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앰흑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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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밖으로
작품등록일 :
2024.09.11 00:26
최근연재일 :
2024.09.1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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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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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검은 머리 김치만 (6)

DUMMY

며칠 후 치러진 2차 시험은 면접시험이었다. 절반 정도로 줄어든 학생들은 지난번과 같은 강의실을 대기실 삼아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구태여 서로 떠들지 말라는 소리는 없었기에,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들이 어렴풋이 넘어 들렸다.


“쟤는 뭐야? 지필시험 때 본 것 같은데.”

“그때 제일 먼저 풀고 나가더니··· 떨어진 게 아니었나봐?”


옆자리 학생들이 수군거린다. 나는 의연한 태도로 괜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려 꼿꼿하게 입 다문 채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저 얄팍한 문 하나 너머에서 기다리는 백인 교수들 앞에서, 내가 그들의 혐오가 아닌 관심을 얻을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치만···? 아니, 사이먼 킴!”

“예!”


당당하게. 어깨 쭉 펴고. 아부지 어무니가 물려주신 우월한 체구와 등빨은 그래도 도움이 됐다. 아부지가 밤새 발품 팔아 빌려온 양복이 몸에 좀 안 맞기는 했지만.


오하이오 의과대학(Ohio Medical College)의 입학 면접실.

사람들의 경악 반, 혐오 반 섞인 시선을 뚫고 나는 면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명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두 발로 선 개새끼가 갑자기 학문의 전당에 흙발로 쳐들어온 걸 보는 양. 그래도 개중 몇몇은 태프트 판사의 추천장이나 내 지필시험 점수를 보고 경악하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사이먼··· 킴?”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내가 가져온 걸 선보일 차례다.


인생을 건 베팅이다.


성공하면?

내가 구상한 ‘잘먹잘살’ 로 가는 길은 한 10년, 아니, 수십 년은 단축될거다.


실패하면···?

음··· 운이 나쁘면 저 밖의 나무에 매달린 흑인 시체가 되거나 몰매를 맞고 쫓겨나겠지.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단 5분만 주시면!!! 제가 이 학교와 병원에서 발생하는 사망자 수를 절반으로 줄일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 *


“말도 안 됩니다! 면허는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학교 교육조차 받지 않은 어린애의 주장을 받아들여 환자들에게 실험을 한단 말입니까?!”


경악.


“이런 개만도 못한 깜둥이가 우리 학교를 무시해?”


분노.


“오, 주님··· 내가 살아 생전 이런 모습을 보다니··· 종말이 가까웠노라!”


탄식.


“···하지만 실험을 해 볼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이성적인 반론.


교수들의 분노한 시선이 한 사람을 향해 쏠렸다. 그러나 그는 배짱 좋게도 허허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놈은 학교도 안 다닌 어린애요! 지필고사를 보게 해준 것도 특례에 가까운데···.”

“하지만 수학과 라틴어에서는 만점을 받았더군요?”


한숨과 함께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도 동조하는 자들이 한둘 정도는 있었다. 객관적인 수치에 기반하였기보단 다른 배경에 더 주목하는 쪽이었지만.


“태프트 판사··· 이사의 추천을 받았기도 했고요. 떨어트리기에는 성적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끙. 그들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시험에서 만점을··· 누군가의 답안을 베낀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자리로 불러 구술 시험을 보면 그만이지요. 2등 점수를 보니 그의 답안을 베껴도 만점 가까이조차 못 갔겠지만요?”

“말세! 말세로다!”


다시 장탄식을 하는 다른 교수들을 보며, 그는 여상스런 표정으로 으쓱거렸다.


“그··· 친구가 만약 자기가 책임지지 못할 소리를 한 거라면··· 그땐 저는 빠지겠습니다. 분노한 환자들의 가족들이 그 친구를 잡아 매달아버리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 * *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분도 채 안 됐을 것이다.


‘혼종 깜둥이 애새끼’가 교수들 앞에서 떠들어봐야 고매하신 백인 의대 교수들이 뭘 들어 주겠는가?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의사+교수의 조합은 오만과 교만의 조합.

21세기에도 제 잘난 맛에 살던 분들이 19세기엔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 전까지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된 정보를 때려넣어 줘야 했다.


“병의 원인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물 때문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저는 한 가지 실험의 시범을 준비해 왔습니다. 또한 이 생물들을 일시적으로 박멸할 수 있는 약 또한 제작을 했습니다!”


