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3
“뭐, 뭐라고?”
“복잡한 일은 너무 신경쓰지 말고, 그대는 그대에게 가장 유리한 것만 선택하세요. 그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랍니다.
제가 보장하죠. 지금은, 불안감을 안고 제국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이용해서 슬로슈를 잡는 것이 최선입니다.
당신도 이미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말해주세요.
내가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그대를 망설이게 하나요?
무엇이 그대로 하여금, 당신도 원치 않는 무리수를 두게 하나요? 말해주세요. 내가 당신의 흑기사가 되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뺨에 올린 내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들고 있던 와인을 들이키고 말했다.
“마음에 안들어.”
“네? 제가요?”
“아니. 당신 말고. 그 망할 여자가 마음에 안들어. 카밀라 아르파드. 아니, 사실은 카밀라도 아닌··· 아! 이건 못들은 걸로 해.
아무튼, 그 망할 여자가 마음에 안들어.”
“네? 제가요?”
“당신 아니라고 방금 말했잖아!”
그게 제가 아닌게 아니라 저라서요. 뭔 소리야? 나는, 왠지 모를 마고 공주의 나에 대한 격한 반감에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입에서 나에 대한 험담이 쏟아져 나왔다.
“제국에 인질로 다녀온 주제에, 되려 제국을 등에 업고 돌아와서 고개를 빳빳히 든 그 꼴을 못봐주겠어.
그래서, 손을 단단히 봐주려고 해도, 도무지 알아 처먹지도 못하고 심각한 상황은 다 피해가고. 그러면서 반격은 제대로 날리고.
그 하찮은 것이 시건방을 떠는 꼴은 도저히 못봐주겠어. 마음에 안든다고.”
겨우, 그런 이유로? 순간 울컥할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고, 그러는 사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왕실의 입장에서는 슬로슈나 그 계집이나 증오스럽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말에 순종한다고 하지만, 뒤로는 우리를 비웃으며 제국에 편에 선 그 망할 계집을 어떻게 믿고 제국에 구원을 청하란 말이냐.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존심을 지키고 장렬히 산화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우리 아르파드의 긍지다.”
그 망할 계집도 일단은 아르파드인뎁쇼. 역시나 그것도 말로 나오진 않고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본 마고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살짝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혹시, 이런 내 의견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는 쪽인가? 아니, 그보다는 혹시 그 망할 계집과 무슨 인연이 있는 거냐?
그러고 보니, 그대도 제국의 공적이라면 좋든 싫던 제국 측 인사들과 접점이 있었을텐데, 그 여자와도 무슨 접점이 있었던 건가?
응? 그러고 보니 왠지 이름도 비슷한···”
울컥했지만 일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은··· 해야 할 일만 생각하자.
보아하니, 내가 되게 마음이 안드시는 모양인데, 여기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구워 삶으려면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줘야 하겠지?
그래서, 나는 고심 끝에 지독한 자기혐오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고 공주님. 이 세상에 모든 레이디들을 다 경애하는 이 몹쓸 놈이, 유일하게 극혐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가 지금 언급한 바로 그 여자, 황제의 챔피언입니다.”
“저, 정말이냐?”
“제가 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 역시도 공주님 만큼이나 그 망할 계집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습니다.
자고로, 레이디라 하면 그 아름다움과 기품으로 세상에 남자들에게 고고하게 군림하여야 마땅하거늘,
인질로 붙잡혀 온 주제에 스스로를 다듬고 자숙하지는 못할 망정, 여기저기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고, 군부와 황실에 꼬리치는 모습이 정말 혐오스럽더군요.”
“그, 그렇지? 그래 그대는 좀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군.
그 선머슴같이 생긴 꼬락서니로 대체 어떻게 황제를 꼬셨는지 몰라도, 그 위세를 믿고 함부로 구는 것이 가증스럽기 그지 없지.”
“네, 맞습니다. 제국에서도 유명했었죠. 여기저기 손대고 다니면서 사고만 치고 다니는 것에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 도저히 왕실의 핏줄이자, 명가의 영애로 볼 수 없는 한심한 작태야. 뭐, 신분이 그렇긴 하지··· 음, 아니야.
