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7,394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4.06.13 18:00
조회
1,223
추천
20
글자
17쪽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0)

DUMMY

먹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시커먼 성은 한눈에 봐도 함정이 즐비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다들 성문을 앞에 두고 조금 표정이 무거워보였다.


“폰테일 대장, 저 성 어디에 공주마마가 계신지는 알고 가는 건가?”


카헬의 물음에 소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릅니다. 일단은 성 곳곳을 찾아봐야 하죠. 도군, 그러니까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아껴 줘.”


묘한 분위기를 깨고 소렌이 묵묵히 의사를 전해왔다. 참 괴상한 부탁이다.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힘을 아껴달라는 청이라니.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성을 무너트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지만.... 일단은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성문을 박살내고뚜벅뚜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섰다. 성내는 꽤 음침했다. 차라리 갱도라 해도 좋을 만큼 인기척이나 불빛이 적었고, 어쩐지 공기도 꽤 탁한 것 같았다.


“마나의 상태가 안 좋아요. 다들 여기선 마나를 회복하지 말도록 하죠.”


로지의 말에 카헬이 투덜대듯 사족을 달았다.


“어차피 쓸 일도 없어. 그 말은 도군한테나 해 둬.”


이에 멋쩍은 표정으로, 로지가 내게 주의를 주려다 멈칫한다.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터무니없는 힘을 보인 내게 그런 충고를 하는 게 오지랖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괜찮습니다. 전 이런 마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마나 드레인도 닥치는 대로 기운을 끌어 모으는 수법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마나를 끌어 모으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기천의 군세를 벤 다음부터 조금씩 나는 내 진정한 힘에 눈을 떠가고 있었으니.


그렇게 묵묵히 성 여기저기를 수색하던 중, 어느 넓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느닷없이 천장이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사방의 벽에 문이 생기고, 그 안에서 시뻘건 외형의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역시나 성 안에도 함정이 즐비한 모양이다.


“이 마나.... 데스 나이트입니다. 모두 조심하세요!”


로지가 외쳤다. 나는 물끄러미 데스 나이트란 것을 바라보다 문득 기억 속에서 사파인들이 부렸다던 혈강시가 떠올랐다. 아니, 분명하다. 검기도 박히지 않는 저 단단함을 보니 저것이 혈강시임은 확실하다.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야 합니다. 크리스와 도군은 저와 함께 데스 나이트를 막고....”


“그럴 필요 없어.”


소렌이 조목조목 작전을 수립하는 찰나, 나는 내려앉는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쉴 새 없이 내려앉던 천장이 우뚝 멈춰버린다.


“천장은 이렇게 지탱하면 돼. 그리고 저것들은 내가 처리하면 되고.”


차라리 숫자가 많은 고만고만한 적이 더욱 위험할지도 모르지. 숫자가 많으면 내 손이 미처 닿지 않는 부분이 조금은 많아질 테니까.


“옵니다!”


로지의 외침과 함께 다들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강시들 역시 냉막한 얼굴로 점점 기운을 불려가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니 문득 실소가 흘러나온다. 꽤 위협적인 함정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제피온은 내 힘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다.


“다들 제 옆에 붙어 주세요.”


부대원들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영문은 몰라도 내 말의 무게감은 잘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나도 그 신뢰에 부응하도록 하지.


“붕천(崩天).”


이건 무공이 아니다. 아니, 사실 내 힘은 무공이 아니라 의지의 발로다. 내가 입으로 내는 말들은 내 의지를 구체화하는 즉흥시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나는 내려앉는 천장에 기운을 싣는 터무니없는 무공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아(發芽).”


혼돈의 기운을 담은 천장이 한순간에 주위를 가득 메우며 강시들의 단단한 몸을 깨부수는 와중에도, 내 주위에는 작은 파편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얼어붙은 흙을 깨고 나온 어린 싹처럼, 우리는 천장의 파편을 헤치고 우뚝 서 있었다.


“이건.... 마법 같군요. 아니, 마법 아닌가요?”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 속에서, 로지가 탄성을 내뱉는다. 잠시 후 천장이 모조리 무너져 내려 밝은 하늘이 훤히 보일 때가 되어, 나는 머리 위로 뻗어 올린 팔을 내렸다. 그리고 로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만류귀종이라 했다. 궁극에 이르러서는 무공이든 마법이든 결국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법. 나는 어렴풋이 깨달은 그 사실을 뭉뚱그려 답을 내려 주었다. 하지만 역시 로지는 아직 그걸 실감하지 못한 것 같다.


“흐음, 어렵네요. 카헬 너는 알겠어?”


