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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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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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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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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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엽인들 [사명..변화 10]다프네

DUMMY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기고 가느다란 목뒤를 주무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다프네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를 이어갔다.


-인물이 아니라 장소도 있는데 그것도 말해요?

-예, 듣고 싶군요.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은데.. 한 번쯤은 꼭 놀러 가고 싶은 무인도랑, 생각만해도 소름 끼치는 이상한 섬도 있어요. 때때로 정신병원도 보이고.. 음, 계속해요?

-재미있군요.

-그래요? 사실은 저도 혼자서 생각해봤는데, 이건 그냥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나, 내 망상인 것 같아요. 한 번에 수십 명이 보일 때도 있고 단 한 명만 기억날 때도 있고 막 그렇거든요. 엘덜리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통화 중 처음으로 물음에 답하지 않은 채, 기억 속 지식과 받아 적은 단어를 교차해보던 엘덜리는 조금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몇 장면은 조금 더 알아보면 답이 나올 것 같으니 이에 관한 건 차후로 미뤄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저야 뭐..

-알겠습니다, 답이 나오면 그때 말씀해드리지요. 그런데 다프네 양, 그 꿈이라는 거 말입니다..

-네, 꿈이 왜요?

-기록에 의하면 예지자는 꿈을 꾸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대의 저주를 받은 자, 오롯이 미래를 볼 뿐이지요.


다프네의 눈에 의아함이 서린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오늘도 꿈을 꿨는 걸요? 그건 남들이 말하는 그냥 평범한.. 꿈이었어요. 예지라면 모든 게 선명했을 텐데 기억도 잘 나지 않고 모든 게 뒤죽박죽 현실감도 없어요. 그게 보통사람들이 꾸는 꿈이란 거 아닌가요?

-다프네 양, 언젠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대가 현실에 개입하는 순간 미래는 불투명해집니다.

-하지만 바알제불이 제 꿈을 사서 하는 건 뭔가요? 그것도 저로 말미암은 거잖아요.


알고 있기에 더 격양된 물음에 엘덜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능력을 저주라고 칭하는 건, 악몽 속에 갇혀 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의 아리송한 말에 다프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털어버렸다.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필요할 때가 되면 싫어도 언급할 테니 나도 그건 차후로 미뤄두고 진짜 궁금한 것부터 물어 보자.’


그녀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하고 그를 불렀다.


-엘덜리.

-예, 말씀하십시오. 다프네 양.

-예지자가 꿈꿀 수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과 내가 연관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혹여 다프네가 상처받지 않았을까 노심초사 말을 아끼던 백발 노인은 그녀의 목소리가 예상보다 밝자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만, 그대가 개입한 미래가 분명해 보입니다. 정해짐이 뒤틀려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일컬어 혼돈이라고 하지요.

-혼돈이요?


그녀는 입안에 감겨 사라지지 않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대다가 물었다.


-그럼 전 그곳으로 가야 하는 건가요?

-그 또한 선택해야 할 일이랍니다.


‘내가 개입한 미래..’


머릿속이 갑자기 더 복잡해졌지만, 확실한 지향점을 찾았기에 모든 게 차근차근 정리되기 시작했다. 해서 그녀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면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해보다가, 문득 떠올라 귓가를 맴도는 절규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사람이 절규할 때 옆에서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건 아닐까? 가서 만났지만 실패해서 그렇게.. 젠장, 그러면 내가 안 가는 게 맞잖아? 하지만 반대로 내가 막지 않아서 울부짖은 거라면.. 젠장, 그럴 수는 없어. 그곳이 어디인지라도 좀 알면..?’


기억 속에 남은 거라곤 파괴된 도시와 그의 외침뿐이라 막막해 침묵이 길어질 때, 그녀의 머릿속을 읽어낸 듯한 조언이 들려왔다.


-그대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모든 언어를 알고 있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듣고 말해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인류의 천적으로서 태어난 포식자가 잡아먹은 인간의 언어를 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걸 봐야 하기에 그대는 알고 있답니다. 혹여 그들이 궁금하다면 들은 언어를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언..어?’ 뒤통수를 강타당한 기분이었다.


여태껏 다양한 인종, 수많은 사람의 삶을 공유하였음에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운 적 없어 당연히 영어라고 생각했다. ‘이건 어느 나라 말이네.’가 아니라 그냥 듣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와, 나 진짜 멍청해.”


이 보다 더 한심할 수가 없어 푹푹 한숨만 내쉬자, 엘덜리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대에게는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기막힌 절경을 앞에 두고도 볼 수 있음이 축복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이건 좀 다른 것 같아요. 어쨌든 나만 가진 능력인데.. 거기에다가 인터넷 서핑이 취미인데도 여태 몰랐다는 건, 뭔가 좀 모자란.. 그냥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

-그럼 지금부터 바보가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언제나처럼 심플하고 당연한 해답에 괜히 말문이 막힌 다프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타고난 재능을 찾지 못하고 떠납니다. 다행히도 그대는 알게 되었으니까, 잘 사용하면 그만이지요.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엘덜리..

-예, 말씀하십시오.

-혹시, 제가 모르는 재능이 또 있다면 그냥 다 말해주세요. 나중에 또 바보 안 되게.


휴대폰을 통해 나지막한 웃음이 들려왔다.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를테면..


그녀는 말끝을 늘이다가, 포니테일이 문득 떠오르자 입술을 한 번 꼭 깨물고는 이어갔다.


-알고 보니 타고난 격투가라던가, 그..마법인가 하는 거 있죠? 그런 무지막지한 걸 쓸 수 있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아니면 음.. 시대에 하나뿐인 권능이라고 하셨으니까, 소중한 능력을 지키는 가디언이 있었다거나..


