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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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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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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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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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 11막. 폭풍전야.

DUMMY







에드리안은 갑자기 밀려오는 극심한 피로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 피로의 원인은 바로 눈앞의 아가씨들 탓이었다. 분명 그들은 에드리안에게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볼 요량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이제 곧 19살이 되는, 훗날 왕국에서 왕가 다음으로 거대한 땅을 다스리게 될, 약혼녀가 없는 도련님은 굉장히 매력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예쁘장한 외모에 상냥하기까지 하니, 그의 누이가 사교계의 까다로운 공주님이라는 점도 그와 결혼하기 위해 필요한 지참금이 어마어마하다는 점도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반면, 젊은 귀족 계집애들의 매력적인 사냥감이 된 에드리안은 이 상황이 지루하고, 조금 짜증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그들은 어느새 저희들끼리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애매하게도 그들이 에드리안을 둘러싸고 있었던 탓에 에드리안은 이도 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사교계에 흔히 떠도는 가십거리들이었다. 에드리안으로써는 관심도 없는. 그래서 멍하게 있다가 요즈음 화제가 되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그런데 오늘 밤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인데 어째서 왕궁의 출입이 금지된 거죠?”


“글쎄요. 폐하께서 명하셨으니. 사실 매년 파티가 열리는 밤인데, 조금 그렇긴 하죠. 다른 부인들이나 영애들이 어째서인지 묻고 싶어도 다들 그럴 자격은 되지 않으니까. 적어도 그라니언 부인이나 프리실라 양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부인께서는 요즈음 저택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시고, 프리실라 양은 그라니우스로 떠났다고 들어서...”


“그런데 프리실라 양은 왜 그라니우스로 가신 거예요? 그 분은 항상 수도에만 머물길 바라셨잖아요.”


“그거야... ‘작은 그라니언 경’이 더 잘 아시겠죠.”


그러자 갑자기 시선이 에드리안에게 집중된다. 그에 에드리안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프리실라는 먼 친척의 병문안을 갔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그가 누구이고, 어떤 직위를 가졌는지 등의 귀찮은 질문거리가 쏟아질 것이다. 그래서 에드리안은 이럴 때 아주 유용한 답변을 내놓았다.


“가문 내부의 문제라서 그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도 바쁘기 때문에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하려던 찰나, 한 아가씨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그라니언 경은 겨우 한 마디만 하셨네요. 혹시나 우리가 귀찮으신건가요?”


정곡을 찔렀다. 사실 이들 모두 에드리안이 저들을 귀찮아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물어보면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뜰 수가 없게 된다. 형식상으로라도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고, 그럼 또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런 가십거리를 나누는 자리에 에드리안 또한 참여해야할 것이다. 피곤하게 되었다. 순간, 에드리안은 자신이 제 아버지의 성품을 닮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적어도 그를 닮았더라면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테고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두가 어려워하는 성격인 그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 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에드리안?”


낯익은 목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리안의 표정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미소 지었고, 동시에 아가씨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라니언 공작만큼이나 꺼려하는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에드리안이 고개를 돌리며 그를 불렀다.


“엘루이즈!”


갑작스러운 환대에 엘루이즈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사태를 깨닫는다. 그리고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린 뒤 성큼성큼 걸어와 말했다.


“약속 시간을 도대체 얼마나 어길 참이냐? 기어이 이 몸이 네 녀석을 찾도록 만드는군! 내가 얼마나 바쁜지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말이야!”


에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엘루이즈의 의도를 깨닫고는 연극에 동참해주기로 한다.


“미안. 하지만 보다시피 어쩔 수 없었어.”


“보다시피? 너도 이젠 클랜디스를 닮아가는군. 그래, 그런데 클랜디스야 가문의 위세가 한미해서 아무하고나 뒹굴어도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넌 좀 다르지 않나? 거기 있는 아가씨들 가운데 누가 그라니언 각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지? 아스피트 가문의 영애라도 있는 거야?”


사실적인 엘루이즈의 말에 아가씨들은 인상을 찌푸린다. 실제로 그들은 한미한 가문들의 영애였다. 그러니 자존심을 버리고 에드리안에게 저돌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어차피 맺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라니언 가문의 여주인이 되기 위한 대가는 어마어마해서, 한미한 그녀들의 가문 재정을 파탄내고 말 것이다. 단지 불장난이면 충분했다. 귀한 후계자에게서 자격조차 없는 계집애를 떨어뜨리는데 공작은 주저 없이 자금을 풀 테니까.


그거면 됐었는데, 저 망할 클랜디스의 친구가 방해를 놓았다. 클랜디스와 오래도록 친했던 만큼 그녀들의 수작쯤은 진즉 파악했을 것이다.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은 뒤 꽤 뚱한 표정으로 절을 하고는 재빨리 모습을 피했다. 그에 엘루이즈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저거, 저거. 싸가지들 좀 봐.”


