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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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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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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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2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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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7)

DUMMY

제피온이 선전포고를 한 직후, 사방에서 급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스탄트가 엠펠로니아와의 전면전을 알려왔다.

그 뒤를 이어, 라스탄트가 군세를 돌린 틈에 중소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내전이 발생했다. 그러나 내전은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사실상 엠펠로니아를 등에 업은 쪽이 반대파벌을 제거하는 과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또한 자카이야에서도 비보가 흘러나왔다. 네크로멘서들과 공조하여, 엠펠로니아의 병력이 대량으로 자카이야를 유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연합의 수뇌부가 로베른의 왕궁으로 모여들었다. 로베른의 국왕은 물론이고 각국의 대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었다. 심지어 나도 소렌을 따라 회의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스탄트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최소한 뒤를 어지럽히는 중소국의 조무래기들을 정리해 주지 않으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합니다.”

라스탄트의 전권대사는 카르밀 레지던스라는 자였다. 반백의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기고 묶은 문사(文士) 풍의 장년인이었다. 그러나 과연 라스탄트 출신답게, 체격은 꽤 단단해 보였고 형형한 눈빛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렬했다.

“라스탄트는 형편이 나은 셈이지요. 그쪽에는 볼마르그 공작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카이야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히넵 장군이 죽은 뒤로는 사실상 혈족 간 통합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가무잡잡한 청년은 기이한 술법으로 조금 전 이 자리에 다다른 자카이야의 사신이었다. 자카이야 사신의 말에 라스탄트의 대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고작 네크로멘서 따위일 텐데요. 자카이야는 겨우 그 정도에 무너질 나약한 곳이던가요?”

“네크로멘서만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 역시 라스탄트와 마찬가지로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네크로멘서 덕분에 계속해서 부활해대는 그런 것들과 말입니다. 그렇게 치자면 그쪽은 최소한 다시 살아나지는 않겠지요.”

“그나마 그 정도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지요. 볼마르그가 네크로멘서를 대륙에서 몰아내지 않았으면 진작 다 죽었을 테니까요.”

“그럼 그 볼마르그로 잘 막아보시지요. 그리고 이번에 놈들이 노리는 건 아탄샤의 무녀입니다. 드래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말입니다.”

양국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설전이 격화되자, 로베른 국왕이 크게 헛기침을 하고 두 사람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모두 진정하시오. 라스탄트는 연합의 방패이자 창이라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카이야는 드래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을 가진 중요한 곳이라는 것도 잘 알고요.”

문득 쥬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 마지막으로 보고 벌써 1년인가? 사실 내가 느끼기는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저기 있는 자는 아탄샤의 부마. 우리는 아탄샤의 보호를 위해 부마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자카이야의 사신이 나를 지목하며 그렇게 일축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렌이 나서서 자카이야의 요청에 반대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군은 검은 별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함부로 후방으로 이탈하면 검은 별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검은 별은 연합의 중심지인 로베른의 수도까지 서슴없이 침투하는 자입니다. 그 덕분에 국왕 폐하께서 큰일을 당할 뻔 했지요.”

제피온에게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일이었겠지만 로베른의 국왕이 변을 당하면 연합의 사정이 어려워지는 건 또한 사실이다. 상황이 꽤 어렵게 되었다. 역시 1년이라는 시간은 길었다. 제피온이 기고만장했을 때 끝장을 봤어야 하는 건데.

“그렇다면 무작정 언데드들과 싸우라는 말씀이십니까, 폰테일 공?”

자카이야의 사신이 아예 칼이라도 뽑아들 기세로 소렌을 노려본다. 그러나 소렌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대신 로베른의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오.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짐이 언질을 해 두었소. 이미 벨스터 공왕과 제임스 엠벤트가 움직였으니 조만간 자카이야에 연락이 닿을 것이오.”

자카이야의 사신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골랐다. 그로서도 이게 최선이라는 걸 잘 안 것일테지. 국왕은 이어서 라스탄트의 대사에게 말했다.

“또한 우리 로베른은 이 자리에 참석한 각국의 협력을 받아 라스탄트의 뒤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토벌할 것이외다. 허니 라스탄트는 조금만 더 견디어 주시오.”

“그건 좋습니다. 하지만 저들을 어찌 믿겠습니까?”

