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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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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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0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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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제 11막. 폭풍전야.

DUMMY







“뭐라고요?”


뜻밖의 말에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이자 란은 뭘 놀라느냐는 듯 보란 듯이 술을 마시고 말했다.


“말했잖아요. 내가 믿고 있었던 게 모조리 흔들렸다고. 그래서 사실은 모두 관두고 싶은데, 그래선 안 되니까. 여태까지 날 보호해주고, 날 따랐던 사람들을 모두 배신하는 꼴이 되니까. 그래서 얼른 끝내고 싶단 말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하면 더 나을 것 같아서. 더 길게 끌었다간 나도 모르게 도망칠 것 같아서.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의 말이 끝날 때쯤에는 그는 완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초라해보여서 샤를리즈는 눈만 깜빡이다가 이내 눈을 돌려 잔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왠지 보면 안 될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문, 그러니까 왕가를 되찾을 명분이 없어진 건가? 어떻게? 왜? 그는 왕가의 적통이다. 그리고 현왕은 보잘 것 없는 왕족.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이 더 많은 상황이다. 왕가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


칼라일 시모어? 그는 전왕의 사람이다. 그의 의견은 편파적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란의 배경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한낱 왕실 마법사가 그런 대단한 일을 알 리는 없다.


프랜시스 드 블라레트?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눈치 챘다.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 못할 위인은 아니고, 이런 상황이서 란이 프랜시스가 아닌 그녀를 찾았다는 것은 그 또한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술기운 때문인지 샤를리즈의 머리는 천천히 돌아갔고,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 클라우스 드 그라니언. 현왕의 친우이자 전왕의 총애를 받았던 귀족. 그리고 샤를리즈가 어쩌면 가장 쉽게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사람.


그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 부탁한 적은, 에드리안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고서는 없었다. 그는 그녀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줄까? 들어줄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 또한 모든 사실을 알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 진실을 듣기 위한 대가는 준비해두어야 할 것이다.


“이제 당신 이야기를 좀 해봐요.”


란은 여전히 의자에 기댄 채 말했다. 그에 샤를리즈는 잠깐 생각했다. 란은 분명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진실을 감춘 채.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다르다. 사생아라는 배경은 굳이 알릴 필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난 유명한 가문을 섬기고 있는 집사와 하녀의 딸이었어요. 내 어머니는 하녀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낮은 하녀였고, 덕분에 다른 하녀들의 시샘을 샀죠. 그래서 터무니없는 오해로 죽었어요. 당신이 좋은 가문의 출신이었다고 하니 잘 알겠죠? 지위 낮은 하녀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 나는 운이 좋았죠. 당시에 성 안에 있었거든요. 아무튼 날 불쌍히 여긴 주인 나리께서 친분이 있던 빈트뮐러 상단으로 날 보냈죠. 그래서 이렇게, 여기 있는 거고요.”


사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빈틈이 많았지만, 둘은 취해있었고, 사소한 문제였기 때문에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였군. 당신이 그토록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것 말이에요.”


“맞아요. 비록 눈치는 좀 샀지만. 사실 눈치를 산 정도가 아니었어요. 빈정거림은 예사였고. 어쩌면 내 어머니가 그들의 손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나일지도 모르죠. 아니, 사실은 꽤 큰 비중을 차지했을 거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수도는 좀 덜해도 조금만 시골로 내려가면 똑똑한 계집애들은 마녀로 취급받는다는 거.”


착각이었을까? ‘마녀로 취급받는다.’는 말에 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갑자기 술을 마시고는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당신의 아버지는요?”


‘아버지’라는 말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몰라요. 아무튼 상단에서의 생활은 꿈만 같았죠. 총수의 수양딸이라고 하니 모두들 상냥하게 대해줬고, 부족한 것도 없었고. 눈치 볼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곳에서 그라니언의 아드님과 에단 씨를 만나게 된 거로군요.”


“그래요. 진짜 가족 같은 사람들이죠, 내게는. 당신에게 있어서 프랜시스 씨도 그런 사람 아닌가요? 보아하니 그가 당신의 편의를 봐주고 있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블라레트 공과 내 아버지는 꽤 친했다더군요. 그 분이 절 거두어주셨어요. 덕분에 프랜시스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요. 형제나 다름없죠.”


“그렇군요. 어쩐지 둘이 친구 같지는 않았어요. 느낌상 말이에요.”


“뭐, 제가 형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죠.”


란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샤를리즈는 어깨를 으쓱인 뒤 잔을 비운다. 샤를리즈가 잔을 다시 채우는데, 란이 말했다.


“참 우습죠?”


“뭐가요?”


“이렇듯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졌는데, 고작 진실 하나 알았다고 이렇게 흔들리는 게 말입니다.”


