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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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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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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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2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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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칠흑의 꽃. 제 10막. 진실을 알아챈 고양이.

DUMMY





무대 위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입은 검은 드레스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들이 수놓아 박혀 있었다. 그 보석들이, 무대의 조명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조명은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주변에 서 있는 엑스트라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 그녀와 같이 아름다운 옷들을 입고 있었음에도.


엑스트라들이 웅성거리며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가끔은 농담을, 가끔은 추문을 입에 올린다. 그리고 내용에 따라 여자는 웃기도 하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기도 했으며,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다. 그녀가 환하게 웃을 때면,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지.


비록 코언저리와 그 아래는 부채로 가렸음에도 그녀가 얼마나 행복하게 웃고 있는지 머릿속에 그려졌다. 붉은 머리칼의 반은 보석으로 세공된 핀으로 고정한 그 여자가 움직일 때면, 엑스트라들은 모두 길을 트고, 무대의 조명은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간다.


무대 위의 단 하나뿐인 주인공이니까. 그리고 그 무대를 보고 있는 단 하나뿐인 관객, 샤를리즈는 멍하게 그를 바라본다. 그녀와 똑같은 얼굴과 판이하게 다른 차림새. 남성의 정장을 여성용으로 개조한 그녀의 옷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아름다운 옷.


저 여자는 샤를리즈 빈트뮐러가 아니라 샤를리즈 드 그라니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의자에 풀썩 기댔다. 저게 무슨 우스운 연극일까? 마치 저건 어린 시절 자신이 꿈꿔왔던 동화 속 주인공이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샤를리즈는 심드렁하게 그것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런 걸 원했었던가? 아니, 원하는가?


카를로의 작업실에 잠깐 들를 때마다 보이던 드레스를 보며, 그녀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어린 시절의 꿈이라 치부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인가? 정말로 이제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 것인가? 그랬다면 어째서 칼라일 시모어의 호의로 왕궁 연회에 갔을 때 그토록 촌스럽게 돌아다녔던가?


정말로 공작부인을 엿 먹이기 위해서만 그 부탁을 받아들였던가? 정말로? 샤를리즈는 이마를 짚었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치 삶에 회의감이라도 느낀 것 마냥. 항상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왜?


순간,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눈을 깜박이는데 이내 무대의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눈이 부셔 인상을 팍 찌푸렸다가 서서히 눈을 떤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샤를리즈 드 그라니언이 서 있던 자리에 프리실라 드 그라니언이 서 있었다.


‘아아, 그래. 너였지. 그 자리의 주인은.’


샤를리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리고 지금 왜 자신이 이 우스운 연극을 보고 있는지 깨닫는다. 꿈인가? 이렇게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꾸는 꿈은 처음이다. 그리고 이 꿈의 무대에서 샤를리즈 드 그라니언이 주인공이었던 이유도 알았다.


‘사실’을 접하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일까? 프리실라 드 그라니언보다 자신이 더 그라니언에 가깝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알렉시스 드 그라니언의 경우에는 몇 세대만 지나면 그라니언으로 인정도 되지 않을 옅은 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스 드 그라니언은 그라니언 가문 적통의 피.


먼 옛날, 그라니언 공작 가문이 아닌 그라니언 왕국이었을 시절부터 내려온 피를 물려받은 것이 클라우스 드 그라니언이 아닌가? 그리고 이제야 밝혀진, 그의 자식은 샤를리즈와 에드리안 뿐이었다. 천하디 천한 마구간지기의 딸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직위는 프리실라보다 더 높을 수 있었던 것이 샤를리즈였다.


항상 상대방의 치부를 알면, 반사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까만 생각해왔던 그녀였다. 그러나 공작부인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슴 속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뿐.


프리실라가 그라니언 공작이 아니고, 어쩌면 자신보다도 낮은 지위라면 어째서 자신은 그토록 프리실라를 부러워하고 질투했던가? 왜 자신은 모든 일생을 바쳐가며 에드리안을 공작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던가? 애초에 정해져 있었던 것인데. 프리실라가 공작의 딸이 아님을 감춰주는 대가로 얻은, 이미 정해진 자리를 얻으려고 그토록 발버둥을 쳤던가?


세상의 하늘이 무너지고,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마침내 자신도 무너진다. 사실은, 사실은 그 어떠한 사실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어쩌면 에드리안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에드리안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잡하고 치가 떨리는 사실.


샤를리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꼈으며, 지켜왔던 그녀의 동생에게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부러움이 질투로 바뀔까봐. 마치 프리실라를 대하듯 그 애를 대할까봐... 숨이 막혀왔다. 부인을 하는데도 계속 그녀의 귓가에 대고 악마가 속삭인다.


‘에드리안이 없었다면, 공작의 작위도 공작의 진정한 자식의 자리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프리실라의 모든 권리도 다 네 것이었어.’


자신을 지탱해왔던 삶의 기둥이 이제는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녀를 겨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에드리안을 따뜻하게 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자신보다도 지위가 낮은 주제에 항상 자신을 내려다보던 프리실라를 제 정신으로 대할 수 있을까?


