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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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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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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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6.26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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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1)

DUMMY

“자, 그럼 죽을 사람은 둘 뿐인가?”


제피온이 소렌과 나를 바라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이에 나는 왼손을 말아 쥐며 대꾸했다.


“아니, 네놈 하나겠지.”


“재미있는 농담이군.”


제피온이 무슨 수를 숨기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아직은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아마 내게 위협이 될 순 없을 터다. 그런 확신을 품고 나는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젠 그 교활한 말을 들어주는 것도 지겹다. 와라, 제피온. 이제 끝내자.”


제피온의 함정은 오히려 내 힘을 연습하기 좋은 무대에 불과했다. 처음 이 힘을 가졌을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능숙하게, 나는 빈손에서 솟아난 빛줄기를 움켜쥐었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심검(心劍)이다.


“과연 마음에 드는군.”


제피온이 뜻모를 소리를 하고는 돌연 기세를 죽인다. 금방이라도 짓쳐들 것 같은 살기가 가라앉자 소렌이 오히려 경계의 끈을 다잡는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긴장할 것 없다. 본좌가 삼초를 양보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야.”


양보? 제피온이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은 너무나도 광오했다. 물론 파천마제라는 이름은 그리 가볍지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나와 비교해서는 너무나도 격차가 크다. 제피온도 그걸 알면서 굳이 저러는 건 그 꿍꿍이를 위한 초석일까?


“받아들이지.”


괜한 자존심을 내세울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제피온의 수작을 이용해서 철저히 그를 무너트릴 작정이다. 그렇기에 나는 조금 시간을 들여서 검의를 구현해냈다.


“일세지검, 대종참(大縱斬).”


왼손에 쥔 빛나는 검이 온 세상을 두 쪽으로 갈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제피온이 있었다. 그러나 제피온은 어찌 된 일인지 피하려는 기색이 없다.

대신 제피온은 한 손으로는 기기묘묘한 도형을 그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내 검을 받아냈다. 그와 함께 반듯하게 쏘아져 나가던 검세가 일그러지며 제피온을 지나쳐, 애꿎은 지면을 할퀴었다.


“이화접목으로 시간을 벌고 그 틈에 공간을 뒤틀어 공격을 흘려낸 거냐?”


천의결로 읽어낸 저 한수를 입 밖에 내뱉으며 나는 조금 불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궁극의 일격을 이리도 쉽게 상쇄하다니. 역시 조무래기들과는 다르다. 생각보다는 시간이 걸리겠어.


“어리석은 공격이었지. 네놈의 검은 실로 대단하다만 결국 범인의 검. 날카로운 칼날을 피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자, 이제 두 번 남았군.”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온다. 분노와 씁쓸함이 섞인 그 감정은 연신 내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천검!”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하늘 높이 집어던진다. 그리고 그 검을 중심으로 셀 수 없을 만큼의 검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그 검이 일제히 제피온에게 쇄도해갔다. 제피온의 눈썹이 꿈틀한다.


“만쇄.”


마음속에서 쉴새없이 솟아오르는 검의가 빛나는 검들을 타고 제피온에게 적의를 쏘아낸다. 가장 먼저 강검과 쾌검의 검의를 담은 검이 제피온을 덮쳤다. 그러나 그순간 나는 다시 혀를 찼다. 놈이 이대로 당하지 않는다는 걸 직감한 탓이다.


“이 또한 저열하기 그지없다. 절대방벽(Absolute Barrier).”


드래곤의 브레스를 막아낸 제임스의 마법과 비슷한, 오히려 더욱 견고한 느낌이 드는 반투명한 방벽이 제피온의 주위를 감싼다. 그와 함께 수백 자루의 검이 짓쳐들었지만, 역시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리어 제피온은 무리하게 힘을 썼는지 방벽 안에서 울컥 피를 토해냈다.


“크으..... 보아라. 이것이 어리석은 제임스가 포기한 진짜 힘. 네놈의 힘과 동격에 있는 궁극의 마법이다!”


“격에 어울리지 않는 힘은 목숨을 깎아먹는 법이지.”


