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계 순수견양
정원의 조력으로 그의 주둔지에서 병사를 쉬게 한 선우명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들쑤시고 다녔다. 이렇게 들쑤시며 선우명이 찾는 것은 주부 직책의 관리였다.
주부는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라서 장계 또한 관리하게 된다. 물론 장계에 대한 최종 권한은 장계를 올리는 사람인 정원에게 있겠으나 보내고 작성하는 건 주부의 일이었다.
주부만 잘 구워삶으면 이 과정에서 후막의 공을 슬쩍 끼워 넣는 건 어렵지 않았다. 구워삶기 어렵긴 해도 요즘 시대라면 돈이면 해결됐다.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주부는 정원의 막사 바로 옆에 붙은 작은 천막에서 일한다는 걸 들었기에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얘기대로 천막 안에는 죽간에 글을 적는 삼십 대 초반의 관리가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주부 어르신 아닙니까?”
“그런데 넌 누구냐?”
“인사 올리겠습니다. 선우명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는 분하고 같이 참관하러 왔습니다.”
괜히 어린 말투를 쓰며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속 빼놓고 자길 소개한 선우명은 배실 거리며 웃었다.
고압적인 태두에 싸가지 없는 말투를 써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귀여운 외모의 소년이 바로 선우명이라서 웃으면서 말하면 대부분 호의적이게 된다. 그래서 주부 또한 호감 있는 말투로 말했다.
“어린 나이에 전투에 관심이 많나 보구나.”
“네, 그런데 뭐하시는 거에요?”
“일하는 중이란다.”
“어떤 일인데요?”
“네가 보면 아느냐?”
“몰라요.”
모르는 척을 하며 주부가 적는 것을 지켜봤다. 그것은 악필로 작성된 장계를 대필로 다시 작성하는 장계였다.
‘장계다!’
왕명으로 지방에 내려간 관리가 관하의 중요한 일을 주기적으로 왕에게 보고하는 것을 장계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황제가 지배하니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를 말한다. 그리고 이건 선우명이 찾던 것이었다.
죽간에 적을 수 있는 글자 수는 그리 많지 않아서 많은 내용이 적히지는 않았으나 어차피 장계에 올라가는 내용은 중요한 일뿐이라서 적을 건 애초에 많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후막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역시 없네.’
시기를 생각하면 당연히 후막에 대한 내용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선우명은 모르는 척을 하며 장계에 대해 물었다.
“이게 뭐예요?”
“장계라는 거다.”
“장계가 뭔데요.”
“황제 폐하에 보고하는 문서란다. 나중에 네가 관리가 되면 알 게 될 것이지. 다 됐다.”
말을 하면서 필사를 마무리한 주부는 선우며에게 말했다.
“더 물어볼 것은 없느냐?”
“있어요.”
할 것 없는 전장이라서 시간을 보내려는 주부는 선우명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없는 것도 만들면서 선우명이 끈덕지게 질문한 끝에 한계에 부딪힌 주부는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마.”
“다녀오세요.”
주부가 천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선우명은 죽간에 적은 먹이 말라서 말아놓은 두 장계 중에서 주부가 적은 장계를 펼치고서 주부의 필체를 흉내 내며 마지막 부분에 후막의 공을 줄여서 적어 넣었다.
“빨리 말라라.”
입김을 불며 먹이 마르길 기다린 선우명은 먹이 마르자마자 장계를 말아서 원래대로 해 놓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정원이 적은 악필로 된 장계는 불에 태울 것이고 주부가 적은 장계는 이르면 내일, 늦어도 며칠 안으로는 황궁으로 올라갈 것이라서 공을 인정받은 것하고 별반 차이가 없게 되었다.
후막에게 돌아갈 공적이 적긴 해도 장연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뒷일은 내가 알게 뭐냐.”