아무튼, 그런 한심한 면상에 기품도 없고, 수해 현장에서도 빗속에서 굴러다니는 그런 계집을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그래서, 이번 일로 인해 그 망할 계집이 다시 한번 제국의 등을 업고 으스대는 꼴을 볼 수 없다는 거야.
그대라면, 이런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응? 근데, 왜 되게 침울한 표정이야?”
한심한 면상에, 선머슴 같은 꼬라지고, 기품도 없고, 함부로 구는 제 자신이 혐오스러워서요.
어흑, 울컥하고 싶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디스에 정신이 어질해진다. 정말이지 내 정체성에 혼란이 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했던 바는 달성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조금 움찔거리는 모습으로 나를 보던 마고 공주를 보며 기합을 넣고 말했다.
“고견이십니다. 그리고 그대를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더 제안하고 싶은 겁니다. 제국을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그 가증스러운 계집을 증오스러운 슬로슈와 상대하게 하십시오. 그것으로 당신이 처한 고민은 동시에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성동맹을 무리하게 개입시켜서, 그 가증스러운 여자가 당신에게 고개를 빳빳히 들고 오게 하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내가 제안한 내역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그 계집을 이용하라고?”
“네, 맞습니다.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다 맡겨 버리십시오. 제국과 신성동맹 같은 것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것으로 마이 프린세스께서는 더이상 고민할 것이 없을 겁니다. 어떠십니까? 당신을 위해 드리는 저의 애정을 담은 의견이.”
“풋!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여자들에게도 다 애정을 담아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것 아닌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특별하다는 것도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겨우 한번 만났지만, 이렇게 다시 마이 프린세스를 도우러 온걸 보면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나의 말에, 마고는 조금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이며 나에게 말했다.
“그런가? 뭐, 바람둥이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의 조언은 감사히 받도록 하지.
대가로 뭘 바라지? 바라는 것을 말해라. 혹시 지난번에 말한 그건가?”
지난번에 말한 거? 그게 뭐··· 아! 생각났다.
‘전원 무기를 바닥에 내려놔. 그리고 뒤로 30걸음. 즉시! 안그러면 아르파드의 백합의 순결은 내가 보장할 수 없어.’
갑자기 내 입을 때리고 싶어지네. 어디까지 몰입한 거냐? 이 망할 나년아? 어이, 마고 공주님. 은근히 기대하는 표정하지 마세요.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피식 웃으며 옆에 놓인 화병을 보며 말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여기 아르파드의 백합을 대가로 가져가도록 하죠. 응? 왜 얼굴이 상기되신 거죠? 혹시 뭔가 기대하셨나요?
저런, 그렇다면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이 몸이 방탕하지만, 그래도 몸보단 마음을 뺐는 방탕아라서 말이죠. 서운하셔도 용서하시길.”
“당장 꺼져!!! 그 꽃을 들고 사라져 버리라고!”
“하하핫!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
“다신 오지마!!! 특히 저녁에 목욕할때는!!!”
나는 뭔가 괴상한 자괴감과 복잡한 성취감을 느끼며, 애써 과장되게 웃으며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마고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테라스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다음날, 대사관에서 머물고 있던 나에게 어전으로 들어오라는 통보가 왔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래, 어제 밤에 찾아가서 마음에도 없는 괴상한 짓을 벌인 효과가 나오는구나.
나는 마음 속으로 설득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에 안도하며 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간 어전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국왕과 마고 공주, 그리고 라즐로 공작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분위기는 살벌했다. 어제 속내를 말한대로 마고는 나에 대해서 경멸어린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애써 주시하지 않으려 애쓰며 어전에서 전할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국왕이 말했다.
“신성동맹 측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기존의 의견은, 측근들과 오랜 상의 끝에 철회하기로 결정하였다.”
