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삐뚤어진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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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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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날개
작품등록일 :
2024.09.16 19:17
최근연재일 :
2024.09.1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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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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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인가

DUMMY

가녀린 미녀가 검 한 자루를 들고 흉포한 괴물에 맞선다.


마치 게임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구도.


그리고 그 구도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은 사람을 통째로 씹어 먹을 것 같은 괴물을 토막 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천사처럼 순결한 순백의 머리를 휘날리며 괴물을 조각내는 그녀를.


휘두르는 검의 궤적이 공간 위로 선명하게 그려지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박혀 들었다.


‘아름다워···.’


자리에 머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나라 최고의 영웅, 화랑花娘을 대표하는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꿈인가?’


그렇게 정신 놓고 구경하길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문득 그녀의 얼굴이 무척이나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어느새 자신의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괴물을 토막 내던 그 서늘한 칼날을 자신의 목에 겨눈 채로.


‘왜···?’


왜 그녀가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지?


그 서늘한 감각에 몸이 덜덜 떨려왔지만, 그의 입은 살길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사, 살려주···.”


“너, 기억하고 있구나?”


“예?”


섬뜩한 빛을 머금은 분홍빛 눈동자.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의지를 읽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죽는···.’


“···룡아.”


“···.”


“야, 정이룡!”


거칠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그의 의식이 급격히 현실로 끌려 나왔다.


“어, 어?”


“취했냐?”


이룡은 멍한 눈길로 고개를 들었다.


큰 테이블 위로 빼곡히 놓인 안주들, 텅 빈 채로 늘어선 술병들,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는 사람들.


‘아, 오늘 고등학교 동창회였지.’


그는 뒤늦게 자신이 오늘 고등학교 동창회에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너, 취하면 바로 자려고 하잖아. 방금 존 거 아냐?”


“아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생각? 뭐만 하면 몸부터 움직이는 놈이?”


친구 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그는 잔상처럼 따라붙는 기억을 떨치며, 자신의 유일한 절친인 성준에게 물었다.


“우리 영화 이야기 중이었잖아.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가 뭔지.”


“그냥 영화는 쏘고, 죽이고, 터트리는 게 최고라니까.”


“으이그, 이 화상아. 내가 그런 폭력적인 것 좀 그만 보라고 했지!”


열심히 총 쏘는 시늉을 하던 남자가 옆에 앉아 있던 여자에게 등을 두들겨 맞는다.


“쟤들은 참 오래도 사귄다.”


“군대까지 기다려줬으니, 빼박 결혼까지 해야지.”


“제발,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어줘. 지방까지 내려가기 귀찮다고.”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동창들 속에서 그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쳐다보았다.


‘나 좀 취했나?’


비어있는 술잔과 살짝 알딸딸한 기분이 자꾸만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룡아, 너는 무슨 영화를 제일 좋아해?”


“···글쎄? 딱히 영화를 즐겨 보진 않는데.”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있을 거 아냐.”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넨 여자를 바라보았다.


‘쟤가 누구였지?’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면 분명 동창일 텐데,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또 쓸데없는 생각을···.’


그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주인공만 자기 인생이 티비 속 프로그램이라는 걸 몰랐던 영화를 제일 인상 깊게 봤던 것 같아.”


“아! 그 고전 명작?”


“그거 유명하잖아. 아마 제목이 트ㄹ···.”


“트럼프 쇼?”


“···제목이 그거였던가?”


“맞을걸?”


“트럼프 쇼는 개뿔. 그거 정치인 이름이잖아.”


“아, 이름만 비슷하면 됐지.”


불콰하게 올라온 취기 속에서 실없는 말들이 오갔다.


그렇게 또 한참을 쓸데없는 헛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들로 채워지던 술자리는 이내 다시 한번 그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런데 너 취직한 곳에 설 선배가 있었다며?”


“어···. 그랬지?”


“이야, 둘이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자기 남친을 챙기던 여자 동창이 눈을 빛내며 그를 쳐다보았다.


‘쟤 이름이 혜진이었던가?’


“설 선배가 너한테 뭐라고 안 해?”


“딱히?”


“헤에~? 그래도 그렇게까지 인연이 이어졌으면 뭐라도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설 선배랑은 몇 년 인연이야?”


혜진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 있던 남자 친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쟤 이름은 동우던가?’


학창 시절 때도 뭐만 하면 까불거리며 앞장섰던 놈이라 기억에 남는 녀석이었다.


“고등학교부터 1년 선후배 관계에 대학교의 학과까지 같았고, 또 직장까지 같은 부서니까···. 거진 10년?”


“10년!?”


그의 말에 들은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토했다.


“설 선배는 내 첫사랑이었는데···.”


“예쁘긴 예뻤···. 큭!”