“이는 제 아버지의 고향, 꼬레아라는 곳에서 비밀리에 전해지던 지식입니다. 먼저 실험을 보시고, 그에 입각해 환자를 만지는 손과 기구들을 다룬다면 이 병원에서 발생하는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틀렸다면 저기 저 창 밖의 나무에 저를 매달아 버리십시오!”


하지만 19세기는, 특히 이제 막 19세기 절반이 지나는 이 시대는 아직 자연의 비밀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 시대이다.


내가 전생을 자각하고 나서, 아부지가 읍내로 나갈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시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란 게 널려있는 세상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세상에.


이 세상엔 아직 소독의 개념도, 아니, 세균의 개념도 없었다.


‘뭐? 당연히 병은 썩은 기운(miasma)에서 오는 거란다 얘야.’


우리 읍내에서 장사를 해 먹던 동네 의사, 칠링워스 선생은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다.

좀 비사교적이긴 해서 혼자서 매번 음침하게 돌아다니며 딤스데일 목사를 향해 묘한 눈빛을 보내고 내게 목사의 근황을 캐묻긴 했어도, 꼬치꼬치 의학지식에 대해 캐묻던 반 칭챙총 반 깜둥이 어린애에게 친절하게 답변이란 걸 해 주실 정도였다.


그 아저씨를 통해 나는 이 시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보답으로 가르쳐준 몇 가지 지식을 써먹어본 선생은 감탄하면서도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녀석. 똘똘한 건 알겠는데,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그런 소릴 백날 해 봤자 나 같이 괴상한 놈만 들어줄 거란다!’


당연히 그럴 거다. 깜둥이 놈이 뇌피셜로 떠들어대는 걸 누가 믿어 주겠는가?


그러나 지식이, 그것도 논증 과정에 대한 지식이 어디로 가지는 않는다. 이 논리적 입증 과정을 일단 알아먹을 만한 자에게 가서 들이미는 게 중요하다.


그러려면 글도 못 읽는 상무식쟁이들이 깔린 이 깡촌을 벗어나 덜 무식쟁이들이 모여 있는 도시에, 대학에 가야 했다.


물론, 거기서 내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만큼 마음이 열린 사람을 만나야하겠지만.


아무튼 내 도박은 이제 절반은 성공했다.


눈 앞에서 대놓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교수를 설득하면 된다.


“···본 사안의 심사는 루돌프 피르호(Rudolf Virchow) 박사―교수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프리드리히―빌헬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이 매우 독특한 기구들이 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이름이···?”

“예! 저는 치만 사이먼 롤리랄라 킴 입니다. 편하게 사이먼, 혹은 킴 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강하게 섞인 독일 억양에, 과장된 연극 같은 현학적인 말투. 여러모로 이 동네에서 볼 만한 평범한 의사 양반은 아니다. 다른 교수들은 아니꼽게 노려보고 있는데도, 혼자 흥미 반, 기대 반 섞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포함해서.


“좋소, 미스터 킴. 설명해 보시겠소?”

“예. 지금 이 플라스크 안에, 여기 있는 고기 육수를 넣겠습니다. 그리고 플라스크를 가열해, 목을 구부려 S자 형태로 목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저 자식, 뭘 하는 거지? 사람들이 대놓고 들으라는 듯 수군거린다. 정장을 입은 의대생들과 연수의들, 가운을 걸친 교수들도 점잔을 빼면서도 흥미가 생기는지 스윽 들여다 보았다.


아무렴, 궁금해하지 않고 못 배길 거다.


“이 ‘미생물’은 네덜란드의 자연철학자 레벤후크란 사람이 이미 발견한 바 있습니다. 이것들이 부패와 질병 등을 유발하는데요, 이렇게 육수를 가열하거나 제가 만든 약제를 사용하면 미생물들이 사멸합니다.”

“이의 있네! 무슨 헛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육수 안의 ‘생기’를 가열해서 죽여 버리면 미생물이란게 자연발생이 불가능하지 않겠나?”


탕! 교수 중 한 사람이 탁자를 쾅 치고 일어나 내게 손가락질했다.


'썩은 기운과 생기.'