공을 줄여서 눈에 띄지 않게 하기는 했어도 막판에 끼워 넣은 글귀라서 문구가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게다가 훗날 정원이 이걸 알게 되면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정원이 장계에 후막의 공을 적어서 올리더라도 걸릴 정도로 문제가 많긴 했으나 어찌 됐든 공은 생겨났다. 그리고 문제가 생겨도 없는 공을 만든 것이 아니라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제 떠나야겠지.”
양주에 온 애초의 목적 중에서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렇게 일을 저질렀으니 이곳에 있어봤자 좋은 꼴 못 받기에 떠나야 했다.
천막을 나온 선우명은 주둔지 구석으로 갔는데 이곳은 정원이 선발대로 온 병사들이 머무를 수 있게 해준 곳이었다.
“모두 모여라.”
오늘 도착한데다가 시간이 늦어서 지금 당장 떠나지는 못해도 내일 새벽이 떠날 수 있게 준비는 해둬야 하기에 선우명은 병사들을 모았다.
무료하게 천막 안에서 쉬던 병사들은 일제히 밖으로 나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선우명은 병사에게 물었다.
“여포는 어디 갔느냐?”
“아는 사람을 만나서 잠깐 나갔습니다.”
“양주에 무슨 아는 사람이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여포가 없는 것이 불안했으나 애써 무시하며 선우명은 말했다.
“오늘 하루 쉬고 내일 새벽에 본대로 돌아간다. 각자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고 여포가 오면 바로 나한테 오라고 해라.”
“예.”
선우명은 자기도 쉬려고 병사들이 나왔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공을 세워 군관이 되겠다고 떠난 사냥꾼 동료인 형과 오랜만에 만난 여포는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이산 쪽이 소란스러워서 그쪽으로 몰려갔다.
황건적을 나타내는 黃이란 글자가 아니라 太라는 글자가 적힌 기를 손에 든 장수가 말을 타고 와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이었다.
말을 탄 장수이긴 해도 황건적을 토벌하러 온 부대에 스스로 나타났으니 당장에라도 체포해야 하겠으나 장수가 탄 말 근처에는 이미 병사 몇이 쓰러져 있었다.
이 장수의 이름은 파재로 좌중랑장 황보승을 몰아붙였다가 때마침 나타난 조조의 협공을 받아 후퇴했던 전적이 있긴 해도 광록대부 주준의 부대를 격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황건적 중에서도 장각 삼 형제를 제외하면 가장 공이 큰 남자였다.
정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인 파재는 수백 명의 눈길을 받으며 오연하게 외쳤다.
“양주자사는 아직도 멀었느냐! 설마 겁이 나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
이름난 무장은 아니어도 오랜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던 강직한 성품의 양주자사 정원이 이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날 찾는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
몰려든 병사를 헤치며 정원이 나타났다.
나이가 벌써 오십을 넘겨서 손자를 볼 나이여도 여전히 건장한 체구에 기세가 살아 있는 정원을 본 파재는 기를 땅에 찍어 고정하고는 품속에서 죽간을 꺼내서 펼쳤다.
“나 지공장군 장보는 혼탁한 세상을 깨끗이 하고자 했으나 요원지화라 막을 수 없으니 새로의 기치아래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태평천국을 바라는 마음에 나라를 태평국이라 짓고 대현량사 장각을 황천왕에 인공장군 장량을 인보왕에 추증하며 나 장보가 태조 성세왕이 되어 태평국을 다스리겠다.“
외부에 대한 건국 선언이었다.
“으하하!”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결국은 도적의 무리일 뿐이라서 그게 너무 우스운 정원은 크게 웃다가 말했다.
“우습구나! 너무도 우습구나! 엄연히 한이라는 제국이 있는데 그 안에 도적의 무리가 나라를 세웠다고 우기니 이보다 웃긴 얼이 어디 있다는 것이냐!”
정원의 비웃음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파재는 단검을 꺼내서 벼락같이 던졌다.