라스탄트 대사가 중소국의 대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라스탄트는 로베른이 저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달갑지 않습니다. 더욱이 저들과 함께 그 정신 나간 놈들을 벌한다니,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변절한 이는 국적을 막론하고 모두 유폐해 두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모두 연합의 우방입니다.”

소렌이 품속에서 명령서를 꺼내어 보이며 말했다. 로베른 국왕이 직접 인가한 체포명령서다. 게다가 그걸 집행한 자는 소렌 자신이다. 라스탄트 대사가 그 명령서를 받아들고는 나름대로 수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국의 후작까지 가차 없이 지하 감옥에 유폐하셨군요. 게다가 폰테일 공이 직접 나섰다니, 그대의 명예를 신뢰하여 우리 라스탄트는 더 이상의 의문은 삼갈 것입니다.”

꽤나 흥미로운 과정이었다. 언제나 커다란 사건 밖에만 있던 나로서는 이 일련의 과정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분명 나는 강하다. 하지만 그건 외적 힘에 국한된다. 이들은 그 힘 이상의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나라면 이들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나는 소렌에게 외경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외적인 힘과 내적인 힘 양자를 지닌 천재였기에.

“지원 문제는 이쯤하고, 다음으로 폰테일 공이 지휘하는 작전에 대해 말씀드리겠소. 폰테일 경.”

국왕이 소렌을 지목함과 함께 좌중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제야 나와 직접 연관되는 이야기가 시작되려 한다. 나는 내심 마른침을 삼키고 나를 주시하는 이들을 당당히 마주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제 지휘 하에 소수정예는 엠펠로니아에 침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엘레나 루이 로베른 공주마마를 구출할 것입니다.”

“잠깐만요. 겨우 그런 일에 아탄샤의 부마를 낭비한다는 겁니까?”

자카이야의 사신이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가 안색을 굳힌다. 그리고는 로베른 국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도 국왕은 그리 역정을 내지는 않았다. 단지 조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뿐.

“일단은 그렇습니다. 공주마마를 구출하는 것이 일차 목표입니다.”

“흠,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스탄트 대사가 흥미를 가지고 묻는다. 천성이 호탕한 것인지, 소수 정예로 엠펠로니아에 쳐들어간다는 게 마음에 든 모양이다.

“검은 별은 공주마마가 갇혀 계신 걸 스스로 입 밖에 냈습니다. 그리고 검은 별이 굳이 병력을 일으킨 건 소수정예. 정확히는 도군이 그곳으로 오기를 바라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함정에 빠진다는 말이군요.”

자카이야의 사신도 흥미가 동했는지 조금은 호응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그다지 잃는 게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가벼운 반응을 보여줄 수 있는 거겠지. 조금은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검은 별은 유일하게 도군을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뻔한 함정을 판 것이지요. 만약 도군이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숨겨진 함정이 펼쳐질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뻔한 함정에 빠져서 역으로 이를 이용할 것입니다.”

새로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었으며 본디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소렌 폰테일. 전략전술에도 능한 그녀가 전장에서 빠지는 건 크나큰 손해다. 하지만 소렌이 노리는 것은 크고 작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게 아니다. 이 전쟁을 끝내는 게 그녀의 진짜 목적이다.

“검은 별은 분명 함정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마법이라도 이용해서 도군에게 접근할 것이 분명합니다. 검은 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우리는 검은 별을 떨어트릴 겁니다.”

회의장에 침묵이 감돈다. 말하자면 이건 단순한 도박이다. 제피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득이고, 나타난다면 결과는 둘로 갈린다. 전쟁을 끝내거나 아니면 소렌과 나를 잃거나 당연히 결과는 후자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내 확신을 알리는 없다. 이들은 제피온이나 내 힘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를 도박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을 반영하듯, 침묵은 꽤 길게 이어졌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다름 아닌 라스탄트의 대사였다.

“하나 묻겠습니다. 소수로 엠펠로니아 깊숙이 침투하는 게 가능합니까? 엠펠로니아에는 적어도 일만 가량의 병력이 잔존해 있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라스탄트는 그 작전을 지원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라스탄트 대사가 매정하다면 매정하게 지원을 일축한다. 그러나 소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에 수긍하며 대답을 주었다.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청하는 것일 뿐입니다.”

“뭐라고?”

라스탄트 대사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경칭까지 잊고 반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렌은 계속해서 할 말을 이어갔다.

