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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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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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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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인들 [사명..사제 9]얽힘

DUMMY

‘우둔한 놈, 민간인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다니.’


아스라이 꺼져가는 생기의 크기와 속도, 방향을 비롯한 동선 위 투박한 흔적들이 알려주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불청객을 발견하고 억지로 흐름을 꺾었다가 뒤틀리면서 몸의 통제력을 상실한 채 날아가 부딪혔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는데..


‘아니지, 이런 속도로 충돌했다면 둘 다 움직이지는 못했을 테고.. 가까스로 피하기는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여파가 남아서 저런 상태가.. 젠장, 생기가 거의 느껴지질 않아. 앞으로 길어야.. 아니, 내가 구해낸다. 어떻게든 되살릴 테니까 끈만 놓치지 말거라.’


광극은 저기 어둠 속 곧 꺼질 불꽃을 향해서 미친듯 내달렸다. 하늘에 닿았다가 추락한 사지육신이 원망하듯 고통을 호소했지만, 흐릿한 달빛 아래 비틀비틀 걷는 사람이 눈에 들어올 때까지 그는 단 한순간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이놈, 그게 무슨 꼴이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 위로 애처롭게 늘어진 육신이 눈에 들어오자 말 못할 울분이 치솟아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려고 할 때,


‘이게 무슨!’


놀라 숨까지 멈춘 광극은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처럼 멈췄다가 근처 수풀로 빨려 들어가듯 몸을 감췄다. 그리곤 다급히 술식을 짚어 은신의 술을 발현한 뒤에 흐트러진 호흡을 조절하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기감을 확장했다.


‘하필이면..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괴물이?’ 그의 감각이 슬그머니 닿아 맴도는 대지 위에 시꺼먼 어둠을 머금은 자가 소리 없이 내려와 발을 디딘다.


인간과 포식자를 포함한 모든 생명, 심지어 죽은 시체도 품는 것이 기라는 것일 진데 광극은 눈앞의 존재로부터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사기[死氣]조차 감지되지 않다니. 움직임을 봐서는 포식자가 분명한데..’


지난 수십 년간 놈들과 싸워왔다. 심지어 일곱 가주 중 왕좌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탄의 손아귀에서도 살아나온 경험이 있건만, 눈앞의 존재는 뭔가 달랐다.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인간도..’


그답지 않게 딱 끊어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기가 없다는 문제가 아니라, 짐승에 맞서 불타올라야 할 엽인의 혼이.. 평생을 연마해온 동물적 감각이 저 시꺼먼 존재와 감히 마주하지 말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마옥의 수감자들조차 숨 쉬지 말라며 아우성을 쳐대니..


‘짐승을 보면 미쳐 발광을 해야 할 놈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숨 막히는 위기감에 질려 온몸에 소름이 돋자 광극은 검을 든 후 처음으로 뒤돌아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꼈다.


‘젠장, 마안만 있었어도.’


마안은 포식자의 압도적 존재감이나 각종 정신공격으로부터 완벽한 보호막을 제공해줬다. 아니, 보호라기 보다는 한 명의 사냥꾼이었던 무적자의 의지를 잇는 순간, 사냥감 따위에게 휘둘릴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그를 사탄 앞에서도 당당하게 했던 힘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서 그런지 상대의 존재감이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졌다.


‘부딪히면 죽는다.’


술을 완성한 날 이후 처음으로 도주를 고민해야만 했지만, 이제 곧 꺼질 불씨들 때문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잃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도 뼈아픈 일이겠지만, 혹여 마안이 저 기괴한 존재에게 넘어간다면 무슨 평지풍파가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어쩐다, 이런 상태로 나선다고 해도..’


급한 마음에 몸의 일부나 다름없는 흑검마저 가져오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 되어 그를 괴롭힐 때 문득 애달픈 믿음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어쩌면 포식자가 아닐지도 몰라.’


여태껏 봐온 모든 생명체와 궤를 달리하는 저 어둠이 짐승이 아니라 선을 넘어 어떤 신비에 도달한 인간의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래, 저놈 때문에 관악을 이 잡듯 살폈지만, 짐승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어. 마안이 숨겨준 게 아니라면 이 산에 짐승은 없다. 그러니까.. 젠장, 빌어먹을!’


그답지 않은 망상 속 애달픈 자위라도 해보려던 광극은 자신의 모든 감각이 저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곤 이를 악물었다.


‘놈은 포식자다. 그렇다면..’


만약 상대가 다섯 번째라면 케이스에 남은 주사기 두 개로 한바탕 승부수를 띄워 볼 수도 있었다. 몸이 망가진 상태라지만, 그는 동방최강이라 불리는 엽인이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는 아니야. 그렇다면 네 번째..?’


놈들은 극소수에 워낙 보기가 어렵고 형태나 존재감도 제각각이라 분별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미친놈들이라면 뜬금없이 이 시간에 나타나는 것도 가능은 해. 시대 이전의 야수라면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말이 되고. 한데 만일 그렇다면.. 저 둘과 나는 오늘 야식이 된다는 말인데..’


최선의 상태에 최고의 무장을 하고 함정까지 준비한 뒤에 맞서야 잘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막내가 장장 500년을 살아온 괴물인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부르트강.'


막 칩거에 들었을 때 찾아와서 한판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야수를 떠올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광극은 호주머니에서 꺼낸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하나 뚜껑을 열지는 않았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다시 한 번 더 고민할 때, 생사의 경계에 선 노인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을 향해서 악착같이 한 걸음 더 걸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머리가 희끗해진 이후로 언제 이렇게 땀을 흘려 봤을까?