공작부인은? 그 여자는 공작의 자식도 낳지 못했는데, 공식적으로는 공작의 유일한 적통의 아이를 낳은 여자이다. 뭐가, 뭐가 문제였을까? 자신은 프리실라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단지 프리실라보다 못한 것은...


“그래...”


고개를 숙이고 웅크리고 있던 샤를리즈가 고개를 들어 공허한 눈으로, 어느 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갈색 머리칼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꼭 같은 얼굴. 한 때는 그 때문에 자신의 생김새마저도 미워했던 적이 있었다. 샤를리즈는 신경질적으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당신 때문이야. 이 모든 건.”


프리실라가 자신보다 나은 것은 어머니의 신분뿐이자 않는가?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항상, 항상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봤었다. 그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던가?


“귀족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어. 평민 수준만 되어도 됐잖아. 아니, 아니지... 애초에 오르지도 못할 나무는 왜 본 거야? 차라리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어? 애초에 내게 귀족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고만 알았어도 이런 상실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잖아. 왜 이렇게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힘없이 중얼거리며 샤를리즈는 고개를 숙였다. 온 몸의 힘이 다 빠진다. 고개조차 가눌 힘이 없다.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팔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도... 나도 그라니언의 이름을 갖고 싶었단 말이야. 각하, 아니 아버지의 딸로써...”


마음 속 깊숙이 품어왔던 비밀을 떨리는 입술로 털어 놓는다. 이 따위 꿈은 꾸지 않는 것이 좋았을 텐데. 샤를리즈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옆에는 어느 새 프리실라와 공작부인이 서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샤를리즈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특히 너, 프리실라...”


프리실라를 질투하면서도 애써 그 계집애는 운 좋은 것 외에는 죄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녀였다. 질투가 분노로 넘어가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발아래 가득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내 달려 들까봐. 어느 모로 보나 에드리안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참았다. 스스로의 감정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고 싶진 않아서. 그래서 비앙카가 그렇게 죽었을 때에도, 귀족들의 사회는 다 그런 것이라며, 결국 비앙카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진정시켰다. 프리실라에 대한 감정이 질투를 넘어서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무엇보다, 심지어 평생을 원망했던 그녀의 어머니보다 프리실라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삶의 이유였던 에드리안을 부정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도피. 곧 생길 에드리안에 대한 분노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돌린 것이다.


샤를리즈는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오직 프리실라만 남은 자리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에드리안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 다, 다 너 때문이야. 각하가... 공작부인을 버리지 못한 것도, 진짜 공작가의 아이인 에드리안이 고생을 하는 것도, 비앙카가 그렇게 죽어버린 것도, 그리고 내가, 내가 이렇게 불행한 것도 다!”


악을 쓰며 샤를리즈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스스로 몸을 웅크리며 샤를리즈는 중얼거렸다.


“네가 그 무엇보다도 불행해지길 바라.”







* * *







눈을 떴을 때, 무언가가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옆에 누군가 있는 건가? 검은 실루엣이 천 너머로 보인다. 샤를리즈는 손을 들어 천을 꾹 눌러 눈물이 천에 흡수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는 천을 들어 눈을 뜬다.


천장이 익숙하다. 신전의 천장. 아아, 그러고 보니 란의 부축을 받고 신전까지 왔었다. 그리고 치료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들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검은 실루엣을 바라본다. 등을 돌린 채 멍하게 앉아있는 란이 보인다. 저건 또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녀는 숨을 들이 마신 뒤 몸을 일으킨다.


그제야 란이 고개를 돌려 샤를리즈가 깨어났음을 깨닫는다.


“일어났습니까?”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는데. 아차, 이런 말투 좀 꺼려하셨죠? 미안하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방금 일어났는데도 날은 여전히 파랗게 서 있군요. 아무튼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실례라는 생각에 이렇게 앉아 있었고요.”


그 말에 샤를리즈는 눈썹을 까딱이고는 제 발목을 바라본다. 2층에서 떨어졌는데 이렇게 난리가 나다니. 운동신경도 지지리도 없다, 싶다. 에단은 2층에서 자신의 사저까지 오는 데 30초가 채 안 걸리는데 자신은 이 모양이라니. 에단의 운동신경의 1할만이라도 어떻게 얻고 싶은 심정이다. 샤를리즈가 멍하게 제 발목을 바라보는데 란이 물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습니까? 아까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백하군요.”


그 말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곤 꿈의 내용을 떠올리려다 참는다. 잊자, 잊어. 자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공작의 저택에서 들었던 팩트 뿐이다. 쓸데없는 일들은 쉽게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방금 꿈 내용은 모두 쓸데없는 내용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샤를리즈는 말했다.


“아뇨. 꿈따위는 꿀 수 없을 정도로 푹 잤는 걸요.”



작가의말

암울한 내용이네요.ㅠ

p.s.
에단을 찾는 분이 많아서... 샤를리즈가 공작 가문의 저택에 들어갈 당시 마부에게 오늘은 늦게 갈 거라고 에단에게 말해두라고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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