“우선 엠펠로니아 국경까지만 함께 움직여서 움직임을 감추고, 국경을 넘을 때부터는 독립적으로 움직일 예정입니다. 이에 대한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실로 광오한 소리군. 본관은 한 명의 영웅이 전쟁을 끝내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솔직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아무런 지원도 필요 없다 판단한 것입니까?”

소렌이 내게 잠깐 시선을 준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돌려 신념이 가득한 눈으로 장담했다.

“그렇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짊어진 이들은 과연 소렌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았든 간에, 그들은 모두 소렌의 말에 수긍했고 무모한 작전은 결행되었다.

마법진을 통해 라스탄트로 향한 독립기동부대는 곧바로 라스탄트의 한 부대와 접촉했고, 엠펠로니아를 향해 움직였다. 또한 우리는 큰 싸움을 앞두고 체력을 아끼기 위해 말을 타고 기병부대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말은 탈만 해?”

“응. 생각보다는.”

제법 능숙하게 고삐를 쥐고 있으려니 소렌이 문득 내게 물었다. 전생에 몇 번 타본 것이 고작이었지만, 천의결의 도움을 받으니 오랫동안 타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휘유, 분위기가 활활 타는군요. 두 분 결혼식은 언젭니까? 저 로지 에인즈. 반드시 참석하고 싶습니다.”

크리스도 꽤 유쾌한 성격인데 로지는 아예 술이라도 취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로지의 말에 적당히 호응해 주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무리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곁눈질로 소렌의 안색을 살피니 전에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로지 때문에 꽤 화가 난 모양이다. 그 분위기를 읽었는지 로지도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모는데만 전념한다.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군.

그렇게 침묵 속에서 행군을 계속하던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엠펠로니아 근방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소렌은 솔선수범해서 라스탄트에서 식량을 받아오기로 했고, 다른 이들은 말을 돌보거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오는 등 스스로 할 일을 도맡기 시작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카헬이 위협적으로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공을 화기로 바꾸어 불을 피우던 나는 멀뚱멀뚱 서서 그 질문의 의미를 헤아리다가, 곧 그가 불을 피우는 법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마나의 근원에 대해 깨닫고 그걸 다룰 수 있어야 하지.”

서로 존칭을 하지 않는 것도 제법 편하군. 이런 점은 카헬이 참 마음에 든다.

“안다. 제임스님의 연구는 나도 읽어보았으니까. 내가 묻는 건 구체적인 방법이다.”

나는 천의결의 도움으로 쉽게 깨달은 것이기에 도무지 요령을 가르쳐 주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을 못 알아들은 것처럼 다시 대략적인 느낌만을 전해주니, 카헬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댔다.

“흥, 가르쳐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라.”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은 모른다. 왜냐면 나는 천의결로 그 과정을 뛰어넘어 단번에 근원을 터득했으니까.

참 웃기는 일이다.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으면서 남을 가르칠 수는 없다니.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는 있어도 일문의 영도자가 되기는 어려운 놈이다, 나란 놈은.

“어어, 카헬. 너 또 왜 삐져있어?”

로지가 말 먹이로 주던 건초로 카헬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이죽댔다. 그리고는 카헬의 자초지정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고심했다.

“음, 이런 느낌 아닐까? 마법을 쓸 때는.....”

로지가 청산유수처럼 마법의 이론을 늘어놓았다. 그때 문득 나는 저 이론이 내 기예의 상당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슷합니다. 단지 마력으로 바꾸는 과정을, 불에 대한 심상을 불어넣는 것으로 대체하면 될 겁니다.”

“흐음, 어렵네요. 그 심상을 깨달으려면 불 속에라도 뛰어들어야 하나 봐요. 잘 됐네. 카헬, 너 모닥불에 머리박아 봐. 그럼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몰라.”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카헬은 이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다시 장작을 주우러 사라져버렸다. 이에 로지는 민망한 듯 웃어 보이고는 카헬을 따라 숲 속으로 달려갔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이 오래지 않아 이 기예를 터득할 것을 직감했다. 적어도 저들은 이 기예를 터득하는 길을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으니 말이다.


그날 밤이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소렌은 내일부터 라스탄트와 따로 움직이기 위해 부대장과 이야기를 하러 갔다. 그리고 우리는 모닥불 앞에서 마지막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엠펠로니아 안에 들어갈 테니, 이런 호사를 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봐 도군.”