“젠장, 웃기지 마. 난 이미 저놈에 대해 생각하는 걸 그만뒀어. 저놈을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선상에 두지 말라고!”


카헬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한편 소렌은 조용히 훤히 뚫린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부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수색을 계속하겠습니다. 일단 파편을 치우고....”


“아, 그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수색이든 파편을 치우는 일이든 말이다. 나는 가볍게 발을 굴러 우리가 들어온 문을 막고 있는 큼직한 돌덩이를 산산조각냈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일그러진 철문을 통째로 뜯어내며 말을 이었다.


“슬슬 공주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 것 같으니까.”


천장이 완전히 부서지니 이제 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사이한 기운의 흐름이 명약관화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기운이 모여들고 있는 곳에 공주가 있으리라는 직감도 들었다.

애초에 천의결이라는 수단을 두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던 거지. 조금 더 빨리 생각해냈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이건 억지로 함정을 돌파하려 한 내 탓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알았다면 날 욕했을지도 모르겠군.


미묘한 쓴웃음을 삼키며 나는 거침없이 벽이며 바닥을 뚫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함정은 더욱 어설퍼졌고 목적지로 가는 길은 점점 편해져갔다.

그와 함께 점점 부대원들과 내 거리가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건 내 움직임에 따라오지 못하는 것이 그러했고, 마음은 몸보다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계속 느꼈던 거지만 도군님 앞에서는 어떤 함정이든 뭐든 아무 소용도 없네요.”


로지가 점점 이상하게 변해가는 분위기 속에서 말을 꺼낸다. 태생이 낙천적이고 밝은 그에게 지금 우리를 휘감은 분위기는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흥, 드래곤도 이렇지는 않을 걸? 새삼스럽게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계속 움직여. 들러리 역할이라도 잘 하고 싶다면 말이지.”


카헬이 빈정대는 투로 말하지만 이번에는 플로렌스도 면박을 주지 않는다. 슬슬 그녀도 의무감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 거겠지.


“도착한 거야?”


이윽고 도착한 곳은 성의 중심부였다.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로비에 멈춰서자 소렌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내가 왜 여기서 멈추었는지 알아차렸다.


“무언가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오리엔트의 환영마법 맞아?”


“그래.”


나는 사이한 기운이 모여드는 중심부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와 함께 진법이 깨어지며 텅 빈 허공으로 가장했던 곳에 기이한 모습의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은 거대한 열매를 중심으로 주위에는 수십 개의 철침이 기둥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구하려고 했던 이가 있었다. 사지를 구속당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소렌이 이를 악물었다. 로베른의 공주이자 그녀의 어머니가 분명한 모양이다.


“용케 알아차렸구나.”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물 사이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제피온이다. 역시나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군. 제피온은 무엇이 그리고 만족스러운지 씩 웃으며 기이한 모양의 구조물을 쓰다듬었다.


“이건 전에도 보았겠지? 이 땅의 마나를 끌어 모으는 술식이지.”


“마법과 진법을 한데 모아서 조화를 깨트릴 정도로 마나를 모으는 건 잘 안다. 덕분에 라스탄트의 수도가 황무지가 다 됐지.”


나는 그렇게 대꾸해주며 새삼 내가 그때보다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땐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면 지금은 이 진식의 요체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네놈! 공주마마께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소렌의 외침에 제피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별 것 아닌 여흥이다. 천무지체에 조금 실험을 하는 중이었지.”


“그게 무슨....”


소렌이 천무지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다. 이에 제피온이 비열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방에 박혀 있던 철침이 순식간에 자라나, 살아있는 것처럼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이내 철침들이 온몸의 혈을 찔러 들어갔다.


“어머니!!”


소렌이 순간적을 이성을 잃고 검을 빼들었다. 그런 소렌을 말리며 나는 조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지금 섣부르게 건드리면 더 위험해. 재수없지만 제피온은 공주마마를 죽이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쓰고 있어.”


사혈이며 무엇이며 가리지 않고 파고든 철침을 통해 수없이 강력한 힘이 주입되고 있었다. 젠장, 무슨 실험인지 알 것 같다. 제피온은 혼돈이 준 이 힘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고 있었다. 즉, 저건 공주의 정명한 마나와 사방에서 끌어모은 사이한 기운을 하나로 섞어내려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은 장난에 불과한 실험이었다. 진짜 진지한 실험을 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무작정 힘을 불어넣지는 않았을 테니까.


“네놈,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죽는 게 반가울 정도로 만들어주겠어.”


소렌이 스산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이에 제피온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고, 그와 함께 철침들이 다시 줄어들어갔다.