방금 일격으로 제피온의 수명이 상당히 줄었다. 이제 제피온은 이대로 도망치더라도 결코 한 달을 넘기지 못한다. 게다가 방금 전처럼 궁극마법을 썼다가는 그대로 죽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하늘이 제피온을 벌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다.


“크으윽, 이제 한번 남았군.”


제피온이 그 말을 내뱉고는 휘청대다가 기어코 한쪽 무릎을 꿇고 만다. 저래서야 한 달도 길겠군.


“도군, 혹시 모르니 마지막은 내가 손을 보탤까?”


묵묵히 싸움을 지켜보던 소렌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소렌의 힘을 빌 생각은 없었다. 이건 엄연히 내가 스스로 매듭지어야 할 일이다.


“괜찮아. 날 믿어 줘.”


이 말에 소렌이 순순히 뒤로 물러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렌은 결코 공을 세위기 위해 마지막 공격에 가담하려는 게 아니다. 생각보다 제피온의 저력이 뛰어난 탓에 우려를 전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다 소렌이 제피온의 발악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는다.


“자, 와 보거라 천하제일의 둔재여. 나 백천무는 둔재에게 아량을 베풀어 삼초를 양보했으니,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제피온이 연극무대에라도 선 것처럼 목청껏 고함을 내지른다. 그리고 나는 천하제일의 둔재라는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둔재이되 천하제일의 경지에 오른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젠 끝내주마. 천검.”


다시 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번에 담은 검의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만의 군세를 도륙한 궁극의 무리를 담았다. 제아무리 제피온이 궁극마법을 펼친다 해도 이 검은 그것마저 꿰뚫어 제피온의 목숨을 취할 것이다.


“만섬(萬殲).”


번쩍 하는 휘광과 함께 천 자루의 검이 쇄도해갔다. 그와 함께 나는 천의결을 운용했다. 놈의 수작을 꿰뚫어보기 위함이다. 역시나 제피온은 무언가 수를 쓰고 있었다. 방벽으로 검을 막는 척 하면서 공간의 저편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의지는 공간의 저편조차도 가를 지고한 검. 나는 천의결이 가리키는 대로 일천의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제 끝났으리라는 것을.


“크하하하!”


그러나 그때였다. 궁극의 검이 쇄도하는 찰나의 순간에, 순식간에 제피온의 운명이 변했다. 백윤의 생명력을 갈취한 그때처럼 말이다. 젠장, 시간을 줘선 안 돼. 나는 천검 사이로 뛰어들어가 관(貫)의 검의를 간직한 검을 쥐었다. 그리고 제피온의 심장을 향해 그것을 내질렀다.


“내가 이겼다 어리석은 자여.”


검에 격중해 가슴이 뻥 뚫린 제피온이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까뒤집는다.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운명이 바뀌어버렸는지, 아직 바뀌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궁극의 검이 연신 천기를 일그러트리며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천의 검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흐름이 사정없이 영혼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도군! 위를 봐!”


소렌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뒤늦게 나는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주위를 에워싼 일천의 검이 사라지고, 천기가 고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탄식을 내뱉었다.


“오랜만입니다 소문주.”


자기 키 만한 무언가를 안고 있는 그 그림자는 무척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천의결이 그동안 정체를 감추었던 그 자와 얽힌 이야기를 짚어냈다. 깃털처럼 천천히 바닥에 착지하는 그를 보며, 나는 한숨과 번민이 담긴 한마디를 내뱉었다.


“위 장로. 아니, 위양풍. 설마 당신이 사파의 세작이었을 줄이야.”


천천히 전생에서 보았던 비무대회가 떠올랐다. 패기만만하게 열화검에게 검을 겨누었던 그 광경이 말이다. 천의결이 그 기억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정교하게 꾸며진 연극이라고.


“설마? 설마 이제야 알아챈 겝니까? 아둔하기 짝이 없군요. 소문주는 어째서 굴러온 돌이 그리도 기세등등하게 소문주를 내칠 수 있었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게로군요.”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시커먼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휘감고 있는 검은 천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천의결이 발하는 직감을 외면하며 나는 헛바람을 삼켰다.