그 말에 샤를리즈가 눈을 깜빡인다. 그럴 리 없겠지만,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이 그랬죠. 당신이 안 진실은 당신의 세계를 무너뜨렸다고. 그 정도의 충격이라면 그럴 수도 있죠.”


“경험담입니까?”


“뭐, 그렇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으나, 테이블 아래 샤를리즈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란의 말대로 그것은 ‘우스운 일’이기도 했고. 분명 술에 취해 있었음에도 머리는 한층 맑아졌다.


그리고 여태껏 자신이 했던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그건 확실히 잘못한 일이었다. 샤를리즈는 그제야 그 사실을 인정했다. 에단의 말대로 에드리안에게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는 것이었다. 항상 그 애를 위하다가 갑자기 제 인생을 찾겠다고 훌쩍 떠나버리는 건 역시 책임감 없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에드리안은, 그 애는 너무 착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분명 상처받았을 것이다.


샤를리즈는 술잔을 채운 뒤 눈을 꾹 감고 한 번에 들이켰다. 술잔을 테이블에 놓고 눈을 뜨니 란 또한 막 잔을 비운 참이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는다고 했고, 이 술이 꽤 독한 편임을 감안하면 슬슬 신호가 올 때도 되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알딸딸한 것이 기분이 묘해졌다. 그럼에도 둘은 손에서 잔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한참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이렇게 먹다간 정말로 취해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거기까지 생각하자 샤를리즈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물을 홀짝거리면서 마시는데 란이 갑자기 각을 잡고는 샤를리즈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 나 당신한테 줄게 있었는데."


난데없는 말에 샤를리즈는 눈을 깜빡이다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완전히 맛이 갔군. 어차피 취한 상태이니 저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샤를리즈는 턱을 괴고 나른하게 물었다.


"뭔데요?"


"아... 그게."


란이 머리를 묻고는 머리칼을 헤집는다. 그에 샤를리즈는 눈을 얇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다가 헛기침소리를 낸 뒤 난간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의 소리를 들은 마담이 그녀를 올려다봤고, 샤를리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마담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습을 감춘다. 그 때였다.


"역시 직접 줄 때까지는 말을 못하겠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주기가 좀 그래서..."


그리고 뭐라고 더 말하는데 웅얼거리는 소리에 샤를리즈는 그 말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란을 바라보며 샤를리즈는 다시 물을 홀짝 마셨다. 취하면 곯아떨어지는 유형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때였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누가 다가왔다. 샤를리즈는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깜빡인다.


'밤 꾀꼬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냐'고 묻는 마담의 말에 란을 쫓아오는 이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이 사람이 올 줄이야. 그녀는 그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얼굴도 처음 봤지만, 그의 정체가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닮지 않았는가, 란과!


샤를리즈는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망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잠행을 하시는 것이니 제가 여기서 예를 갖춰서는 안 되는 거겠죠?"


샤를리즈의 물음에 그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놀랍군요. 아가씨가 내 정체를 바로 알아챌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혹시나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설마요. 전 그렇게 대단한 신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란 씨와 너무 닮으셔서요."


란이 말했다. 그는 얼른 그녀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길 바란다고. 그래서 그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다. 란은 그녀가 어떤 길을 가야할지 방향을 제시해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만, 그의 뒷조사를 해서 알아냈다는 것보다는, 란이 술김에 실수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샤를리즈는 조금 장난을 쳐보기로 한다.


"그 말은 아가씨가 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렇다면요?"


"두렵지도 않습니까? 란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알다시피 저 애는..."


"그래서 저를 해치실 건가요?"


"그렇다면?"


"그럴 수 없으시잖아요"


"어째서?"


"당신은 란 씨의 판단력을 믿을 테니까요."


말싸움이라도 하듯 빠른 대화가 순식간에 흘러갔다. 사내의 푸른 눈과 샤를리즈의 녹색 눈이 불꽃 튀듯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웃음을 터뜨리고 눈을 피한 것은 사내였다.


"요즈음엔 이런 아가씨가 없어서 면역이 없었는데. 당황스럽군요."


"칭찬 감사해요."


"그래서, 아가씨는 누굽니까?"


사내가 웃음을 멈추고 진중하게 묻자 샤를리즈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인다. 그는 란이 스스로 그의 정체를 샤를리즈에게 밝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만한 가치를 하는 여자여야 한다.


자신의 진짜 정체를 밝힐 수는 없고. 그렇다고 쓸모없는 작가 노릇을 할 수도 없다. 샤를리즈는 눈을 굴리다가 이내 적당한 대답이 떠올랐다. 그래, 저 사람은 '그'를 알고 있지 않는가?


"난 에단 피데스의 주인이에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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