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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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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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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인들 [사명..변화 9]다프네

DUMMY

움직임을 감지한 LED등이 빛을 밝히자 깨끗한 침대와 보드라운 이불이 보인다. ‘뭐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 혹시 미래에서 일어날 일을 본 거 아니야? 에이, 무슨 그런 불길한 망상을..’


평생을 현실 같은 악몽과 꿈이었으면 하는 현실 사이를 거닐었기에, 오늘처럼 헛갈릴 때가 종종 있긴 했다.


‘하지만 너무 생생했는데.’


혹시 또 몰라서 이불을 치워내고 배와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저 헛웃음만 나온다.


“와, 그게 다 악몽이었어? 아, 찝찝해, 최악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서던 그녀는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분명히 잠옷을 입고 잤는데?’


그녀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향했다. 혹시나 하면서 이불을 다 들추고 쿠션 여기저기를 살피고 나니 의구심만 더 깊어진다.


“이불이 너무 깨끗해, 보통 일어나면 축축하게 젖어야 정상인데.. 그런 악몽을 꾸고도 땀을 안 흘렸다고?”


그래서 시트와 이불 세트만 10개가 넘는다는 걸 굳이 떠올리며 침대 주변까지 싹 훑어본 뒤에 내린 결론은, “설마, 몽유병까지 생긴 거야?”라는 덧없는 농담이었다. 양손으로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답답해하던 그녀는 이내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잡았다.


‘에이, 설마..’


언제나처럼 그냥 문을 열면 되는데 괜히 망설여지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악몽이 예지라면 그 일이 지금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만일 현실이었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야, 생각하기도 싫어.’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위화감을 떨치려 몇 번이고 더 심호흡을 하다가, “그냥 악몽일 뿐이야.” 라고 주문처럼 외치며 힘껏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재빠르게 둘러봤다.


“이것 봐.”


평소와 다름없는 쓸쓸함이 반가워서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흘리며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씻어야겠다."


그녀는 여전히 생생해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애써 외면한 채 욕실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서던 중에 습관적으로 빨래바구니를 힐끔 쳐다봤다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귓가로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새장 속의 마코는 아껴줘야 할 애완동물이지만, 호수 위 오리는 먹잇감에 불과하지요.’


바알제불의 소름 끼치는 전언이 뇌리를 맴돌자 절로 울음이 나와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 같았으면 수치심과 두려움에 흐느꼈겠지만, 세상에 나가 단 한 명이라도 구하겠다는 사명을 마음속 깊이 새긴 지금은 달랐다.


‘그래, 새장이겠지.’


일방적인 폭력에 유린 당하며 느낀 고통이 꿈이 아닌 것처럼, 포니테일이 건넨 약을 거부한 것 또한 자신이 택한 일이었다.


‘난, 애완동물 따위가 아니야. 그리고 이딴 폭력에 흔들리지도 않을 거야.’


그녀는 빨래 바구니 속 붉게 물든 원피스와 수건 따위를 모조리 다 버렸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샤워를 하고, 간단한 식사로 허기를 채웠다. 물론 샤워를 하다가 뿌연 수증기 속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고 먹은 걸 다 게워냈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괜찮아, 벗어나면 돼.'


모든 조명을 수동으로 전환해 집안 전체를 환히 밝히고 그나마 즐겨 듣는 Marlena Shaw의 California Soul을 틀어 볼륨을 높였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시질 않아 으슬으슬 떨려오자 이불을 푹 둘러쓴 채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유일한 우군이자 조언자인 엘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다프네 양. 오늘은 또 어떤 꿈을 꾸셨는지요?

-엘덜리, 안녕하세요. 한데 그것보다 우리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다프네 양, 우리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제가 항상 말하듯 길게 보십시오. 지금까지 해온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요.


노인의 어투는 여전히 평온하고 부드러워 자연스럽게 공감이 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때 말했던 포니테일이 찾아왔어요. 그를 죽인 그 괴물 말이에요.

-그렇군요.


자신의 가족을 몰살시킨 짐승이 언급되었음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엘덜리의 반응에 잠시 당황해 하던 그녀는 이내 말을 이었다.


-그녀가 말하길.. 바알제물은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했어요. 약을 먹지 않는 것부터 엘덜리와의 관계까지도 말이에요.

-그렇군요. 하지만 그건 다 예상했던 일 아닙니까?

-예, 엘덜리가 전에 말씀하셨죠. 하지만..

-혹시 그대는 두려움 때문에 움직이려는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그냥..제가 직접 겪어보니 그들은 정말 인간을..


몸서리 치며 말끝을 흐린 다프네는 포니테일과의 끔찍했던 경험을 더듬더듬 하소연했다. 상처가 거짓말처럼 없어진 것에 관해서도 자세히 말했고.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충분히 그녀를 위로해준 엘덜리는 최상위급 구울에 관해서 짤막하게나마 설명해준 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예견했던 일이 오늘 사실이 되었다고 해서 움직이겠다는 건, 그의 눈을 피할 방도도 찾았다는 말씀입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말문이 막혀 침묵하던 다프네는 과거 겁쟁이 현자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당당히 답했다.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건 엘덜리가 알아서 해야죠. 저는 그렇게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무책임한 말이었음에도 노인은 만족스러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도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예, 맞는 말입니다.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각자의 사명이 다르듯 해야 할 일 또한 다른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예지자여, 내 묻겠습니다.

-예, 듣고 있어요.

