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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P9
작품등록일 :
2019.07.20 17:03
최근연재일 :
2019.10.01 17:00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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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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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2화

DUMMY

“오! 이번에도 살아서 돌아왔군!”


검투사들에게 대전료를 지급하던 자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토레스.

지저분한 수염과 굵직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콜로세움에 검투사로 등록하면 제일 많이 마주치는 자였다.

한때는 콜로세움의 검투사로 밥을 빌어먹고 살았다고 했던가.


“작은 거인을 이기다니. 난 당신이 이길 줄 알았다고.”


토레스는 유난히 부산을 떨었다.

그는 처음 라이언을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요즘 콜로세움에서 라이언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의 손도끼에 목을 잃은 검투사가 한 둘이 아니었다.

자그마치 열 명.

그 중에는 유명 인사가 될 자질이 엿보이는 검투사들도 있었다.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던 파울도 여기에 속했다.


“사람들이 자네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아나? 자이언트 킬러일세!”

“자이언트 킬러?”


라이언이 되물었다.


“파울을 이기고 붙은 이명이라네. 이것으로 자네도 이명을 얻게 되었군.”


라이언이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런 놈 하나 이겼다고 이명이 생기다니.

피 튀기는 혈투를 원했는데 놈은 약골이었다.


“여기 대전료일세.”


승리를 거머쥔 라이언은 대전료를 지급받았다.

금화 한 닢.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던 파울의 목을 친 값이었다.

물론, 라이언은 자신이 상대한 검투사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 이름으로 시합이나 많이 잡아 두시오.”

“하하, 물론이지. 콜로세움에서 이런 유망주를 놓칠 수야 있나. 걱정 말게.”

“이왕이면 강한 놈들과 붙었으면 좋겠군.”

“두말하면 잔소리지.”


토레스가 웃었다.

콜로세움 입장에서는 이런 무모한 검투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관중들은 자기 몸을 신경 쓰지 않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검투사를 더욱 선호하는 법이니까.


‘흠. 누구를 상대로 잡아 두지? 이 녀석? 아니면 저 녀석? 에라, 모르겠다. 다 신청해두지, 뭐.’


토레스는 즐거운 고민을 이어갔다.


**


라이언은 술집에 들어섰다.

술집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극진히 대했다.


“뭘로 드릴까요?”

“어제 먹던 걸로.”


술집 주인은 입가를 실룩거리며 재빠르게 상을 차렸다.

라이언이 올려주는 매출이 상당한 탓이었다.

이런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지.

테이블 위로 고기와 술들이 잔뜩 올라갔다.


라이언은 노릇노릇하게 구윤 커다란 고기를 통째로 씹었다.

코끝을 찌르는 기름 냄새가 식욕을 돋았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부드러운 식감을 음미하며 술잔을 들었다.

빈 잔이 테이블에 떨어졌다.


‘형제들과 같이 마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라이언은 바이킹 형제들을 떠올렸다.

술잔을 부딪히며 노래를 불렀다.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는 광경은 익숙하다 못해 정겨웠다.

주변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목소리가 옛 추억의 향기를 자극했다.

그는 그것들을 친구 삼아 홀로 술잔을 들이켰다.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나? 남정네 혼자 술집에 앉아서 왜 궁상을 떨까?”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라이언은 추억에서 깨어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자를 바라봤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술 때문에 풀어졌다고는 해도 주위를 경계하는 건 잊지 않았다.

방심하다 골로 간 이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기척을 속이고 나타난 놈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누구냐.”


라이언은 슬그머니 손을 내려 허리춤에 걸린 손도끼를 잡았다.

여차하면 휘두를 작정이었다.

상대는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후드에 음영이 져서 입술밖에 보이지 않았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다가 입꼬리를 내렸다.


“벌써 내 목소리를 잊어버린 거야? 그럼 실망인데.”


라이언은 어디서 들어본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놈이 후드를 걷어 내렸다.


“달링. 그동안 나 보고 싶지 않았어?”

“···오랜만이군, 마녀.”

“비비앙이라고 불려주면 더 기쁠 것 같은데 말이지.”


비비앙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비비앙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들이 시선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그런 시선들을 무시하고 탁한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빛을 냈다.


‘이상하네.’


비비앙은 당황했다.

그저 라이언의 기억을 읽으려고 했을 뿐인데 마법이 차단되었다.

벽에 가로막힌 듯 마법이 튕겨져 나갔다.

그녀와 헤어지고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 했는데.

꺼림칙한 기분에 라이언이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탁-


그는 테이블 위로 손도끼를 올려놓았다.

비비앙이 앙증맞게 혀를 빼물고 뒤로 물러났다.


“그냥 인사 같은 거야, 인사.”

“인사는 개뿔.”


라이언은 코웃음을 쳤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비비앙은 화제를 돌렸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달링?”

“뭐, 이것저것.”

“그러니까 그 이것저것이 뭔데?”


비비앙이 가르쳐 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얼굴을 붉혔다.

라이언이 질색한 얼굴로 물었다.


“술 마셨나?”

“흥.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고 말하지 그래?”


그녀는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팩하고 돌렸다.

기억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이를 알리 없는 라이언은 ‘역시 술에 취했군.’이라고 생각했다.


“별 거 없다. 히드라를 잡은 거랑, 노예···”

“잠깐, 달링.”


비비앙이 손을 휘저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라이언은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을 확인했다.

푸른빛은 주위를 둘러싸더니 얇은 장막을 만들었다.

