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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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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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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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09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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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제 11막. 폭풍전야.

DUMMY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은 탓에 방은 그 어둑하고도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놓여 있는 침대에 샤를리즈는 누워 있었다. 아직 잠들 시간은 아니다. 거의 새벽이나 되어서 잠이 드는 버릇이 있는 그녀이다. 이제 겨우 해가 질 무렵인데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않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꽤 먼 기억을 되짚는다. 에드리안이 걸음마를 겨우 배웠을 무렵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인들의 괴롭힘을 제외하고는 먹고 사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앨런이 편의를 봐줬으니까.


본래라면 에드리안도 공작부인이 키워야 했었다. 유일한 아들이니까. 거기다 공작부인은 수도로 올라간 지 오래 되어서, 어떻게 잘 속여 말하면 에드리안은 공작부인이 낳은 적자로 둔갑할 수도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제 가족인 에드리안을 뺏길까봐 샤를리즈는 꽤 고군분투했었다.


뭐, 고군분투라고 해봐야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니었지만. 공작은 항상 수도에 있어서 그에게 부탁을 직접 할 수는 없었지만, 간간히 앨런이 그라니우스에 오면, 엉망으로 쓴, 에드리안을 제발 제게서 빼앗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애원한 것뿐이다.


생각해보면, 그러니까 좀 더 어른스럽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때 그랬던 것은 잘못이었다. 차라리 에드리안이 공작부인이 낳은 아들이 되었다면 그녀가 그토록 노력할 필요도, 에드리안이 지금 귀족 청년들에게 따돌림 당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에드리안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어머니도 빼앗겼고, 아버지는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던 데다가 항상 저를 죽일 듯이 바라보는 독살스러운 부인도 있었고. 넓디넓은 성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웃어주고, 사랑해줬던 단 한 사람. 그녀가 인정한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그래서 에드리안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었다. 에드리안을 올바르게 자라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는 달리 귀족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었던가? 그렇게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자신의 인생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자신의 인생이라니.


자신의 인생은, 그녀가 열망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에드리안을 귀족으로 만들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리안이 알고 있는 그녀의, 에드리안에 대한 사랑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샤를리즈는 제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다. 에드리안은 자신을 순수하게 가족으로써 사랑했지만, 샤를리즈는 저도 모르게 에드리안을 ‘자신의 바람을 이루어줄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제야 아무도 모르게,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그 감정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샤를리즈는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소리쳤다. 그 때는 어렸으니까. 그리고 그 어렸을 적의 마음이 커가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고쳐지지 않은 채, 함께 자라왔다. 사실은 그게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에드리안으로부터 떨어지려 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루타로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도 어쩌면, 전부는 아니지만 반절의 이유는 될 것이다. 나머지 반은 여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감이겠지만. 어쨌든 에단의 말은 맞았다. 그 애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아끼는, 그리고 자신을 아껴주는 어쩌면 유일한 가족이 아닌가?


아니지. 이제는 유일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또 하나 있는 가족이었던 공작은 최대한 배척했다.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자신을 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와 프리실라가 같은 날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의 어머니는 공작에게 있어서 단순한 노리개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만일 조금만 더 조숙했었다면, 아니 차라리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만 있었다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깨달을 수 있었다. 수 년 간 수도에 있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공작부인을 수도로 부르지 않았던 공작.


프리실라가 간간히 보이는 집착과도 다름없는 공작에 대한 갈망. 샤를리즈가 9살 때 받았던 보석. 그리고 빈트뮐러 상단에 대한 지원. 그저 에드리안을 보호하기 위해서 라고만 생각했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등 쓸모도 없는 서녀였고, 이 일의 당사사이니까. 감정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다. 샤를리즈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샤를리즈의 심경이었다. 그녀는 에단이나 에드리안에게 말해왔던 것과는 달리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프리실라를 신경 쓰고 있었다. 같은 날 태어난 프리실라와 자신. 고작 몇 시간 만에 인생의 판도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자신은 마구간에서, 프리실라는 성 안에서 태어났다.