“아, 그렇습니까? 지금이라도 의견을 철회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원래 콘스탄틴노플 협정대로 제국 측에 연락해서 이번 슬로슈의 반란에 대한 군사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중대한 결단을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행이다. 이제 제국군만 소환할 수 있으면 이 돌발 상황도 신속하게 종식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이상하게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왕의 말이 이어졌던 것이다.
“아니, 제국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네, 제국에도 도움을··· 응?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국에도 지원 요청을 하지 않는다고요?”
그 말에 앞으로 나선 것은, 당연스럽게도 마고 공주였다. 그녀가 소리쳤다.
“이번 슬로슈의 봉기는 엄연히 말해, 우리 헝가리의 내부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그 내전에 대해서 신성동맹의 도움을 받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마찬가지로 제국의 도움을 받는 것도 여의치 않다.
결국, 어느 쪽이든 우리 내부의 일에 외부의 힘을 빌려 해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그 말이 타당하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재 슬로슈는 자기 휘하의 슬로바키아군과 제후들의 병력을 합쳐서, 헝가리 전역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초전에 주력이 되어야 할 근위대가 포위 섬멸되어 절반이 날아갔고요.
말씀하신 대로, 이 상황은 내전이고, 그래서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 달갑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저들을 진압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부르지 않으신다면, 대체 밀려오는 저들을 어떻게 막으시고, 어떻게 진압하시려고 하십니까?”
나의 말에, 마고 공주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걸 왜 내가 걱정해야 하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건, 그걸 실제로 해야 할 사람이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렇지 않은가? 헝가리 군사 재건 위원회 위원장?”
응?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미처 사고가 제대로 돌아기도 전에 마고의 말은 이어졌다.
“아니, 그보다는 이렇게 불러주도록 하지. 진압군 최고 사령관. 그것은 바로 네가 걱정해야 할 일이다.”
나는 순간, 멍해진 머리를 진정시키고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마고 공주가 뭐라는 거야?
지금, 나보고 이 반란을 진압하라는 거야? 바로 얼마전까지 병력으로 쳐주지도 않고, 훈련을 빙자해서 두들겨 패던 그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나는 순간, 부다페스트에 오면서 율리아가 해줬던 이야기 중에서, 마지막 세번째를 떠올렸다.
“세번째는 진압이다. 그것도 그 어떤 외세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말이다.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이번 반란은 이미 시작하면서부터 지고 시작한 내전이다. 주력이 절반이 날아간 상태라고. 그리고 남은 절반도 지압에 내놓을 턱이 없지.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여기 오합지졸들 뿐인데··· 너희 왕실도 좀 불안하겠지만. 너는 확실히 망하는 상황이다. 제발 이것만은 피해라.”
근데, 끔찍하게도 그 세번째로 마음을 굳혔다. 대체, 왜? 순간 나는 어제 내가 지껄였던 개소리를 상기했다.
‘제국을 이용하십시오. 그리고 그 가증스러운 계집을 증오스러운 슬로슈와 상대하게 하십시오.’
여기서, 나는 제국을 이용하라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말했다.
그런데 왠지 마고는 그보다는 나랑 라즐로를 붙여서 공멸시키라는 것에 더 매력을 느낀 모양이다.
아아악!!!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건 미친 짓이라고요.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이 무지렁이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삼돌이 마티를 사령관으로 삼아서, 그 무시무시한 슬로슈를 잡으라고요?
그것도, 제국의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말고 말입니까? 순간, 나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다시 한번 전황을 복기하였다. 우리 헝가리를 구성하는 4개의 무력, 근위대, 상비군, 영주 사병, 슬로바키아군.
원래는 3개가 1개를 상대한다고 생각했었고, 바로 최근까지 4개가 다 왕실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중에 하나는 반이 날아갔다.
그리고 또 하나와 다른 하나가 손을 잡고 적으로 돌아섰다. 그래서 남은 우리 상비군과 근위대 절반.
지금 왕실은 그 반푼어치 상비군 1개에게 2개의 적을 상대하고 진압하라고 말하고 있다.
헐? 신에게는 아직 1군단의 상비군이 남아있습니다··· 는 개뿔!!!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나 되야 가능한 수준이잖아!!!
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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