-그대는 단 한 명을 구할 거라 하였는데, 어디로 가서 누구를 구할겁니까?

-예? 아니 그건..


고개 떨군 채 말끝을 흐린 다프네는 그것도 엘덜리에게 물어보려고 했다. 한데 그가 먼저 거절을 표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대의 행보를 조정하거나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죠?

-내 것이 아닌 능력의 사용은 걷잡을 수 없는 과욕을 부르게 되니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노력도, 그에 따른 합당한 대가도 치르지 않았기에 통제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엘덜리는..

-아니요, 아닙니다. 저는 성인이 아닙니다.


그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다프네는 '그 수많은 피해자 중 과연 누구를 구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자 엘덜리가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려는지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이미 사명을 세웠습니다. 아마도 그에 관련한 꿈도 꾸셨을 겁니다.

-꿈이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꿈이라, 아니에요 엘덜리. 저는 그런 꿈꾼 적 없어요. 기억하는 건 다 예지몽인데.. 일본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각성한 피의 포식자가 마을 사람 전부를 사육하듯 통제하고 있어요. 가서 그들을 구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프랑스의 예쁜 모델이 또 여행객을 납치해서 잡아먹을 텐데.. 그녀를 막아야 하나요?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인도에서는 그런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중국이나 미국에서의 사육은 규모 자체가 달라요.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들을 막으면 대형 요양원이나 병원이 문을 닫게 되니 그것도 고민이에요. 피를 마신다는 것뿐이지 그들은 인간보다 더 사회에 유익한 존재들인걸요?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는 엘덜리의 마음을 알기에 그녀는 한탄하듯 말했다.


-알아요, 악어의 눈물에 감동할 필요 없다는 거. 하지만 나는 그냥 저들에게 정보를 팔아서 연명하는 악어새일 뿐인 걸요. 세상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넘쳐흐르는데 나는... 지금의 나는 너무 무능력해요.


아직은 여린 예지자의 자신 없는 목소리를 듣자 엘덜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프네 양, 그때 제게 어떤 사명을 말씀하셨습니까?


왠지 쑥스러운 생각이 든 다프네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단 한 명만이라도 구하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했나봐요. 구할 사람이 이렇게나 많고 나는 능력이..


연이어지는 한탄에 엘덜리는 빙그레 웃음을 그리며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그대가 세운 사명은 참으로 옳습니다. 고민이 되시면 일단 이 물음의 답부터 찾아보십시오.

-어떤 물음이요?

-방금 언급한 사람들이 그 첫 번째 한 명이 맞는지.

-첫 번째요? 첫 번째, 첫 번째라.


흔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한 단어를 몇 번이고 중얼대던 다프네는 이내 환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네, 이제 알겠어요. 누군가를 구하려면 처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딱 한 명만 구하는 게 아니라, 첫 번째를 구하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그런 말이죠?


그제야 조그만 깨달음을 얻은 예지자의 모습이 기꺼워 엘덜리는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간섭하는 순간 저 깨달음은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으리라.


‘그대는 훌륭한 예지자가 될 겁니다.’


당대의 눈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답을 찾아내리라 믿으며 담백한 미소를 머금을 때, 고심에 빠진 다프네가 여전히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문제예요, 첫 번째를 찾는 거. 아, 나 무슨 햄릿 증후군 같은 건가 봐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확신에 찬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그대는 알고 있습니다.

-네? 아니에요, 저는..

-다프네 양, 그렇게 서두르지 마십시오. 바로 그 한 명을 찾았을 때 세상 밖으로 나가도 늦지 않습니다.

-음.. 알겠어요. 엘덜리가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조금은 이해가 돼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주제에 충동적으로 움직이려 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괜히 전화해서 투정만 부린 것 같아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요즘 들어 이상한 악몽을 많이 꿔서 그런가 봐요.


흐뭇한 미소를 머금다가 표정을 굳힌 엘덜리가 다급히 물었다.


-악몽이라면, 혹시 그냥 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꿈이요. 엘덜리가 가르쳐 준 대로 바알제불이 준 약을 최대한 조절하고 그 술식이라는 걸 익힌 뒤부터 가끔씩 꿈을 꾸고 있어요.

-대충이나마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음, 엘덜리도 알다시피 꿈이라는 게 제대로 기억 나지도 않고 그렇잖아요? 그냥 흐릿한 장면들만 조금씩 떠오를 뿐이에요.

-그래도 좋으니 듣고 싶군요.

-그러면 음, 정확하지는 않은데.. 하루 종일 앉아있는 남자들이 있어요. 물론 각기 다른 장소에 있기는 한데, 다들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앉아만 있어요. 자신의 키만한 검을 등에 찬 중국무사 같은 사람도 있고 그냥 평범한 지하철.. 낮잠을 자는 손자 손녀가 검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것을 이상한 끈으로 잡고 있는 할머니, 언제나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잘생긴 시골 청년, 아시아권인 것 같은데 학교로 보이는 건물과 어떤 여자 선생님, 전쟁터의 용병들, 바닷속? 그리고 정말로 추워 보이는 남극의 닌자..


여기까지 말하다가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남극의 닌자를 본 날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어요, 말도 안 되잖아요.


즐거운 그녀와 달리 얼굴을 굳힌 채 듣고 있던 엘덜리가 자신의 감정이 최대한 묻어나오지 않게 조심하며 물었다.


-그것 말고 또 있습니까?


작가의말

즐거운 주말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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