“소문주의 죽음은 내가 잘 마무리했습니다. 덕분에 지존의 핏줄이 천의검문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요.”


검은 천 아래서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차갑게 굳은 시체다. 그 누구의 시체도 아니다. 바로 내 시체다. 천의검문의 소문주였던 도군의 시체.

구역질이 밀려왔다. 저 몸을 보자마자 나약하기 짝이 없던 시절이 떠오른다. 어쩐지 지금 내 몸이 점점 아둔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나를 일깨워 준 건 다름 아닌 소렌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저쪽은 우리 편이 아닌 것 같네. 정체를 밝혀라!”


소렌의 어깨가 내 팔에 스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몸에 들어간 강대한 기운을 느꼈다. 그렇다. 전생의 일이 어찌되었든 무슨 상관인가? 나는 궁극의 무를 얻어 제피온을 쓰러트렸다. 그게 전부이며 또한 현실이었다.


“그나저나 그 아둔하던 소문주가 이리도 강대한 힘을 갖게 되었다니 이 위모는 감개무량하외다. 진작 문주께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좋았을 것을, 왜 그러지 못하였을꼬?”


“....닥쳐라.”


혼란은 가셨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진 건 아니다. 나는 짙은 살기를 흘려 위양풍을 압박했다. 위양풍은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단전 한가운데에서는 마나 드레인의 기척까지 느껴진다. 즉, 위양풍은 소렌 혼자서도 처치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으음, 과연 절대자의 무위로다. 실로 소문주에게는 과분한 힘이 아닐 수 없소이다.”


내 살기를 간신히 견뎌내면서도 위양풍은 끝까지 조롱 어린 말투로 나를 자극해왔다. 비무대회 전에 보였던 가소롭다는 눈빛과 함께 말이다. 빌어먹을. 쳐 죽일까? 그런 흉험한 생각이 미쳤을 때,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 과분한 힘이지.”


딱딱하게 굳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내 시신에 돌연 생기가 돌아온다. 그리고는 유창하게 서역의 말을 내뱉는다. 그 목소리는 분명 내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위기를 전혀 다른 운명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리석구나 제피온. 그런 나약한 몸으로 부활해서 무엇을 획책할 생각이더냐?”


소렌이 당당하게 일갈했다. 이에 제피온은 평생 도군이 지어보지 못한 오만한 얼굴로 이죽였다.


“하하, 말이 심하구나. 네 정인의 본래 몸인데 조금 좋은 쪽으로 볼 생각은 없는가?”


“도군의?”


소렌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소렌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여차저차한 자초지정은 둘째치고서라도 저런 나약한 게 본래의 나라는 사실을 밝히기가 껄끄러웠다. 그것도 소렌의 마음을 알고 나서는 더더욱.


“아무래도 상관없지. 내가 무엇이고 저 몸이 누구의 것이든지.”


나는 고개를 저어 혼란을 떨쳐내고는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최후를 맞이하게 해 주마 제피온.”


“기회는 충분히 주었을 텐데?”


전생의 내 몸을 꿰찬 제피온이 비열하게 웃으며 나를 가리켰다.


“나는 삼초를 양보했다. 그리고 네놈은 그 힘을 가지고도 나 따위를 어쩌지 못해서 쩔쩔맸지.”


“그게 내 전력이라 생각하지 마라.”


제피온을 제압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 또한 사실이다. 혼돈이 준 힘은 아직 나도 끝을 모를 만큼 크고 넓었다. 그러나 제피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힘을 부정했다.


“아니, 그게 도군 네 전력이다. 너는 결국 이 따위 육신이 어울리는 둔재니까.”


그놈의 둔재타령. 더 이상은 들어 주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왼팔을 뻗어 천검을 부르려는 순간, 위양풍이 선수를 쳤다. 소렌에게 검을 휘두른 것이다.

“소저는 잠시 나와 손속을 나누어야겠소이다!”