웃느라 정신이 팔린 정원은 미처 이걸 보지 못했고 그를 호위하려고 한 발 뒤에서 지켜보던 호위병사 또한 방심하느라 움직임이 늦어졌다. 그만큼 파재의 움직임이 빨랐단 얘기도 되겠으나 어찌 되었든 정원이 암살당할 위기에 놓였다.
이때 마침 정원의 뒤에서 구경하던 여포가 움직였다.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정원의 어깨를 잡고서 뒤로 당기며 손을 뻗어 단검을 붙잡았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파재는 뒤돌아볼 것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 말을 타고 이산을 향해 달려갔다.
넘어질 뻔하긴 했으나 주춤거리며 넘어지는 것만은 면한 정원은 도망치는 파재를 향해 외쳤다.
“당장 저 자를 추격해라!”
명령을 받은 병사 중에서 기병이 급하게 파재를 쫓아가는 사이 정원은 자기를 구한 여포를 바라봤다.
체격만 놓고 보면 여느 장수 못지않은 건장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앳된 모습이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 않아 보여서 정원은 큰마음 먹고 말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포라고 합니다.”
“자가 없는 걸 보니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모양이구나?”
“올해 열여섯입니다.”
“열여섯에 이만한 덩치라면 앞으로 더 커지겠구나.”
“잘 모르겠습니다.”
덩치가 크단 얘기는 힘이 좋다는 말이고 힘이 좋이 좋다는 말은 무장으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포상을 내릴 생각으로 말을 걸었던 정원은 여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다.
“장차 큰 인물이 되겠구나. 그래서 그런데 내 양자가 돼볼 생각은 없느냐?”
“하겠습니다.”
양주자사의 양아들이 된다는 건 권력을 향해 한 걸음이 아니라 권력자가 된단 뜻이기에 여포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
권력자의 집안에서 장래가 촉망한 아이나 청년을 양자를 들이는 일이 비교적 흔한 일이긴 해도 이 정도로 흔쾌히 승낙할 줄은 몰랐던 정원은 조금 당황하는 듯하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 막사가 어딘 줄 아느냐?”
“압니다.”
“알면 가서 정리할 것을 하고 나서 내 막사로 오너라.”
“예.”
여포는 자기 뒤를 봐줄 조력자를 얻었고, 정원은 자기 목숨을 구해줄 정도로 장래가 유망한 내 사람을 얻게 되었다.
내일부터 다시 고단한 여행을 해야 하는 선우명은 일찍 잠자리에 들려다가 여포가 찾아와서 잠들 수 없게 되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양주자사님의 양자가 됐다고 했다.”
신분은 여전히 선우명이 높으나 부모의 권력은 자식에게까지 이어지는 법이라서 양주자사의 권세를 등에 업었기에 사회적인 신분은 여포가 더 높았다.
“으@$%@#$!”
너무 열이 받아서 혀가 꼬이는 선우명은 이상한 소리를 지르다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양자가 됐으니 떠나시겠다?”
“지금 양주자사님에게 갈 생각이다.”
“와나~ 미치겠네.”
여포가 정원의 양자로 가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걸 막았다. 아니 막았다고 생각했었던 선우명은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더 더러운 것은 이젠 양자가 되는 걸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힘을 써서 일반병사보다 높은 호위병에 오를 수 있게 했으나 이건 정식 관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삼강의 으뜸인 군위신강을 들며 양아버지에게 가겠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관직을 주게 했어야 하는데!’
뒤늦게 후회해 봤자 유질이란 하급 관리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가기 전에 충고? 조언? 어찌 듣든지 상관은 없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라.
인과응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네가 한 일에 대해서는 꼭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뜻이다.
이제 가 봐라.”
할 말을 다했기에 더 해 줄 말도 없는 선우명은 여포를 막사 밖으로 내보내고서 한숨을 쉬었다.
그물이 촘촘하질 못해서 다 잡은 대어를 놓쳐버렸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한심할 뿐이었다.
- 작가의말
다음 주에 봐요~
덧. 여포 얻을 줄 알았다면 오산임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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