봤던 요로결석이나 심근경색 환자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너무 아프면 비명도 못 지르고 뻐끔뻐끔 숨만 몰아쉬면서 허옇게 질리는데···.


‘아. 이게 심근경색이구나.’


거기 누구 없냐고 외치고 싶은데, 고통 때문에 입이 벌어지지조차 않는다.


이렇게 죽는다고? 당직실 한구석에서?


아···.


“죄···송···.”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 * *


두 번째 인생.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기회가 내 앞에 떨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설 좀 봐둘 거 그랬나?”


꼭 소설이 아니더라도, 역사책 좀 볼 것 그랬다. 아니면··· 조금 더 ‘잘’ 살아보려 했던가.


공부는 좀 덜 하고, 부모님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인생을 즐기기도 하고. 역사 교양도 좀 쌓던가 했을 텐데.


1832년.


르네상스는 이미 멀리 지났지만 우리가 아는 근대라기엔 아직 약간 애매한 시대. 나는 그 시대에 두 번째 울음을 토해냈다.


나폴레옹의 여진이 여전히 유럽을 뒤흔들고, 아메리카 대륙에선 미국이란 나라가 건국된 지 채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이 시대. 그리고 이과 출신으로 세계사 따위 배워본 적 없는 나는 잘 모르는 시대다.


이 시대 인물이 누가 있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나는 모른다! 라고 답할 수 있다. 이과의 교양 역사지식으로는··· 진짜 잘 모르겠다. 세도정치 시대인가? 흥선대원군?


하지만, 역사 말고 시사로, 몸으로 배우는 ‘19세기’ 맛은 매웠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 세계를 지배할 초강대국 미국!


거기에 드랍해 준 건 좋다 이거다. 하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려면 아직 1세기쯤 남았다는 게 문제지. 2차 대전이 끝나고 대한독립 1945년이고, 그때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시작한다는 건 이과인 나도 안다.


어찌저찌 이 시대의 무시무시한 영유아 사망률을 뚫기는 했는데, 성인이라고 오래오래 건강히 무병장수 하는 것도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생에 만 나이 서른 전에 죽었으니 건강에 좀 민감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원래 100세까지 사는 건 쉽지 않은데, 시대 수준도··· 그래, 미개하고 열악하다.


TV 따위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라디오도, 전신도, 전구도 없다. 심지어 등불은 뭘로 켜나 했더니 고래기름이란다!


등불도 어둡겠다, 밤에 할 게 애 만드는 것밖에 없으니, 맨날 떼거지로 태어나는 꼬질꼬질한 애들은 흙탕물에서 종일 맨발로 뛰놀다 열병 나고 설사하다 픽픽 쓰러져 죽기 일쑤다.


겨울이 되면 독감이 돌고, 중노년층들도 떼죽음을 당한다. 말 그대로 설사병에 걸려서 피똥 싸다 죽는 양반들도 넘쳐난다. 성홍열(猩紅熱, Scarlet fever)이며 티푸스며 콜레라와 천연두까지! 현대엔 이미 박멸된 질병이 쥐 떼마냥 들끓는다.


어차피 치료가 없으니까 천천히 죽는 결핵이 그나마 양반 취급이다.


이게 말이 되나?


“야! 치인아! 치국아! 손 좀 씻어라 마!”

“아, 혀엉! 귀찮은데 그걸 또 언제···.”


‘내’ 동생들도 그렇게 죽을 뻔했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툴툴대며 밖에 나가 손을 씻고 들어와 식탁에 앉는 녀석들. 아부지는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셨다.


“욘석아, 형이 시키면 해야지!”

“아, 네··· 네···.”


의학사 시간에 들었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페니실린이 나오려면 1900년대까지는 가야한다. 깡촌 집구석에서 페니실린을 뽑아낼 재주도 없을뿐더러, 페니실린이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그람 양성균밖에 못 잡는다.


이 시대에 빈발하는 소화기계 감염은 시프로플록사신 같은 퀴놀론계 항생제로 보통 치료하는데, 약대 출신이라면 모를까 의사는 그런 거 합성할 줄 모른다.

음, 항생제나 이뇨제, 당뇨병용제로 합성가능한 설폰아미드라면 적절한 재료가 있으면 시도해 볼만 할 것 같다마는···.


해서 우리 집에서만큼은 엄격하게 손을 씻기고 청결 유지를 강조했다. 어무니는 그런 날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하셨다.


“주님!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대는 잘못 타고났지만 이번 생에도 부모님 운 만큼은 좋았다.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가족을 아끼시는 부모님은 생각보다 찾기 힘들다.

나는 주변 환경을 보고 자라며 그걸 깨달았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삶을 만들어주기 위해, 온갖 고난을 불평 한마디 없이 헤쳐나오시는 분들.


그런 분들에게, 피부색 좀 다르게 물려주셨다고 불평하는 개쌍놈은 되고싶지 않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멘!”


동생들은 아―멘을 합창하고는 수저를 들어 와구와구 감자며 수프를 퍼먹기 시작했다. 나는 어무니의 검은 얼굴과 아부지의 누런 얼굴을 보고 씩 웃었다.


“먼저 드세요.”

“···장남은 잘 길렀다니까?”

“날 닮아서 그래요. 날 닮아서.”