소렌이 위양풍과 검을 맞부딪치니 맹렬한 바람과 화기가 주위를 뒤덮는다. 그 열기와 폭풍을 뒤로 하고, 제피온이 사이한 주문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죽음의 신이 목덜미에 손을 받아넣는 오싹함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절대적인 힘으로 보호받던 정신이 흐릿해졌다.


“크윽!‘


“도군!”


“한 눈을 팔 새는 없을 텐데?”


위양풍의 독문무공이 가차 없이 소렌을 덮치고, 소렌은 처음으로 접하는 위양풍의 무공에 손발을 묶이고야 말았다. 오래지 않아 소렌이 승리를 거둘 테지만 당장 소렌은 나를 도와줄 수 없다. 느릿하게 사고를 이어가며 나는 기를 쓰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남이 호의를 베풀 때는 의심을 해야 하는 법이지.”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넘어 제피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나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 힘을 얻고 나서는 숨이 가빴던 적도 없는데 현기증이라니? 아니다. 단순한 현기증이 아니다. 이건...


“나는 혼돈의 도구를 가장해서 네게 힘을 주었다. 잊지 않았겠지?”


제피온이 준 힘은 마나 드레인. 그제야 나는 마나 드레인이 제피온의 진정한 함정임을 깨달았다.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나를 거꾸러트릴 독이었다.


“마나 드레인에 숨겨놓은 것은 이혼대법(移魂大法). 네놈의 혼은 이제 본래 있어야 할 이 몸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내 몸을 가져온 건 이혼대법을 위한 밑바탕이었어. 그렇다면 이 몸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생각에 대한 답을 직감한 나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 백천무가 그 몸을 갖겠다. 잘 보아라. 이 세상에 질서를 가져올 절대자가 탄생하는 순간을!”


이제 실감할 수 있었다. 이 파국을 막기 위해 엘프의 여왕은 나를 막으려 했었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그렇기에 영웅이 물리쳐야 할 적을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주제에 왜 그리도 자만했던 것일까? 내가 충분히 제피온을 물리칠 수 있다고? 어리석었다. 제피온은 오래 전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다. 가짜 영웅행세를 할 수 있는 이 육신을 노리고 말이야.


“아아, 느껴진다. 케이오스가 이 세상에 안겨준 혼란의 씨앗이.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 파천마제 백천무로다!”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가 점점 일그러진다. 아니, 아예 무언가에 침식당하는 것처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눈앞에 한없이 괴로워하는 흑발흑안의 청년이 보인다. 멜븐의 육신을 가진 내가 말이다.


점점 거울 속에서만 보았던 청년의 모습이 또렷이 고정되고, 마침내 나는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두고, 나는 황망한 목소리로 지금의 상황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들어버린 거야. 최강이자 최악의 존재를. 나는.... 나란 놈은!”


혼이 뽑혀나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점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다. 흐릿하던 두 눈에는 정광이 번뜩였고 아주 자연스럽게 온몸에서 막대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 힘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줌을 지리면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두려운가?”


제피온이 물었다. 이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 간신히 고개를 멈추었다. 그러나 내젓지는 못했다. 고작 고개를 멈추는 게 내 한계였다.


“나는 강한 자를 존경한다. 강한 힘이야말로 존중받아 마땅하지. 하지만 나는 네놈을 존중하지 않았지. 왜 그런지 아나?”


멜븐의 육신을 차지한 제피온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힘을.”


제피온의 온몸에서 시커먼 기운이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나온다. 위양풍과 소렌이 자아내던 기운마저 순식간에 쓸려나가며 주위를 일순간에 쓸어버린다.


“고작 그 따위로만 써대는 네놈을 존경할 리 없지. 입으로 나불대지 않으면 이 힘을 끄집어 낼 수도 없는 네놈을! 나 파천마제가 어째서 존중할 수 있겠느냐?”


다시금 멜븐의 몸을 중심으로 파문이 일었다. 시커먼 기운으로 이루어진 파문에 소렌과 위양풍의 대결도 급작스레 끝을 맺었다. 위양풍이 그대로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고는 머리를 땅에 박기 시작했다.