“네가 말을 심하게 하긴 했지. 누구든 가문을 무시하면 저럴걸?”


에드리안이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들의 편을 들어주자 엘루이즈는 인상을 찌푸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만한 짓거리를 그럼 하지 말아야지.”


“그건 그렇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에드리안이 말했다. 그러자 엘루이즈의 눈에 빛이 감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랜디스나 엘루이즈가 타인의 욕을 할 때 한 번도 맞장구를 쳐준 적 없는 에드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저 계집애들을 욕하는데 은근슬쩍 동참을 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신사적으로 행동하던 에드리안의 또 다른 모습인지라 엘루이즈는 괜히 신이 났다. 친구의 다른 면모를 보는 것은 그 만큼 친구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호오? 저것들이 어지간히도 널 들볶았는가보다? 내 말에 동의를 하고 말이야.”


엘루이즈가 은근히 말하자 에드리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이런 것도 처음이다.



“부담스러우니까. 내가 얼마나 오래 잡혀있었는지 모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 그런데 꼴을 보아하니 적어도 30분은 잡혀있었던 것 같군. 그것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말이야.”


“정답.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접근해오는 여자들을 상대로 그토록 매몰차게 굴었던 이유를 이젠 좀 알 것 같아.”


“네 아버지는 심했지. 과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여자한테는 발길질을 하려고 발을 들어 올렸다는 소문도 있어.”


터무니없는 말에 에드리안은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엘루이즈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얼음장 같은 공작이 불길같이 화를 내며 발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감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에드리안은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하며 말했다.


“그건 거짓말일 거야. 분명히.”


“사실이라 해도 피해자가 그게 자신이라고 말하겠냐?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런데 네 아버지를 보기만 하면 슬슬 기는 부인들이 몇 명 있지 않았어?”


“아, 그만. 그만해.”


에드리안이 끅끅 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누가 보면 엘루이즈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엘루이즈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아, 그거. 그거 말해준다는 걸 깜빡했네. 내가 널 찾았던 이유도 그거 때문이었는데.”


“그거라니?”


“시동이 널 엄청 급하게 찾고 있더라고. 에단 씨. 아니, 이제는 경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런데 기사가 아니라서 경이라 부르기도 뭣한데. 아무튼 뭐, 널 만나러 왔다고 하더라.”


“에단 씨가? 어... 무슨 일이 있나?”


에단이 직접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자의적으로는 더욱. 그러니 샤를리즈가 에드리안을 찾고 있다는 것이 옳은 추측이었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다.


궁정에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굳이 연락을 취하지 않는 샤를리즈이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밀려오는 불길함에 에드리안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를 이상하게 본 엘루이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에단 씨와 넌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그 분이 널 찾으러 왔다는데 파랗게 질려? 혹시 뭐... 얻어맞을 일이라도 있다던가. 하긴, 그런 사람이 팬다고 하면 나라도...”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지. 네가 뭐, 살면서 얻어맞을 짓을 할 리도 없고. 에단 씨가 그렇게 막무가내로 주먹부터 들이 댈 사람도 아니니. 그런데 왜 그렇게 파랗게 질렸어?”


“아니. 그냥... 아무 일 없이 직접 날 만나러 온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금 자신이 품고 있는 걱정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말해야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엘루이즈가 지레짐작하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라니언 가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어? 아, 뭐. 그렇지.”


굳이 따지자면 샤를리즈 또한 그라니언 가문의 일원이긴 하니까. 그런 셈이기도 했다. 에드리안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엘루이즈는 아랫입술을 비죽인 뒤 말했다.


“네 아버지가 수도에 있는데 무슨 일이 있어봐야... 아, 그런데 프리실라 양은 진짜 왜 그라니우스로 돌아간 거냐? 그거 때문에 요즈음 셰르먼드 부인이 굉장히 활개치고 다닌다더라.”


엘루이즈의 입에서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제가 나오자 에드리안은 눈을 깜빡이다가 묻는다.


“사교계에 관심이 있었어?”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약혼녀가 수도의 사교계에 대해 굉장히 호기심이 많아서. 간간히 편지로 물어보는데 대답은 해줘야 하니까.”


“호오?”


“뭐?”


에드리안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자 엘루이즈는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으며 묻는다. 그러자 에드리안은 히죽 웃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냥. 검술에만 빠져있는 네가 약혼녀를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클랜디스가 지난번에 얘기해준 적이 있어. 너와 네 약혼녀는 매달 한 번씩 만나는 게 전부라고. 그러니까 내 말은...”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해도 무례하게 들릴 것만 같아 에드리안은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입을 오물거렸다. 그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엘루이즈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렇게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 쓰냐는 거로군.”




작가의말

즐거운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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