“오해로군. 이런 실험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루해서 진작 죽여버렸을 텐데 그 쪽이 더 나았을까? 어쩄든 그 검을 치우면 공주를 돌려주도록 하지. 이 따위 경지에 머물러 있는 천무지체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까.”


소렌이 분노를 거두어들이려 애쓰면서 간신히 검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공주의 사지를 구속한 것들이 점차 시들어가며 부스러지고, 공주가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도군!”


소렌이 외치기 전에 나는 힘없이 떨어지는 공주를 낚아챘다.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사이한 기운이 온몸의 근육이며 내장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내 힘으로 내상이라도 다스려주고 싶었지만 제피온을 등 뒤에 두고 그럴 수는 없다.


“흥, 나약한 것들은 저리 꺼져라. 오너라 도군. 날 쓰러트리고 싶겠지?”


제피온이 자신만만하게 호기를 부린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하지만 내 승리는 확실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제피온의 몸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피온이 자신만만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천의결 역시 내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싸움에 임할 수 있었다.

“여러분은 돌아가세요.”


그때 소렌이 플로렌스에게 공주를 넘겨주고 앞으로 나선다. 애초의 계획이 그렇기는 했지만 굳이 나설 필요 없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엇보다 수천의 적을 단칼에 베어버린 다음부터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텐데도 소렌은 굳이 검을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는 도군과 함께 싸우겠습니다.”


소렌이 그렇게 말한 순간 카헬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빈정거렸다.


“저기, 대장. 미안하지만 내가 볼 땐 대장도 방해야.”


“카헬!”


“말조심해!”


부대원들이 흠칫 놀라며 카헬에게 언성을 높인다. 그러나 카헬은 그 특유의 당당함으로 무장한 채 독설을 퍼부었다.


“대장도 봤잖아. 저놈은 드래곤보다 더한 괴물이야. 만약 저놈이 못 이기는 적이 있다면, 이 세상은 끝장일 정도라고. 한마디로 이건 저놈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잖아.”


“압니다.”


“그런데 왜 고집을 부려? 원래 작전은 두 사람이 남는 거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의 힘으로는 도움이 안 돼. 도군보다는 못하지만 검은 별도 척 보니 무식하게 강하잖아. 잘못하면 대장만 죽고 끝날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제피온이 사방팔방 도망 다니면, 나는 제피온을 잡으려 궁극의 검을 선보일 것이다. 그러다 그 검의 여파가 소렌을 덮칠지도 모르지. 그러지 않으리라고 단언하고 싶지만, 솔직히 궁극의 검은 천의결의 예측조차 뒤바꾸는 엄청난 검이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압니다. 하지만 전 남겠습니다.”


소렌의 한결같은 고집에 카헬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힘없이 코웃음을 치며 뒤로 돌아선다. 더 이상 설득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확신한 모양이다.


“하, 좋아. 참 좋으시겠어. 대장 정도의 재능이 있다면 난 절대 그렇게 목숨을 버리지 않을 텐데. 혹시 알아? 더 노력하면 도군처럼 강해질지도 모르잖아. 뭐,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죠. 됐습니다. 전 먼저 갑니다. 다들 가자고. 우리 할 일은 끝났잖아.”


혼잣말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운 카헬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부대원들이 침묵을 지키며 카헬의 뒤를 따른다. 그리고 로지가 품속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아마 귀환용 마법을 준비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혹시 제피온이 이들을 방해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제피온은 권태로운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을 뿐 영 손을 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카헬이 몸을 돌려 고함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역시 안 되겠어. 대체 왜 위험을 자처하는 건데? 그렇게 저놈한테 붙어있으려는 이유가 뭐야?”


카헬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나를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멍청한 새끼. 빌어먹을 새끼. 왜 그렇게 강한 건데? 네가 그 따위로 강하니까 나는 넘볼 수도 없잖아. 난 대체 어떻게 해야 소렌은 나란 놈을 봐주는 건데? 대답해 봐 도군. 어떻게 해야 하냐?”


소렌에 대한 경칭도 잊고 카헬이 정신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지금 이순간은 모두의 시선이 카헬을 향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피온마저도.


“무슨 말인지...”


내 대답이 다 나오기도 전에 카헬이 더욱 분노해서 언성을 높였다.


“멍청한 새끼. 그래, 됐다. 넌 늘 의뭉한 표정만 짓는 게 어울린다고. 하지만 알아둬. 난 도망치는 게 아냐. 너 같은 사람들은 몰라. 언제나 멋진 짓만 일삼는 사람들이니까. 그래, 너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고 있는 거야. 하지만 아니야. 나는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개죽음을 당하는 게 싫다고! 발목만 잡다가 아무것도 아닌 채 죽고 싶지 않아!”