항상 아름다운 옷만 입고, 좋은 곳에서 살고, 맛있는 음식만 먹고 자랐을 것이다. 책 몇 권 읽을라치면 온갖 눈총을 받아야 했던 그녀와는 달리 프리실라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부모님을 다 가지고 있었고, 자신은 동생뿐이었다. 모든 것이 부러웠다. 처음에는 드레스를 입었던 것으로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점점 날이 갈수록 그 애가 받게 될 권리들이 너무나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왜 똑같은 아버지를 가졌는데 자신은 이렇고 저 애는 저렇지? 힘들게 겨우 이룩한 그녀의 모든 것은, 프리실라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와 프리실라를 이토록 다르게 한 것은 무엇인가?


운. 운이었다. 지독히도 운이 좋은 계집애.


그리고 그 운은 그녀를 아버지가 한낱 보잘 것 없는 방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적계로 만들었다. 프리실라는 운으로 모든 것을 가졌고, 샤를리즈는 그러지 못했다. 운이 없었으니까. 그 사실이 지독히도 가슴에 사무쳤다.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결국은 운이라니.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적어도 프리실라, 그 애가 없는 곳에서. 어쩌면 자신이 받을 수 있었던 권리를 모조리 가져가버린 그 애가 없는 곳에서, 혹은 그 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프리실라를 자신의 인생에서 내몰 수만 있다면, 샤를리즈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독한 질투. 그 질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샤를리즈는 눈을 떠 똑바로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이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프리실라가 공작의 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그 애를 이렇게 질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애가 뭘 하든, 심지어 자신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샤를리즈는 그 애를 동정했을 테니까. 그리고 어쩌면 공작... 아니, 아버지와도 이렇게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항상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봤었다, 그녀는. 사실은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면서.


상반되는 마음이 휘몰아쳤기 때문에, 그라니우스에 방문해 공작을 보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그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봐야 하는가? 공작은 눈치가 빠르다.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눈치 채면, 무엇 때문인지도 어쩌면 금세 눈치 챌 지도 모른다. 그럼 나아질까? 변할까? 언제부터인가 얽히고 얽혔던 이 상황이?


딱!


무언가, 작은 것이 부딪히는 소리에 샤를리즈는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무슨 소리였지? 주변을 돌아본다. 아무 것도 없다. 아니지. 어쩌면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에단 만큼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데 또 한 번 소리가 들린다.


딱!


이번엔 조금 크다. 이게 무슨 소리이지? 이미 어둑해진 방인지라 그 소리의 근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샤를리즈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그 때였다. 창문 밖으로 무언가가 날아왔고, 또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딱!


돌멩이인가? 기껏해야 자신의 검지 손톱만도 안 될 돌멩이가 그녀의 창문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창문을 깰 의도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에단이나 에드리안밖에 없다. 하지만 에드리안은 오늘 밤 리제이나인가, 하는 이름의 아가씨와 데이트가 있었다.


그럼 에단인가? 하지만 오늘 낮의 정황으로 보면, 에단이 굳이 이런 장난을 칠 리 없다. 로버트는 직접 방으로 찾아왔을 테고. 샤를리즈는 인상을 찌푸리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포기한 건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이렇게 간단히 가버릴 거, 왜 이 시간에 저런 번거로운 짓을 한 걸까? 자신을 만나고 싶다면 상단으로 직접 들어와 물어보면 될 텐데. 비록 축제라 상단에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줄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호기심에 샤를리즈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봤다. 그는 잔뜩 쳐진 등을 하고, 자리를 뜨고 있었다. 항상 당당한 걸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왜 저렇게 힘이 없지? 아니, 그 전에 왜 이런 시간에 여기에 온 거지?


평소와는 달리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평소라면 못 본 척 했을 테지만, 샤를리즈는 창문을 열었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선택. 먼 훗날의 그녀는 이 행동을 후회했을까?


“란?”



작가의말

본래라면 11막과 12막으로 나눠야 할 분량인데 그냥 11막으로 넣었습니다.
그래서 11막은 꽤 긴 챕터가 될 것 같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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