소렌이 자리를 비운 다음부터 죽 나를 바라보고 있던 카헬이 문득 나를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카헬을 향하고, 카헬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찬 검을 서슴없이 뽑아들고 내게 겨누었다.

“속이 더부룩해 보이는데 대련이나 해볼까?”

카헬이 느닷없이 내게 대련을 청해왔다. 나는 묵묵히 카헬의 검을 응시하다 반문했다.

“싫다면?”

“싫으면 내가 먼저 가지.”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군.”

플로렌스가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카헬은 아랑곳하지 않고 죽 내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네가 져.”

“그건 알아. 그냥 내가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보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날 상대해봐.”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단숨에 허리에 찬 검을 뽑아서 카헬의 목에 겨누었다. 섬전과도 같은 빠르기에 카헬은 옴짝달싹 못하고 뒤늦게 목줄기에 닿은 검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다시 말해주겠지만 네가 져.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하면 넌 죽어.”

놀라서 하얗게 질려 있던 카헬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내 검을 밀어내고 대뜸 검을 휘둘러 온다. 모두가 굳어있는 가운데, 크리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카헬을 말리려 한다. 그러나 이미 카헬의 검은 내 지척에 와 있었다.

“해보라고!”

솔직히 나는 카헬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웠다. 거대한 격차를 알면서도 아등바등 달려드는 저 자세가 존경스러웠다. 나도 저리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포기했고 이 힘을 얻었다.

“좋아.”

카헬의 검을 잠룡보로 가볍게 피해내고 나는 마음을 굳혔다. 나는 내 힘이 우연히 주운 보물과도 같은 것임을 잘 안다. 이 힘을 좋다고 휘두르는 건 정진하고 있는 자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모독일지도 모른다. 강대한 힘에 주저앉지 않는 이도 분명 있는 법이다. 소위 진짜 천재란 그렇지.

“3번을 양보하겠어. 앞으로 두 번이다.”

“칫, 마음에 안 들어.”

카헬이 투덜대면서도 적극적으로 공세를 펴 온다. 내가 대련을 받아들이자 크리스도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대련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역시 내 검에서 무언가를 배워가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

“강하지만 그뿐이야. 강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이기지 못해.”

카헬의 검은 철저한 강검이다. 가장 이해하기 쉽고 익숙해지기 쉬운 검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그저 그런 소드마스터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은 되지 못한다.

“하압!”

카헬이 처음으로 검에 변화를 준다. 놀랍게도 카헬의 변화무쌍함은 소렌의 검과도 비슷해 보였다. 아마 소렌의 아래에 있으면서 터득한 거겠지.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내겐 익숙할 뿐이었다.

“그건 너와는 어울리지 않아. 검의 의미를 파악하되 너는 네 검을 잃어서는 안 돼.”

“후우, 후우, 그게 무슨 소리냐?”

카헬이 호승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지금부터 그걸 가르쳐 줄 생각이다.

“이번에는 내가 간다. 한번 막아봐라.”

이제는 꿈속에서도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검명비산을 펼친다. 카헬의 검이 박살나지 않도록 최대한 힘을 죽였지만 그럼에도 카헬은 내 검을 버거워했다.

“크윽...”

“눈을 감지 마.”

연신 카헬을 몰아붙이며 나는 냉정하게 조언을 해 주었다. 카헬은 나처럼 변변한 스승도 없이 수련한 자다. 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 스승도 없이 수련하는 처지에서도 궁극점을 보고 체득할 수 있었다.

“제기랄, 이건 말도 안 돼.”

“그렇겠지.”

나는 옹졸한 검사였다. 가르침을 주었다가 압도당할 것을 걱정한 한심한 작자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역전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으로 만들어진 아량이라 해도 좋았다. 나는 카헬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다.

“진정 강한 힘은 드넓은 바다를 뒤흔드는 법.”

나는 그를 또 다른 나처럼 여기는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강해지는 걸 보고 싶었다. 재능과 환경.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뛰어넘어 나는 지금 이 시점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잘 봐라. 이게 네가 도달해야 할 첫 봉우리다.”

검명비산을 넘어선 궁극의 강검. 창해경란이라는 검격이 카헬을 향해 쏘아져간다. 강검이지만 강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검은 강하다. 수많은 검의를 포용하고 있는 주제에 모순되게도 한 가지 검의가 두드러진 그야말로 괴상한 검이다.