신나서 말하다 보니 너무 나간 것 같아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자, 경청하던 엘덜리가 조금은 딱딱한 어조로 그녀를 불렀다.


-다프네 양.

-네?

-그대가 제게 물어봐야 할 것은..

-예, 듣고 있어요.

-세상 단 하나뿐인 재능을 품은 대가로 말미암은 상황을 헤쳐나갈 방도 입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서..


그녀가 말을 하면 일단 기다려주던 엘덜리가 언성을 높여 말을 끊었다.


-지금 그대가 원하는 건 틀린 생각입니다.

-예?

-타고났기에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을 바라는 순간 그대는 결코 새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니요,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다프네 양, 명심하십시오. 이 세상에 그냥 해본 말 따위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생각했고 또 원했기에 입으로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 조악한 사고의 가벼움을 감추려고 그냥 해봤다 정도로 피해가지만, 당면한 현실은 그게 아닙니다.


처음 겪는 엘덜리의 격한 반응과 독설에 놀란 다프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저는 그게 아니라, 몰랐던 재능을 발견한 김에 혹시나 해서 그냥 해본..


놀라 손으로 입을 막은 다프네의 귓가로 피곤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알고 있습니다, 농을 던지는 기분으로 말씀하셨겠지요. 힘든 일을 겪었으니 기분전환도 할 겸 해서. 하지만 다프네 양, 내가 그대의 친우가 아니듯 당면한 현실의 무게도 그리 가볍지가 않습니다.


세상 단 하나뿐인 대화 상대의 단호한 선 긋기에 놀란 외톨이의 커다란 눈에 슬픔이 고이자, 옆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것처럼 예의 그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 양.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가 태어나 디딘 이면이라는 땅은 그런 곳입니다. 세상 누구도 믿고 의지하면 안 됩니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서서 뜻이 맞는 자들과 협력하는 게지, 그들에게 정을 주거나 등을 맡기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머뭇머뭇 떨리는 목소리를 차마 짓지 못해 말끝을 흐린 엘덜리가 길게 한숨을 뱉어내자, 다프네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혹시, 과거에 배신당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저는 달라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배신을 당한 게 아니라..


다시 한숨 쉬며 멀리 과거 속 장면, 장면들을 허망한 눈으로 되짚던 노병은 고해성사하듯 지울 수 없는 업보를 뱉었다.


-제가 그랬습니다. 이 겁쟁이가 그를.. 결국에는 옳았던 동료의 등에 칼을 꽂았습니다.

-예? 엘덜리가요?


그의 외모나 직업, 나이, 사는 곳 등은 정확히 몰랐지만, 여태껏 나눈 수많은 대화를 통해 삶의 지혜나 생존의 방법 등을 배우며 굳건한 신뢰감을 가지게 된 그녀로서는 믿기 어려운 고백이었다. 해서 또 물었지만,


-엘덜리가 배신했다니 저는 도저히.. 정말요?


그는 헛웃음을 흘릴 뿐 더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흘러가던 중 빠르게 마음을 다스린 엘덜리가 격언 하나를 언급하며 막힌 대화의 물꼬를 텄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조금은 뜬금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거부감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바로 대답했다.


-그럼요, 유명한 말이잖아요. 홉스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국가의 필요인가 탄생인가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요?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약육강식이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예, 물론이죠.

-적자생존?

-그것도 알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걸..


그녀가 고개를 갸웃대며 세 가지 물음을 되짚을 때, 잠시간 터울을 두고 기다리던 엘덜리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프네 양, 우리는 저 짐승들을 통칭 무엇이라 부릅니까?

-음, 포식자?

-그럼 우리는 피식자이겠군요.


너무 당연한 말이라 다프네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가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한데 엘덜리 역시 그녀의 제스처를 눈으로 본 듯 타이밍을 맞춰서 다시 말을 이었으니.. 썩 괜찮은 사제간이 아닌가?


-우리는 다 엄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데, 왜 이면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먹고 죽이는 일이 가능하다 여깁니까?

-그야..


그녀는 잠시 말끝을 늘이다가 환한 미소를 띠며 이어갔다.


-그게 당연한 곳이니까요. 이면은.. 그렇군요, 이곳은 저들을 위한.. 아니, 저들이 세운 국가 같은 거나 다름없는 거네요. 약육강식이 헌법인.. 잠시만요, 그러면 우리도 뭉쳐서 세력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홉스를 언급한 것도 그런 의미인 거죠?

-너무 깊이 가지는 마십시오. 그리고 그런 세력은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까?

-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 잠깐만요.


그가 말하려는 바가 언뜻언뜻 그려지자 다프네는 일단 정리부터 하려고 대화를 끊었다. 하지만 엘덜리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다프네 양, 세상의 이면은 그리 거창한 곳이 아닙니다. 이 잔혹한 대지는 허기진 자들을 위한 사육장이고, 지루한 자들을 위한 놀이터이며, 몸부림치는 자들을 가둔.. 전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수용소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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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엽인들 [사명..사제 2]마안 +1 17.01.25 513 8 15쪽
108 엽인들 [사명..사제 1]두 가지 말. 17.01.25 400 9 14쪽
107 엽인들 [사명..변화 13]남명진 17.01.24 429 9 13쪽
106 엽인들 [사명..변화 12]남명진 17.01.24 404 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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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엽인들 [사명..변화 10]다프네 17.01.23 533 8 12쪽
103 엽인들 [사명..변화 9]다프네 +1 17.01.20 513 8 12쪽
102 엽인들 [사명..변화 8]다프네 17.01.20 447 1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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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엽인들 [사명..변화 4] 17.01.17 414 10 12쪽
97 엽인들 [사명..변화 3] 17.01.17 439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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