그러자 떠들썩하던 주변이 삽시간에 침묵으로 잠기었다.

마녀가 요술을 부렸군.

라이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히드라를 잡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죽을 뻔하긴 했지만.”

“진짜로?”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앙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달링, 정말로 인간 맞지?”

“그 질문도 몇 번째 들어보는지 못하겠군.”

“달링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하아.”


록키 숲에서 히드라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비앙은 히드라를 노리고 있었다.

히드라를 죽여 시체로 부릴 수만 있다면 그녀의 전력은 배가 된다.


‘근처에서 용사를 목격했다는 제보만 없었다면 잡았을 텐데 말이지.’


용사와 전면으로 맞붙는 건 위험했다.

심지어 옆에는 성녀까지 붙어있었다.

성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성녀.

시체를 조종하는 비비앙.

성녀와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성녀의 성력에 시체가 정화되면 그녀가 자랑하는 시체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히드라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히드라의 명복을 짧게 빌어줬다.

용사와 성녀에게 걸려 살아남은 녀석은 못 봤으니까.

그런데 히드라를 잡은 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히드라는 그녀도 애먹는 상대였다.

잡으라면 잡을 수는 있겠지만 불사의 신체는 상당히 까다로운 특성이었다.

특히 인간이 상대할 수 상대가 아니었다.

라이언은 간략하게 놈과의 혈투를 이야기했다.

비비앙은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하. 정말 간단한 공략법이네. 녀석에게 그런 약점이 있었다니. 당신을 그걸 어떻게 안 거야?”

“동화책에 나와있더군.”

“···그냥 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달링.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농담도 할 줄 알잖아?”

“믿든지 말든지.”


미심쩍은 눈동자는 사라지지 않자 라이언은 대충 얼버무렸다.

조금 억울했다.

진실을 말해도 의심받는 상황이라니.


“아쉽네. 내가 노리던 게 바로 그년이었거든.”

“유감이군.”

“그러게 말이야.”


비비앙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시 손을 휘젓자 얇은 장막이 모습을 감추었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어머? 내가 좋아하는 술도 있네? 이거 내가 마셔도 돼?”

“돈이 있다면.”

“피이.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서로 몸을 탐했던 사이지.”


비비앙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하얀 목덜미를 가리켰다.


“당신은 내 목을.”


다음으로 라이언의 가슴팍을 콕 하고 건드렸다.


“나는 당신의 몸을 말이지.”


그녀는 손가락끼리 깍지를 껴서 그 위에 머리를 얹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라이언은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알싸한 알코올 향기가 혀끝을 마비시켰다.


“근데 여기는 무슨 볼 일이지.”

“달링의 얼굴을 보러 왔지.”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여자의 비밀을 꼬치꼬치 물어보는 남자는 인기가 없는 법이야. 달링.”


비비앙이 대답해 줄 기미를 안 보이자 라이언은 신경을 꺼버렸다.

말려드는 순간, 피곤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는 마녀의 눈을 통해 강해진 라이언의 영혼을 살폈다.

영혼의 색이 성숙하게 변했다.

드워프 마을에서 헤어졌을 때 보다 더.

홀로 히드라를 잡았기 때문일까?

영혼은 꺼질 생각을 하지 않고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듯이 휘황찬란하게 불타올랐다.

강인한 의지가 느껴졌다.

손을 가까이 대면 자신의 영혼까지도 집어삼킬 것 같았다.

비비앙은 한층 성장한 영혼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얼마나 더 강해질까?’


인간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기는 그녀도 처음이었다.


‘아아, 가지고 싶어라.’


달콤한 과실을 앞에 두고, 먹을 수가 없다니.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래, 때가 아니다.

과실이 무르익으려면 아직 멀었다.


‘그걸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비비앙은 비틀려진 욕망을 애써 숨겼다.


“이봐, 아가씨. 얘기 좀 하지?”

‘뭐야?’


비비앙은 불청객의 난입에 눈살을 찌푸렸다.

영혼을 구경하고 있는데 방해를 받은 탓이었다.

라이언이 놈들을 살폈다.


‘검투사군.’


우람한 근육과 다부진 육체.

상체 사이로 오랜 세월이 지난 흉터들이 엿보인다.

손에는 굳은살들이 가득하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었다.

비비앙이 물었다.


“어머? 나 말이야?”


그녀가 살짝 눈웃음을 치자 사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 내 이름은 쿠크다스요.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저런 놈은 아깝지. 어때? 저놈보다 내가 더 뜨거운 밤을 선사해 줄 수 있는데.”


그는 비비앙의 몸매를 기분 나쁘게 훑었다.

눈동자에 탐욕이 가득했다.


“나는 강한 남자가 좋은데.”

“크하하! 그렇다면 나를 지칭하는 말이군.”

“어머? 당신이?”

“그렇소. 내가 콜로세움에서 한가락 하는 사람이거든!”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비비앙이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며 라이언에게 달라붙었다.


“떨어져라.”

“히잉. 너무해. 달링은 내가 싫은 거야?”

“그걸 말해야 아나?”


그들의 애정행각에 쿠크다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저놈보다 못하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보여주면 된다.

쿠크다스가 몸을 움직였다.

드리우는 그림자에 라이언이 앉은 채로 고개를 올렸다.


“무슨 볼 일이오?”


쿠크다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라이언이 마시고 있던 술잔을 뺐었다.


콸콸콸-


라이언의 머리 위로 노란색 액체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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