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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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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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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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8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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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칠흑의 꽃. 제 10막. 진실을 알아챈 고양이.

DUMMY







막 끝난 서류들을 샤를리즈의 책상에 던져놓고, 에단은 한숨을 내쉰다. 요즈음 부쩍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진 기분이다. 분명 로버트가 에단의 일을 나눠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다 로버트가 에단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더 많이 늘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요즈음 샤를리즈가 에단의 입장에서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리즈가 처리하는 내용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개인적인 시간도 많이 갖는 것 같았고. 분명 그녀는 여태껏 힘든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가 할 일을 떠넘겨버리니 부하로써는 불만이 안 생길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이질적인 소리가 그의 귀에 잡힌다. 목발인가? 걸어오는 방향을 볼 때는 분명 이쪽인데. 에단은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본다. 샤를리즈가 돌아올 시간 치고는 이르다.


분명 저녁은 먹고 들어올 것이다. 상가에 갔다 하면, 온갖 소문들을 스스로 수집해오니까. 그렇다면 이 발자국 소리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에단의 예상과는 달리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에단이 있던 방문을 열었고, 샤를리즈였다. 목발을 짚고 들어오는 모습에 미처 그녀의 표정은 확인하지 못하고 에단이 말했다.


“다치셨습니까? 어쩌다가...”


“창문에서 떨어졌어. 그것보다 일은 다 끝냈나봐?”


“일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다가 창문에서 떨어졌습니까?”


“일이 있었어. 말하지 못할 그런 일이. 그만 좀 캐물어. 안 그래도 지금 머리 아파 죽겠으니까.”


심각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짜증 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깨닫고는 그녀를 바라본다. 지금 보니 창백하게 질려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예측이 안된다. 분명 그 저택에는 샤를리즈를 안 좋게 보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공작의 세력이나 에드리안의 세력이 그녀를 비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엉망일 정도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직접 말해줄 것 같지는 않다. 에드리안을 통해서 알아봐야 할까? 그러나 그렇게 알아보려면 에드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누이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소년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알 수 없다. 지난번에도 눈이 뒤집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에단이 아닌가? 에단은 샤를리즈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지금은 물러날 때이다.


“기분도 안 좋으신 것 같고, 나가보겠습니다.”


“에단.”


“예?”


“미안한데... 신전에서 약을 좀 받아와야 해. 치료비도 내지 못했어. 경황이 없어서. 사람을 시켜서 좀 해줬으면 하는데.”


“그러도록 하지요.”


에단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나온다. 저렇게 기분이 안 좋은 건 무척 오랜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리즈는 감정을 매우 잘 컨트롤하니까. 심지어 비앙카가 죽었을 때조차 조금 나사가 풀린 정도였지 오열을 하거나, 격앙되지도 않았던 그녀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온 몸으로 화가 났다고 말하는 건지. 에단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 간다. 신전에 가는 김에 후원금도 내야겠다 싶어, 적당한 간부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비교적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남들보다 훨씬 귀가 좋은 에단이 아니고서는 듣지 못했을 고함소리.


‘이따위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무엇을 보고 저렇게 말을 한 것일까? 그가 올려둔 서류들? 그녀가 짚고 온 목발?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단은 그가 따로 심어둔, 그라니언 저택의 심복을 떠올렸다. 적어도 그를 통해서 이 일에 대해 알아봐야 할 듯하다.


보아하니 오늘 터진 ‘의문의 사건’에 대해 스스로 움직일 의사는 없는 듯하니, 때를 봐서 자신이 몰래 처리하던가 해야 할 터이다. 에단은 미간을 문지른다. 일이 또 하나 늘었다.






* * *






흔들의자에 앉아 까딱이며 란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주변 소음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는 그였기 때문에 몇 분 전부터 계속 그를 부르는 프랜시스를 본의 아니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폭발한 프랜시스는 조금 감정을 담아 흔들의자를 뒤로 확 젖혔다. 눈에 띄게 놀라는 란을 보고 프랜시스는 소리쳤다.


“제가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아십니까?”


“아, 깜짝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또 그리 하십니까? 그라니언 공께서 얼마나...”


“아차. 그라니언.”


란이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이마를 친다. 그리고는 갑자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프랜시스가 그를 미친놈 바라보듯 보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여태까지 그라니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라니언 공작에게 실수한 것을 잊고 있었지? 프랜시스, 그라니언 공과 따로 만날 테니 약속을 좀 잡아주게.”