그래, 그게 이 시대의 ‘상식’이다. 사람들 역시 동조하듯 웅성거렸다. 독일 억양의 교수, 피르호 박사는 말릴 생각 없이 그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


“그렇지만 이 S자 목의 플라스크는 공기가 통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만약 ‘생기’설이 진짜라면 통하는 공기가 그걸 보충해 줄 겁니다. 하지만 작은 미생물들은 이 목을 통과해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육수는 이제 부패하지 않을 겁니다.”

“깜둥이의 존경 따위는 받고 싶지 않은데···.”


반박당하니까 인신공격이냐? 나 참.


하지만 인신공격을 할지언정 논리적으로 보면 참이다. 실험을 칭챙총의 손으로 하건 깜둥이 손으로 하건, 혹은 백인의 손으로 하건 달라질 리가 있나?


정 내가 깜둥이라 못 믿겠다고 하면 같은 프로토콜로 잘나신 백인 교수들이 다시 해 보면 그만이다. 다행히도 피르호 교수의 흥미로워하는 시선은 더 강해지기만 했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이 목이 굽어져 있는 한, 육수는 부패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목을 제거하면 외부에서 유입된 작은 생물들이 육수를 부패하게 할 겁니다. 두 개의 병을 준비한 이유도, 1주일 후 한쪽의 목을 제거해 사후에 부패하는 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미스터 킴. 자네 말대로 된다면 참 흥미롭겠군 그래? 내가 알기로, 이런 방식의 검증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만.”

“저 역시도 아버지의 나라 꼬레아에서 전해진 문건을 보고 재현했을 뿐입니다.”

“동방의 비술인가? 독특하군! 흥미로워!”


동방의 비술이냐고, 무려 ‘박사님’이 말하자 사람들이 또 저들끼리 수군댔다. 이번엔 조금은 더 긍정적인 뉘앙스를 섞은 채로.


“치―나(China) 어딘가에서 전해진 기술인건가?”

“그렇다는데? 저 어린애가 그쪽 혼혈인가봐?”


그렇다고 몇 년, 혹은 몇십년 후 미래에 프랑스의 파스퇴르라는 사람이 할 실험이라고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약도 좀 섞어서 팔았다.


어쨌든 집에서 어무니한테 등짝을 두 대씩 맞으면서도 두 번이나 거듭 검증을 했으니··· 이건 될 수밖에 없다.


페니실린이나 설파제 같은 항생제를 개발한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건 최소 백 년은 더 걸린다. 얼핏 기억하기론 대충 2차대전 전후였으니까. 이과인 나도 2차대전이 1945년에 끝나는 건 안다.


지금의 실험실 수준에서 합성하는 걸로는 순도를 보장할 수도 없고, 함부로 주사했다가 감염 환자가 죽으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건가?


깜둥이가 그랬다간 토막살인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설령 항생제가 효과가 있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죽음의 책임을 짬 때리지나 않을지 누가 아나? 혹은 아나필락시스 반응(anaphylaxis shock, 특정 물질이나 항원에 대한 과민성 알러지 반응)이 생긴다면? 통계적으로 6천에서 2천 명에 한 명 정도는 아나필락시스가 생기는데?


그런 억까를 당할 바에야, 유용성 검증이 ‘통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살균소독법이 훨씬 낫다.


“그럼 리차드? 이 플라스크들을 조심히 내 사무실에 가져다 놓게나. 일주일간 부패의 여부를 관찰한 후 미스터 킴이 이야기한 대로 목을 떼 내 보도록 하지.”

“예! 교수님!”


좌중에서 좀 조숙··· 수준이 아니라 많이 삭아 보이는 아저씨 하나가 벌떡 일어나 플라스크들을 들고 이동했다. 피르호 박사는 짝, 짝, 손을 쳐서 사람들을 주목시킨 후 명랑하게 이야기했다.


“오늘은 이만합시다! 다음 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공개적으로 검증을 해보도록 하죠! 타―다!”


짐짓 능글맞은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드는 피르호 박사를 보며, 교수들은 제각기 찌푸린 표정으로 퇴장했다. 학생들 역시, 각자가 모시는 스승들의 뒤를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거기 미스터 킴! 자네는 잠시 남도록 하게.”

“아··· 예! 교수님!”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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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35 th*****
    작성일
    24.09.14 20:27
    No. 1

    그러나 자신이 굳게 믿은 미아스마 가설이 틀린 것을 본 교수는 지식이 깜X이 만도 못하다는 것에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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