나는 두 분을 고루 닮았다. 안쪽은 K―유교사상을 장착한 순도 100% 한국인이지만, 곱슬한 검은 머리카락은 어무니를, 쌍꺼풀 없는 눈은 아부지를 닮았다.


물론 살기가 쉽지는 않다. 1850년대 미국에서 동양인―흑인 혼혈로 살기란.


* * *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잘 다녀와라!”


어무니가 까 주신 사과 한 쪽을 입에 넣고 아삭아삭 깨물어 먹으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형 어디 가?”

“딤스데일 목사 심부름 하러.”

“아··· 그래! 잘 다녀와!”


가끔 말을 안 들어 먹을 때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순둥하고 부지런한 동생들은 아버지를 도와 일찌감치 농사를 지으러 나갔다.


어머니는 빨래와 요리, 청소를 하고 새참을 지어 일하는 남자들을 먹이러 간다마는 내가 가는 길은 조금 달랐다.


‘수상할 정도로 똑똑한 깜둥이’


이 동네에서 내 포지션은 대충 그 정도라고 보면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시대에 고등교육은 소수의 전유물이다. 글을 아예 못 읽는 문맹도 전 인구의 십몇 퍼센트쯤은 되고 수학? 그건 2020년대의 미합 ‘중국’ 놈들도 못 하는 최신 기술이다.


그런데 이들이 보기에,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혼자서 글과 셈을 깨우치고 어려운 글도 줄줄 읽으며 복잡한 계산도 척척 해내는 나는, 수상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깜둥이였다.


심지어는 지역의 유지이자 지식인인 목사의 눈에 들어, 조수 노릇을 하며 돈까지 벌어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녀석이 우리 집안을 일으킬 인재가 아닐까? 라는 기대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는 우리 가족의 오두막집을 나섰다.


“여어! 사이먼!”

“아, 레트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로라 아주머니랑 젠킨스는 어때요?”

“덕분에 잘 있단다. 제엔장, 널 믿기를 잘 했단 말이지?”


읍내로 가는 길에서 마주친 레트 아저씨는 말을 타고 가다가 껄껄 웃으며 내 등짝을 세차게 두드렸다.


계단에서 발목을 잘못 접질려 퉁퉁 부어버렸던 로라 아줌마. 막둥이 젠킨스에게 젖을 먹이는데 제대로 된 약 대신 무슨 부인의 시럽? 이랍시고 모르핀을 먹어서 애도 좀 이상해지고, 정작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게 냅뒀으니 발목 상태만 안 좋아졌었다.


부인의 발에 부목을 대고, 캐스트로 고정하고, 붕대로 묶고 안정을 취하게 시키고··· 그 빌어먹을 모르핀은 중단시켰다.


“몇몇 놈들은 어떻게 검둥이한테 진료를 받냐고 하지만, 난 널 믿었다구.”

“하하하··· 감사합니다.”

“솔직히, 칠링워스 선생은 돌팔이 같은데 너무 진료비가 비싸단 말이지··· 너는 그에 비해 실적도 좋고.”


하지만 그렇게 수상할 정도로 똑똑한 깜둥이가, 돌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상당히 조심스런 무빙이 필요했다.


혼자서 나 똑똑해요, 나 잘났어요 나대면 아무리 노예제가 없는 북부 자유주, 오하이오라 할지라도 몰매 맞고 어디 마을 어귀에 메주처럼 매달리기 십상이다.

애초에 기본적으로 건(Gun)법을 다들 구사하는 서부 개척 시대의 미국에서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내 의학지식이나 화학, 과학 지식을 활용해서 사람들을 돕다 보면 기회가 온다.


예컨대, 마을의 지역유지라고 할 수 있는 딤스데일 목사의 조수로 일할 기회라던가.


“나중에 보자고!! 다음 추수감사절에, 아주 살찐 칠면조 한 마리 가져다줄게!!”

“예!! 젠킨스나 다른 애들이 아프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그래, 고맙다!!”


그렇게 말하고 레트 아저씨는 말을 타고 휙 달려 나갔다. 나도 말을 타고는 싶지만. 뭐어.


말은 비싼 동물이기도 하거니와 이 시대는 그런 시대다. 야만의 시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 머리 앰흑 의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각은 매일 18시 30분입니다 24.09.11 169 0 -
12 003. 지하철도 (1) NEW +7 9시간 전 172 22 12쪽
11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3) +6 24.09.18 274 24 11쪽
10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2) +7 24.09.17 310 25 12쪽
9 002. 이상한 의대생 김치만 (1) +5 24.09.16 334 29 12쪽
8 001. 검은 머리 김치만 (7) +5 24.09.15 343 23 13쪽
7 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1 24.09.14 356 25 12쪽
6 001. 검은 머리 김치만 (5) +6 24.09.13 373 29 11쪽
5 001. 검은 머리 김치만 (4) +6 24.09.12 408 31 12쪽
4 001. 검은 머리 김치만 (3) +2 24.09.11 434 28 13쪽
3 001. 검은 머리 김치만 (2) +1 24.09.11 416 28 15쪽
» 001. 검은 머리 김치만 (1) +3 24.09.11 529 26 12쪽
1 000 프롤로그 +4 24.09.11 576 31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