“또 잡일은 제게 시키시는군요!”


프랜시스가 이번만큼은 참지 못한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프리실라의 화를 풀어주기 위한 선물도 모두 프랜시스가 골랐었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집사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프랜시스가 아닌가? 란은 앓는 소리를 하고는 이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내 언제 한 번 거하게 한 턱 쏘지.”


“말은... 그것보다 그라니언을 생각하고 계셨다니요? 드디어 프리실라 양에게 마음을 열기로 한 겁니까?”


“전혀. 자네는 아직도 날 잘 모르는가보군.”


“하아. 그럼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생각해보니 프리실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군.”


“예?”


프랜시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답하자 란은 의자에 한껏 기댄다. 그러자 흔들의자가 기울어진다.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지. 심각할 정도로.”


“난데없는 자기 자랑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적에 그라니언 가문의 저택에 놀러간 것이 기억나. 그 때가 아마 세 살 때였던가?”


“세 살 때의 기억을 아직도 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프랜시스가 물었다. 당연했다. 란의 나이는 스물다섯. 적어도 22년 전의, 아주 어린 시절이었던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프랜시스는 새삼 그의 앞에서는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밉보여서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적어도 쉰 때까지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뜻 아닌가? 그런 프랜시스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란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마치 그 날의 기억을 더듬듯.


“그래. 그리고 그 때, 공작이 내게 보여준 보물도 기억하고 있어. 정확히는 아니지만. 희미하게.”


아마도 봄이었을 것이다. 분명 그 날은 따뜻했고, 항상 저를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공작도 꽤 상냥하게 대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공작은 자신을 까칠하게 대했던가?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필 이 날의 기억이 잘 나는 이유는, 그날 본 공작의 보물이 어렸던 그에게는 꽤 신기한 경험이었기 때문이었다.


‘넌 아주 어리고, 기억을 할 확률이 낮으니 보여주는 거다. 사실 엄청 자랑하고 다니고 싶은데 사정상 그러지를 못하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영광인줄 알아라, 꼬맹아. 이 몸의 보물을 보는 건 아마 네가 이방인 치고는 처음이니까.’


아마도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간 곳은 작은 요람이 있는 곳. 그 안에서 무언가를 아주 소중하게 꺼내던 젊은 공작. 그리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꿇어앉아 조심스레 그것을 보여줬다.


어린 나이에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란은, 자신보다도 작은 아이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직 덜 자란 붉은 머리칼이 살랑거리는 게 너무 신기해서 만져보려고 손을 뻗으려던 찰나 공작이 몸을 비틀고 그를 노려보았었다.


‘안 돼. 더러운 거 옮는다. 얘가 얼마나 약한 줄 아냐?’


하지만 정작 그러한 공작의 행동에 놀랐는지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리고 괜히 공작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 꿀밤이나 얻어맞고. 그러고 자신도 울었던가? 그러고 보면 타인에게 맞은 것도 그 때가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이 기억이 아직도 나는 것은. 란은 눈을 뜨고 프랜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묻는다.


“왜 나는 아직까지도 그 때 본 프리실라가 붉은 머리였다고 기억하는 거지?”


“예? 아.. 그 때 프리실라 양을 만난 겁니까?”


“아마도. 계산상 그렇지 않나? 프리실라와 내가 세 살 차이니까. 그런데 그 때 본 아기는 분명히 붉은 머리였거든.”


“본래 기억이라는 것이 왜곡되기도 하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프랜시스의 가설에 동의했다.


“그렇지... 그럼 그 때 공작에게 한 대 맞은 것도 왜곡된 건가?”


“예? 그라니언 공이 저하를 때리셨다고요?”


“모르지. 그런데 나는 그렇게 기억하네.”


“그럼 확실히 잘못 기억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대 폐하께서 얼마나 저하를 아끼셨는데요. 그리고 선대 폐하와 그라니언 공은 사이가 좋았으니 그런 폐하의 성격도 아셨을 테고... 그럼 저하께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으셨겠지요.”


“흠. 그런가?”


“그럴 겁니다.”


프랜시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묘하게 설득당한 란은 고개를 끄덕인다. 안 그래도 공작에게 물어보려던 차였는데 잘 되었다 싶다. 그보다는 공작이 연 살롱에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야할 터이다.




작가의말

10막 끝입니다. 다음 편은 작품상 마지막 외전, 그리고 11막은 전야입니다.

연재 주기에 대해 공지를 올려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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