고개를 끄덕이던 동우가 혜진이에게 사정없이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그것보단 카리스마가 쩔어줬지.”


“아마 남자보다 여자들한테 더 인기가 많았을걸? 그렇지 혜진아?”


“응응. 여자애들 중에서 그 선배한테 껌뻑 죽는 애들이 한 트럭이었지.”


“난 그 선배 덕분에 백합에 눈을···.”


적당히 웃음으로 주제를 받아넘기던 이룡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먼저 일어나 볼게.”


“벌써 가게?”


이름 모를 여자 동기가 아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성준이 옆에서 열심히 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야, 이 기회에 여친이든 여사친이든 뭐라도 좀 만들어 봐.’


도통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친구 놈에게 소리 없이 전하는 적극적인 권유


하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친구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퇴근 후에 술까지 어느 정도 마신 상황.


여기서 깊은 인연을 만들기엔 지나치게 피곤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에 먼저 자리를 나섰다.


다소 이른 시간에 생겨난 이탈자에도 불구하고 술자리의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이룡 한 명 떠나갔다고 분위기가 변하기엔 그는 그리 존재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여자 한 명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 * *



“아, 피곤해.”


전철의 빈자리에 앉자마자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사람이 많은 건 질색이란 말이지.’


사실 원래 오늘 열린 동창회에도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술을 그리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자신의 유일한 절친인 성준이가 권하지 않았다면, 오늘도 그냥 퇴근 후에 느긋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을 터였다.


잠시 하품을 내쉰 이룡은 이내 오늘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했다.


‘그 꿈은 뭐였을까?’


괴물의 습격과 죽음의 위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


눈앞에서 괴물이 토막 나고, 그것보다 비현실적인 외모의 여인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모습은 도무지 현실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단 말이지.’


일반적이라면 개꿈으로 무시하고 넘어갈 일


하지만 그는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옛날부터 감이 좋았고, 특히 꿈을 통해서 본 장면들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반드시 실현되었으니까.


즉, 괴물의 습격과 그 여인과의 만남이 자신의 미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켜서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이번에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동부 산악지역에 자리 잡았던 이물들을 완전히 소탕하셨다고요.


-영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역시 설화 님께선 겸손하시군요.



동영상에서는 혼자만 그림체가 다른 듯한 여인이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진짜로 다른 사람들을 다 오징어로 만드네.’


그녀를 인터뷰하는 아나운서 역시 결코 못난 외모가 아니었음에도, 그녀 옆에서는 마치 빛바랜 그림처럼 흐릿해져 버렸다.


그는 잠시 동영상을 멈추고, 그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티끌 하나 없이 하얀 머리카락

굳은 의지로 반짝이는 분홍빛 눈동자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생기를 더하는 분홍빛 홍조


그 모든 것은 조화롭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와 어울려 압도적인 미로 승화되었다.


‘···꿈속에서는 이것보다 더 예뻤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카메라가 그녀의 외모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압도적인 미모가 빛을 잃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들도 그런 그의 의견에 동조하듯이 미친 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종교라도 만들 듯한 열광적인 숭배와 함께.


‘이 정도면 종교를 만들만도 한데?’


아름다운 외모와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영웅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을 지킨다?


그녀의 진성 팬들로만 백만 대군을 양성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어쩌면 천만 이상일 수도···.’


그야말로 만인의 영웅이자 만인의 연예인.


이것이 현재 이 나라에서 그녀가 가진 위치였다.


‘이런 그녀가 나중에 내 앞에 나타난다고?’


그것도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불쑥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침착하게 당시의 상황을 짚어보았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고 했어.’


자신에게 그녀가 신경 쓸 만한 정보가 있나?


하지만 나 같은 소시민에게 그런 정보가 있을 리가···.


툭툭


“정 사원?”


“···예 대리님?”


고개를 들자, 직장 상사가 자신의 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리님께서 왜 여기에?’


그의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그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것 좀 끄지?”


“예? 아, 예···.”


‘···별로 안 좋아하시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넣다가, 콧등을 찌푸렸다.


‘술 냄새.’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서 난 것인 줄 알았으나, 아무리 봐도 그것은 자신의 옆자리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술을 드신 겁니까?”


“나는 술을 먹으면 안 되나?”


“그, 그건 아닙니다.”


짜증이 가득 서린 말투에 자연스럽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기분이 별로이신가?’


평소에도 까칠했던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더욱 까칠해 보였다.


“야, 정이룡.”


“···예, 설 선배.”


간만에 직급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그녀.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다소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

총기가 흐려진 갈색 눈동자

발그레하게 올라온 붉은 홍조


명백히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설마 취하신 건가?’


근 10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갑자기 그녀가 그를 향해 삿대질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너, 너 때문에···.”


“예?”


“내가 왜 너 때문에 이렇게···.”


“???”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삿대질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저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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