“천세천세 천천세! 사파의 지존이시자 사해의 지배자이신 파천의 마제시여, 그 힘에 경배하옵니다. 이 위양풍.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소름이 돋았다. 저 힘을 가지고 과연 엘더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미치광이가 무슨 짓을 할까? 아니, 무엇을 할 수 없을지 궁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도군... 맞지?”


두 미치광이의 무대를 지나쳐 온 소렌이 조금 멋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제기랄, 무어라 말해야 할까?사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며, 방금 최악의 존재를 만들어낸 머저리라고? 변명에 불과한 말을 꺼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 대신 나는 간신히 소렌의 말에 답할 뿐이었다.


“....맞아.”


아둔하기 짝이 없는 육신에서 새어나온 한마디에 소렌이 싱긋 웃는다. 믿기지 않는다. 소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내 몸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품고 있는지,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웃을 수 있을까?


“그렇구나. 그리고 그게 네 진짜 모습인거지?”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인다. 길고 긴 기만이 끝났다. 나는 결코 대단한 놈이 아니다. 소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라는 걸, 이제야 밝힐 수 있었다.


“나는..... 나는 천의검문의 못난 소문주. 도......”


더듬거리며 나를 다시 소개하려는데 갑자기 소렌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니, 가까워졌다는 표현은 잘못되었다. 소렌이 갑자기 나를 덥석 끌어안은 것이다. 이 와중에도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나 소렌은 맞닿은 뺨으로 전해질 열기를 느꼈는지 무시하는지 태연하기만 했다.


“좋아해 도군.”


“무, 무슨 소리를....”


느닷없는 고백에 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다. 소렌이 더욱 힘껏 나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아.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함께했던 사람은 사실 도군 네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역시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소렌은 대체 왜....


“틀렸어.”


소렌이 천천히 내게서 멀어진다. 피비린내와 쇠냄새. 그리고 연이은 전투로 만들어진 역한 냄새 사이로 영문을 알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살랑거린다. 그 냄새만은 남기고 서서히 멀어져나는 소렌이 천천히 양 손으로 검을 뽑아들면서 말했다.


“그건 너였어, 도군.”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뒤로하고 소렌이 오연하게 서 있는 두 괴물에게 다가간다. 싸울 생각일까? 위양풍은 모르지만 제피온. 아니, 이제는 본색을 완전히 드러낸 파천마제와 싸우는 일은 자살이나 다름없다.


“자만을 못 이기고 검을 포기한 내게 검을 돌려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너야 도군.”


검을 돌려주었다? 오래 전 소렌이 의기소침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시절을. 그건 내가 한 일일까? 어쩌면 멜븐이 했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연인과의 작별은 충분히 나누었나, 폭풍의 검사여.”


파천마제가 나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진중하면서도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태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지만 그건 존중이었다. 자신만은 못하더라도 충분히 강하며, 강해지고 있는 자에 대한 존중. 그것을 알아차린 나는 검은 별이자 파천마제의 의지가 얼마나 굳건하고 순수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벨 준비도 마쳤습니다.”


“무엄하다! 감히..”


위양풍이 버럭 노성을 지르는 찰나, 파천마제의 기세가 위양풍을 찍어누른다. 위양풍의 낯빛이 시퍼렇게 질리고, 그는 다시 오체투지하며 사죄를 구했다.


“나약한 네놈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위양풍, 다시 한번 끼어들면 네놈은 죽는다.”


아마 그럴 마음을 먹는 순간 심검이 위양풍의 목줄기를 꿰뚫겠지. 위양풍이 몸을 떨며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파천마제가 다시 소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강자를 존중한다. 앞으로 이 세상은 오직 강자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될 것이다. 금전이나 명성. 외모며 신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 되겠지.”


“불가능합니다.”


소렌이 그렇게 단언하자 파천마제가 파안대소한다. 한참이나 미친 듯이 웃어대던 파천마제가 돌연 안색을 바꾸어 본래의 위엄을 되찾는다.


“가능하다. 나는 충분히 그럴 힘을 가졌고, 너 역시 내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잘 알 것이다. 그런 네게 나는 제안코자 한다.”


