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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인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빈정거리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고, 아무렴 댁만큼 나를 질타할 사람이 또 있으려고? 특사라고 해봤자 헝가리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만 여기 있는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일텐데. 그리고, 나름 이번 방문의 목적이 단순한 사안이 아닌 만큼 정신없이 제국 군부와 행정부와의 교섭에 끌려다니다 가기 바쁠 것인데. 결국, 그런 식으로 혼을 빼는 사이, 제국과의 협상은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는 상황에서 제국 측 의사를 수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되려 편해졌다.
그래,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나 혼자 독박을 써서 마음 고생을 하느니, 본국의 특사를 통해 정식으로 논의되서 공식적인 일이 된다면 내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지. 그때부터는 모두의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면 더는 이 문제로 시녀장님에게 시달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특사의 방문이 기다려 지기까지 하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황궁과 군부에서는 지난번 미로크슈 조약에 이어, 제국과 헝가리의 관계 재정립을 하게 될 콘스탄틴노플 회담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바실은 이번 회담에 바실답지 않게 정성을 다해 챙기면서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바실이 집중적으로 챙긴 것은 방문할 특사에 대한 의전에 대한 부분인듯 보였다. 나는 왠지 그런 바실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딴 생각만 가득할 본국의 작태가 한심스러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양국의 의사결정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뭐. 대역으로 온 가짜 공녀는 욕이나 처먹을 테니 나머지 일들은 알아서 하라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사가 방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내가 생각치도 못한 뜻밖의 방법으로 나는 그 사실을 전달받았다.
“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특사가 콘스탄틴노플의 헝가리 대사관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예정에 없던 저를 만나러 황궁 알현실로 오셨다고요?”
“아, 네. 항상 공녀를 방문하던 그 유모와 같이 오셨더군요.”
연락을 전하러 온 것은 황궁 경비를 하던 바랑기안 근위대의 병사였다. 다소 갑작스러운 예정에 없던 알현 신청에 바랑기안 근위대에서 신원을 확인하고 알현실 출입을 허락한 다음, 다급하게 직접 전하러 온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헝가리의 특사가 왜 갑자기 나를 먼저 만나러 온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예정 중에 저녁 시간에 황궁의 환영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는 김에 먼저 들려본 건가? 아니다. 나는 그런 막연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했다.
헝가리에서 온 특사가 나에게 접촉을 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정에 따라 만나는 것이 정상이다. 사안이 상당히 중대 사안으로 협의될 이번 회담에서 특사가 기존에 예정된 동선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대체 왜?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알현실을 향해 달려갔다. 알현실에는 일단 헬레나 시녀장님이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당황하여 시녀장님에게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특사가 저를 먼저 보러 왔다고요?”
“문을··· 닫아라.”
시녀장님은 무겁게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태도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시녀장님이 두려운 표정을? 대체 왜? 나는 그 의문을 풀 틈도 없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알현실의 문을 닫았다. 그것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 알현실은 내궁에서 별개의 공간이 되었고, 이곳은 대사관에 준하는 헝가리의 치외법권의 지역으로 내궁에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방해할 수 없다. 그렇게 내가 문을 닫자, 시녀장님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뒤에 대기실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나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허억!!! 고··· 공작님?”
그가 거기 있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카밀라 공녀님의 아버지이자, 나와 시녀장님의 주인. 템즈 공작, 라즐로 아르파드가 헝가리의 특사로서 이곳을 방문하여 분노한 표정으로 알현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수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곳을 떠난 이후, 아마도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거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의 등장에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어쩌면 나는 가짜라고는 해도 제법 괜찮은 신분으로 지냈을지도 모른다. 거의 황실 가족에 준하는 자격으로 대우를 받고, 이 거대한 제국의 중대사에 관여할 자격까지 허락받았으니깐. 그래서 착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역할을 잘해낸다고 해도, 나의 근본은 공녀가 아닌 하녀이고, 나의 신변에 목줄을 쥔 주인은 저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 전까지 내가 황제에게도 면박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벌거벗겨진 기분으로 나는 아무것도 없는 천한 하녀가 되어 그의 앞에 내동댕이 쳐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기분만이 아닌 현실 속에서도 사실로 이루어졌다.
“끓어라. 감히, 어딜 마주보고 있느냐?”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시녀장님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님은 오만한 모습으로 분노한 표정으로 그대로 서서 우리 둘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해서 공작님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주로 시녀장님이었다. 그녀는, 본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 그로 인해 당황하여 자신이 직접 특사로 오게 된 우리의 주인에게 이 상황을 최대한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내 탓이라는 식으로 변명했다.
공작님의 분노와 그에 대한 시녀장님의 변명이 몇마디 오가는 동안 나는 그것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방금 전까지 나에게 일상이었던 것이 어느새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실감하며 얼어붙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침묵은 왠지 모르게 그것을 보던 공작님의 분노에 더 부채질을 한 모양이었다. 공작님이 말씀하셨다.