순간순간 의식이 희미해지고 사우나에 오래 앉아 있었던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왔다. 어떻게든 한 발 더 나아가려 억지로 발을 들면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는 다리가 휘청이며 허벅지가 끊어지 것만 같았다. 늘 걷던 한 걸음일진대 어찌 이리도 힘겹다는 말인가? 노인은 천근만근이라는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며 가까스로 호흡을 뱉었다.


‘그래도, 그래도 가야지. 이게 뭐라고, 더 힘든 날도 있었는데, 이딴 게 다 뭐라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허리와 어깨를 칼로 저미는 듯하던 통증이 불현듯 없어져서 한결 편안해졌다는 거다. 한데 과연 그게 고무적인 일일까? 아니면 죽음에의 신호일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한 걸음만 더.’


거칠게 내뱉은 숨결에 피비린내가 섞여들 때부터 송영감은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혈향에 섞인 쉰내와 목이 타는 듯한 고통마저도 사라질 때가 아마도 최후의 순간이겠지. 그래서 그저..


‘한 걸음만 더.’


당장 쓰러져 죽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건만, 비틀비틀 계속 발길을 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약수터까지만이라도 가자. 나는 가더라도 내.. 아들은 살려야지.’


이미 의식이 흐릿해져서 그런지 그는 등 뒤의 젊음을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지만 이 끔찍한 고통을 견딜 수 있었기에 그는 그리 여겼다. 순간순간 눈앞이 흐려질 때면 반사적으로 혀를 깨물어 정신을 차릴 정도로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삶의 순간을 불살랐다.


‘조금만 더.’


하나, 아무리 걸어도 저기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소나무조차 가까워지지 않았으니.. 이미 노랗게 바래져 죽은 동공에 절망이 어린다.


‘무리일지도..’


약수터에서 여기까지 올 때 참 많이도 걸었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풍경에 취해서 힘든지도 몰랐는데 지금은 그저 앞이 막막했다.


‘무리야, 약수터 까지는 못 가.’


그렇게 생각하는 즉시 다리가 휘청였지만, 그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니지, 아니야. 포기하는 순간이 끝인 것을.. 약수터까지만 가서, 함께 푹 쉬자꾸나.’


오랜 세월이 가져다 준 인내로 다시 한 번 절망을 걷어낸 노인은 조금씩, 미약하게나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늙은 본인이야 이대로 가도 되지만, 앞길이 구만 리인 젊음은.. 아들 보다 어린 청년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다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친구랑 밥이라도 한 끼 하려고 했었는데.’


청년을 업을 때 자신에게 유일한 활력소가 되어준 바로 그 젊은이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는 더 힘을 냈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이렇게 가면 얼마나 서러울꼬.’


결국에는 소나무를 뒤로하는데 성공한 송영감은 점점 넓어지는 흙바닥을 한 번이라도 더 밟으려 하염없이 걸었다. 하나 그의 놀라운 정신력을 노쇠해진 육신이 따라주지 못했으니.. 흙바닥 조그만 돌멩이에 발이 살짝 걸리는 순간 그는 너무나도 쉽게 주저앉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내가 부족해서..’ 그는 언제나처럼 사과부터 했다.

‘또 실망시키는구나.’ 원망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던 자식들의 시선이 아른거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저 세월이 야속했고, 자신의 손에 생명이 달린 젊은이에게 그저 죄스러웠다.

‘얼른 일어나야지.’ 마음과 달리 몸은 축 처져서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러면 조금만 쉬었다가..’ 그는 다시 일어설 거라 다짐하면서도 여기까지라는 걸 절감할 수 있었다.


젊음이 고행을 하면 체력이 떨어지고 노인은 수명이 소모된다. 체력이야 돌아온다지만, 수명이 다시 채워질 리 만무했다.


‘정말 미안하구나, 내 여기까지인가 보다.’


젊은이의 팔을 놓치지 않으려 깍지 꼈던 손가락이 저절로 풀리자,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등에서 미끄러져 흙바닥으로 널브러졌다. 덕분에 숨쉬기는 한결 편안해 졌지만, 따스했던 온기가 사라지니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환청까지 들려온다.


‘엄마가 우리 키우면서 그렇게 고생할 때는 곁에 있어 주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뭘 해줬다고 이제 와서 잔소리인데? 아빠,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하고 내 인생에 간섭도 하지마, 자격 없으니까.’


딸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이후 전화로 사과받고 정수기도 한 대 들였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 법이다.


‘이제 와서 무슨.. 내가 다 잘못해서 그런 게지.’


가장으로서 말없이 모든 걸 어깨에 지려 했던 그 고지식함이 문제였을까? 풍족하게는 못 해줘도 자신처럼 없는 서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혹여 돈 때문에 하고픈 공부를 못할까 싶어서 정신없이 살았을 뿐이건만..


“그래도 옆에 있어주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다 내 잘못이지.”


덧없는 혼잣말을 뱉어내며 가느다란 숨결을 흘릴 때, 오늘 이 순간을 있게 한 목소리가 뇌리를 맴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어쩌면 저 말은 자식들이 내게 못다 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래, 이 아이를 통해서 전해 준 게야.'


그리 믿었고 들었기에 더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리도 가혹하였음에..


‘하늘이시여, 오늘은 이 늙은이로 만족하면 안 되려오?’


늙은 아비의 목숨을 건 애절함이 하늘에 전해진 걸까? 아니면 지저의 마귀에게 닿았을까?


“어떤 관계지?”


고저 없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와 잠들려는 그를 깨웠다.


작가의말

얽히고 얽혀서 만나니, 다음 편은 숙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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