파천마제가 본신의 힘을 물씬 드러낸다. 위양풍이 다시 천세를 외쳤고 소렌이 남기고 간 향기가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흩어졌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공기를 가르고 파천마제가 말했다.


“내게 저항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목숨을 살려주지. 아니, 정진하여 나를 꺾는다면 내 자리를 넘겨주마. 너는 충분히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지, 지존이시여! 그것은....”


위양풍이 무심코 고개를 쳐들었다가 아차 하면서 다시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반면 소렌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 조금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화가 나 보였다.


“싫습니다.”


“이유가 있는가?”


“강자존이라 하였습니까? 그렇다면 그 힘은 무엇입니까?”


“그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


파천마제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저 뒤에 있던 언덕이 느닷없이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붕괴한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나라면 가능헀을까? 아니다. 일세지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빠르게 저런 짓을 할 자신은 없었다.


“이제 알겠는가?”


“모릅니다.”


“모른다?”


파천마제가 잠시 인상을 찌푸린다.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는다. 그리고 마치 칼날밭처럼 변한다. 소렌이 검을 더욱 굳세게 말아쥐었다. 그것을 보고 파천마제가 웃었다.


“그렇다면.... 직접 겪어보게 해 줘야지.”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함정카드 발동! 이 카드는 적의 공격력과 내 공격력을 바꾼다! 음, 예전에 주인공의 힘을 너프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거짓말은 아닙니다. 힘은 그대로지만 쓰는 사람이 바뀐 것 뿐이에요. 정확히는 힘만 넘어간 것도 아니고 몸까지 빼았겼으니 뭐....

이 말장난과 전개에 화가 나시는 분도 계시겠죠. 아니면 예상대로라고 좋아하시려나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주인공을 하향하지 않겠다는 건 말장난도 거짓말도 아닙니다. 진정한 성장이란 무엇일까? 이게 제 글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에 걸맞게 주인공은....(스포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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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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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3. 천의검문의 소문주 (4) +4 14.07.28 1,187 29 12쪽
140 3. 천의검문의 소문주 (3) +3 14.07.26 1,342 33 12쪽
139 3. 천의검문의 소문주 (2) +5 14.07.25 1,460 36 10쪽
138 3. 천의검문의 소문주 (1) +3 14.07.24 1,821 37 16쪽
137 2. 기연 (6) +8 14.07.23 1,718 36 11쪽
136 2. 기연 (5) +8 14.07.22 1,584 34 15쪽
135 2. 기연 (4) +5 14.07.21 1,511 42 12쪽
134 2. 기연 (3) +9 14.07.19 1,473 36 19쪽
133 2. 기연 (2) +6 14.07.18 1,572 38 13쪽
132 2. 기연 (1) +9 14.07.17 1,715 46 14쪽
131 1. 둔재지로(鈍才之路) (6) +11 14.07.16 1,682 38 13쪽
130 1. 둔재지로(鈍才之路) (5) +8 14.07.15 1,449 36 13쪽
129 1. 둔재지로(鈍才之路) (4) +9 14.07.14 1,447 34 10쪽
128 1. 둔재지로(鈍才之路) (3) +4 14.07.12 1,594 38 13쪽
127 1. 둔재지로(鈍才之路) (2) +6 14.07.11 1,586 40 10쪽
126 1. 둔재지로(鈍才之路) (1) +8 14.07.10 1,679 34 14쪽
125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10 14.07.05 1,843 34 23쪽
124 0. 호접지몽(胡蝶之夢) (1) +15 14.06.28 1,901 33 7쪽
12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2) +6 14.06.28 1,665 35 26쪽
»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1) +4 14.06.26 1,261 23 22쪽
121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0) +2 14.06.13 1,223 20 17쪽
120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9) +5 14.06.06 1,717 35 21쪽
119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8) +4 14.05.30 1,193 28 14쪽
118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7) +5 14.05.24 1,591 19 22쪽
117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6) +6 14.05.22 1,657 21 18쪽
116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4 14.05.19 1,570 24 20쪽
115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4) +6 14.05.09 1,381 32 12쪽
114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3) +4 14.05.04 1,505 26 11쪽
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51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6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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