“아그네, 네가 나를 참으로 실망시키는 구나.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느냐? 입이 있으면 대답해 보아라.”
“저··· 저는···”
“답답하니깐 더듬지 말고 대답해!!!”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억지로 나오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더니, 공작님의 어이없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최선? 지금 최선이라고 말했느냐? 하!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런 말이 나와? 최선이라고? 네 까짓게 대체 무엇이길래? 감히 네가 최선을 논해. 지금, 이곳에서 분에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와 대우를 받고 지내니, 네가 무슨 진짜 내 딸이라도 된 양 착각한 것이냐? 너는 고작 하녀에 불과해. 아무 곳이나 굴러다니고 그 천한 목숨 귀족들에게 빌붙어 연명하려는 자들. 그런 하녀에 불과하다고. 그런 네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싶다면, 너를 이곳에 보낸 우리의 의사를 받들어 카밀라 대신에 희생했었어야지. 호의호식하며 이런 조국을 팔아먹는 짓거리를 저지른 천한 것 주제에 최선?”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고. 묘하게도, 지금 나는 율리아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니? 아니, 넌 그보다 더 심했겠구나. 나는 원래 있던 곳에 돌아가는 것이지만, 너는 정말로 경험한 적도 없는 구덩이에 떨어졌으니깐. 나는, 어쩌면 나에게 당연한, 세상에 모든 하녀들이 받을 그런 처우에 얼마나 오랫동안 멀어져 있었던 것인지 실감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곳으로 돌아간 나는 마음이 너무나 공허했다.
희생··· 했어야 한다고? 그래, 그렇긴 하지. 내가 여기서 미친 황제와 혈태자의 노리개로 죽었다면 본국에서는 최고의 결과였겠지. 그러지 않고 살아있었기에··· 그들이 나를 노리개로 가지고 놀지 않고,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었기에 이런 최악의 결과가 도래한 것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 속에서 묘한 불길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반항심 같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 앞에 쥐처럼 그에게 저항할 용기가 없다. 그것은 그저,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해내지 못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마저도 그에게는 불쾌하게 느껴질지도 몰라,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 말을 하고 싶어졌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만났던 어처구니 없는 황실 가족들의 한심함을 닮아버린 걸까? 나는 그래서 평소라면 입도 뻥긋하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바라신다면,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죽을까요?”
“······!!!!!!”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시녀장님의 입이 딱 벌어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공작님이 입을 다무셨다. 그리고, 격노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발끝까지 전해져 오는 떨림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흐르고, 그의 경련이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격노한 상태로 그가 말했다.
“일어서라.”
그의 말에 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고개를 들어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커헉!!!!” ‘퍼어어어어어억!!!’’
눈에 불꽃이 튀는 것을 느꼈다. 공작님은 고개를 든 나에게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날려 내 면상을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 일격에 나는 그대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제대로 된 일격이었다. 입안에서 피맛이 느껴지고 눈앞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폭력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뒹굴어진 나의 배에 그의 발길질이 연이어 날아들어왔다.
“크헉!!!”
“이··· 이, 감히 버르장머리 없는 것이. 뭐가 어쩌고 어째?”
그리고 그 공격에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차라리 육체적 고통은 견딜만 했다. 그보다 아픈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의 발길질에서 담긴, 고귀한 자의 천한 자에 대한 당연한 태도가 나를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한방, 한방··· 배에 날아오는 그의 발길질이 하나하나가 다 나 자신에게 너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천한 하녀라고 못박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해의 시간 속에서,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게 나의 본 모습이겠지. 그 동안 잠시 망각했던··· 아니, 억지로 외면했던 하녀 아그네가 바로 거기 있었다.
카밀라 공녀님은 그래서는 안되지. 하지만 하녀 아그네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하녀잖아. 대신 죽는 것이 가장 값어치 있는 흔한 하녀. 그러니··· 그가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주제를 망각한 하녀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반비례로 의식이 희미해질 무렵에 갑자기 가해지던 폭력이 중단되었다. 뭐지? 그때 공작님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젠장할··· 저 여자는 또 뭐야? 헬레나! 이곳 알현실에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근데 여기 자기 맘대로 들어온 저 여자는 대체 뭐야? 얼굴은 반반하지만, 옷차림은 수수한 것이 아마도 황궁 하녀인 모양인데, 지금 당장 나가지 못해? 여기서 벌어지는 일 신경쓰지 말고 나가!!!”
어? 뭐라고?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알현실에 들어왔다고? 그럴리가 없는데? 내궁에서 알현실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방의 주인인 나와 그 외에는 단 한 사람 밖에 없는데··· 나는, 고통스러운 배의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들고 문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식겁했다.
“히이이이이익!!! 화··· 황후 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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