“크으...... 으응?”

카헬이 벙찐 표정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뜬다. 그리고는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러내리는 가루를 한번 움켜쥐었다가 그대로 쏟아낸다. 크리스가 침음을 내며 뇌까렸다.

“검신이..... 가루가 됐다고?”

“말도 안 돼.”

모래처럼 고운 가루가 된 검신이 카헬의 손에서 완전히 흘러내린다. 카헬이 허탈하게 웃으며 자루만 남은 검을 떨어트린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 본래 앉아있던 자리에 앉는다.

“어, 음....... 저기 도군님.”

로지가 검을 집어넣는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 건데요. 혹시 도군 님은 혼자서도 검은 별을 이길 수 있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로지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왜 필요한건가요? 혼자서 움직이면 벌써 전쟁이 끝났을 것 같은데요.”

“그건 도군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돌아와 있던 걸까? 소렌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소렌은 카헬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가 말했다.

“도군은 강합니다. 엘프 수백도 단숨에 처치할 수 있고 드래곤도 혼자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을 감추기 위해 필요했던 거고요.”

모닥불 타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분위기가 착 가라앉는다. 유쾌함을 뽐내던 로지도 지금은 진지한 모습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건, 그 침묵을 만들어낸 소렌이었다.

“그보다 도군, 안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소렌이 침묵을 지키는 이들을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엠펠로니아 내에 남아있던 병력이 모두 이 근방으로 모여들고 있어. 그리고 네크로멘서나 해츨링도 관측됐고 이상한 마법까지 펼쳐져 있대.”

말 그대로 함정이로군. 나는 저 멀리 엠펠로니아 쪽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이라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사이한 기운은 분명 어마어마했다.

“라스탄트는 일단 후퇴하기로 했어. 도군.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내 힘에 경악했던 분위기는 이제 앞으로 다가올 험난한 여정에 대한 걱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분위기가 다시 내 힘에 대한 경외로 바뀌라는 건 분명하다. 왜냐면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으니까.

“여기서 엠펠로니아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릴까?”

“방법에 따라 달라. 예정대로라면 닷새정도 걸리고 돌아서 간다면 한 달 이상 걸려.”

둘 다 늦다. 나는 미리 봐 두었던 지도를 떠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수도까지 산은 없었지. 그럼 여기서 직선으로 수도까지 달려간다면 이틀이면 될까?”

말도 안 되는 경로건만 소렌은 별다른 동요나 반대 없이 대답을 내 주었다.

“그럴 거야.”

그렇다면 방법은 결정했다. 나는 모닥불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다들 이틀 내내 달릴 자신은 있겠지요?”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진(眞) 도군무쌍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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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2. 기연 (3) +9 14.07.19 1,472 36 19쪽
133 2. 기연 (2) +6 14.07.18 1,571 38 13쪽
132 2. 기연 (1) +9 14.07.17 1,715 46 14쪽
131 1. 둔재지로(鈍才之路) (6) +11 14.07.16 1,682 38 13쪽
130 1. 둔재지로(鈍才之路) (5) +8 14.07.15 1,448 36 13쪽
129 1. 둔재지로(鈍才之路) (4) +9 14.07.14 1,447 34 10쪽
128 1. 둔재지로(鈍才之路) (3) +4 14.07.12 1,594 38 13쪽
127 1. 둔재지로(鈍才之路) (2) +6 14.07.11 1,586 40 10쪽
126 1. 둔재지로(鈍才之路) (1) +8 14.07.10 1,679 34 14쪽
125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10 14.07.05 1,842 34 23쪽
124 0. 호접지몽(胡蝶之夢) (1) +15 14.06.28 1,901 33 7쪽
12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2) +6 14.06.28 1,665 35 26쪽
12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1) +4 14.06.26 1,260 23 22쪽
121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0) +2 14.06.13 1,223 20 17쪽
120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9) +5 14.06.06 1,717 35 21쪽
119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8) +4 14.05.30 1,193 28 14쪽
»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7) +5 14.05.24 1,590 19 22쪽
117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6) +6 14.05.22 1,657 21 18쪽
116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4 14.05.19 1,570 24 20쪽
115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4) +6 14.05.09 1,381 32 12쪽
114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3) +4 14.05.04 1,505 26 11쪽
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51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6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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