카헬의 외침이 멎는다. 그리고 나는 절실히 카헬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긍지며 자존심 따위가 무엇인지 잘 안다. 그리고 동경해왔다. 천의검문의 주인이었던 아버지서부터 나를 지키려다 죽어버린 토리나에 이르는, 그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능력에 걸맞지 않는 웅지를 품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난다. 토리나가 비참하게 죽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설프지만 열심히 쌓아온 모래탑이 주인을 잃고 허물어진다. 그동안 겪어온 고통과 인내의 소산물이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다.

카헬은 결코 천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걸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전생의 나처럼 체념한다면 모를까, 그는 아직 체념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흥, 착각하고 있군.”


그때 카헬의 고함이 자아낸 묘한 침묵이 깨졌다. 죽 우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제피온이 철저하게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어차피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을 뿐이다. 아둔한 네가 백날 노력해봐야 네놈은 결국 저 힘의 발끝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어차피 네놈들은 다 죽는다. 단지 지금은 저놈 덕택에 조금 목숨이 늘어났을 뿐이지.”


제피온의 기세가 점점 불어난다. 더 이상 기다려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에 로지가 급히 품속에서 곱게 말린 주문서를 꺼내든다.


“카헬, 할 말이 있으면 5초 안에 끝내. 당장 텔레포트를 할 거니까!”


“그래, 좋다.”


카헬이 한차례 숨을 고르고 나와 소렌을 번갈아본다. 그리고는 로지의 주위로 돌아가서는 시선을 돌린 채 나직이 말했다.


“이런 말은 별로 안하고 싶었지만 이런 말밖에 안 떠오르네. 두 사람 다 살아서 돌아와. 그리고 그때 진짜 경쟁을 해 보자고.”


과연 무엇을 두고 경쟁하자는 말일까? 천의결이 무심하게 그 사실을 척하니 짚어낸다. 이럴 땐 참 마음에 안 든다. 무엇보다 내가 그 사실을 서서히 눈치 채고 있을 때는 더더욱.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마음이 하수상하여 글이 잘 나온지도 분간이 안 됩니다. 별 내용도 없는데 괜히 7천자나 되는 것 같아 영 못마땅합니다.

자, 이번 챕터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연들은 무사히 무대 뒤로 퇴장했고 이제 클라이막스에 접어들었습니다. 과연 제피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뒷내용은 어쩌면 뻔한 전재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부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전개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Inferior Struggle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41 3. 천의검문의 소문주 (4) +4 14.07.28 1,188 29 12쪽
140 3. 천의검문의 소문주 (3) +3 14.07.26 1,342 33 12쪽
139 3. 천의검문의 소문주 (2) +5 14.07.25 1,461 36 10쪽
138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 +3 14.07.24 1,822 37 16쪽
137 2. 기연 (6) +8 14.07.23 1,718 36 11쪽
136 2. 기연 (5) +8 14.07.22 1,585 34 15쪽
135 2. 기연 (4) +5 14.07.21 1,511 42 12쪽
134 2. 기연 (3) +9 14.07.19 1,473 36 19쪽
133 2. 기연 (2) +6 14.07.18 1,572 38 13쪽
132 2. 기연 (1) +9 14.07.17 1,715 46 14쪽
131 1. 둔재지로(鈍才之路) (6) +11 14.07.16 1,682 38 13쪽
130 1. 둔재지로(鈍才之路) (5) +8 14.07.15 1,449 36 13쪽
129 1. 둔재지로(鈍才之路) (4) +9 14.07.14 1,447 34 10쪽
128 1. 둔재지로(鈍才之路) (3) +4 14.07.12 1,594 38 13쪽
127 1. 둔재지로(鈍才之路) (2) +6 14.07.11 1,586 40 10쪽
126 1. 둔재지로(鈍才之路) (1) +8 14.07.10 1,680 34 14쪽
125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10 14.07.05 1,843 34 23쪽
124 0. 호접지몽(胡蝶之夢) (1) +15 14.06.28 1,901 33 7쪽
12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2) +6 14.06.28 1,665 35 26쪽
12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1) +4 14.06.26 1,262 23 22쪽
»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0) +2 14.06.13 1,224 20 17쪽
120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9) +5 14.06.06 1,717 35 21쪽
119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8) +4 14.05.30 1,193 28 14쪽
118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7) +5 14.05.24 1,591 19 22쪽
117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6) +6 14.05.22 1,658 21 18쪽
116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4 14.05.19 1,570 24 20쪽
115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4) +6 14.05.09 1,381 32 12쪽
114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3) +4 14.05.04 1,505 26 11쪽
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51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7 35 2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