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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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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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9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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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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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DUMMY








클레어를 데리고 가 왕에게 약혼할 여자라 소개하고 싶다고 공작에게 청을 했을 때, 왕성에서 온 답은 흔쾌히 그를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내동댕이친 자가 직접 쓴 초대장을 봤을 때에는 정말로 이 초대장을 쓴 사람이 자신의 손등을 무자비하게 그은 자인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왕성의 분위기가 꽤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스로 알아보고 판단할 것을. 최대한 왕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수도의 일에 대해서는 백치이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끊고 지냈던 것이 화근이었다.


괜히 분위기가 좋지 않아 불똥이 클레어에게까지 튈까봐 겁이 났다. 5살짜리 아이에게도 검을 겨누던 남자이다. 여자라고 봐줄 리는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태자 저하께서 불미스러운 사고로 목숨을 잃으셨지요. 그건 알고 계십니까?”


모를 리 없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그의 조카. 조카라고는 해도 나이 차이는 거의 나지 않았지만. 아마 그와 7살 정도 차이가 나는 조카였을 것이다. 왕에 의해 왕족들이 거의 몰살되다시피 한 왕가에서 나온 첫 사내아이. 그것만으로도 그 소년은 존재 자체가 축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레지스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질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태어났음을 진심으로 기뻐했던 그였다. 왕가에 적통의 사내아이가 태어남으로써 그가 왕에게 죽임을 당할 확률은 낮아졌으니까. 그랬던 그 소년은 제 어머니, 즉 왕비와 여름을 기념해 놀러간 왕실 소유의 별장에서 죽었다.


갑자기 난 화재로 가장 먼저 대피했던 소년이었지만, 제 어머니가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 하인들 몰래 불 속을 뛰어들었다고 했다. 정작 왕후는 다른 비상 통로를 통해 빠져나왔었고, 소년은 그렇게 별장에서 어머니를 찾다가 죽었다. 그리고 그 일에 관계된 모든 이들은 죽었다. 왕후를 제외하고.


그 때는 한창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수도와 먼 그라니우스조차도 긴장감에 떨고 있었지.


“그건 정말로 비극이었죠. 나도 그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폐하께서는 공개적으로 마마를 무시하고, 경멸하고 계십니다. 당시 마마께서 얼른 자신이 빠져나왔음을 알리지 않고 엄살을 부려 저하께서 그리 목숨을 잃으신 것이라고요. 마마께서는 본래 겁이 많으신지라, 그 당시 자신이 무사함을 알릴 정신도 없이 하인들을 놓아주지 않으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왕실 소유의 별장이, 그것도 여름에 화재가 날 줄 말입니다. 게다가 그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계실 분이 바로 마마이실 텐데.”


알만 했다. 왕에게 있어서 사랑스러운 아들을 잃은 분노를 풀 곳은 왕비뿐이었을 것이다. 조금만 왕비가 이성적이었다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생각이 왕을 괴롭혔을 것이다. 왕비는 왕비 나름대로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고.


화재로 인해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렇게 세세한 내용은 몰랐다. 아마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성격의 왕이 맞다면, 아마 폐비를 시켜버렸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그녀가 먼 나라의 공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크로이츠 왕가와 별로 교류가 없어진 그런 나라였지만 왕이 왕비와 결혼할 때만 해도 교류는 활발했었다고 들었다.


아무튼 왕에게 있어 왕비는 쓸모도 없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가 되었다. 분위기가 안 좋을 만 했다. 레지스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어쩌면 이것은 함정이 아닐까? 왕가에 이제 남은 젊은 왕족이라고는 자신밖에 없으니 공개적으로 자신의 흠을 잡고 죽이려는, 그런...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대신관 데스마타 님 때문이지요.”


‘대신관 데스마타’라는 말에 레지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대신관이 요즈음 분위기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폐하는 신관 세력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셔서 그들과는 상종도 안하실 텐데.”


“그렇지요. 하지만 다른 나라와의 관계들 때문에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대하지는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신 다라크를 믿는 나라는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적어도 폐하께서 대신관보다 더 강하시니 예전보다 대신관이 힘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아무튼 그 때문에 요즈음 자주 힘겨루기를 하십니다, 두 분이서. 지켜보는 귀족들이나 하인들은 죽을 맛이지만요. 폐하도 폐하이지만 대신관께서도 성정이 장난이 아니신지라. 아마 오늘 연회에도 대신관께서 참석하실 겁니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절대 두 분 중 한 분의 편을 들어선 안 됩니다. 적당히 있다가 빠져 나오셔야 해요. 되도록 두 분이 함께 계실 때는 멀리 떨어져 계시고요. 레지스님이 연회장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먼 그라니우스에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모르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폐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하시지만 틈을 보이면 가차 없이 내치는 분이신지라. 연회장에서도 모시고 싶지만 제 신분이 신분인지지라 어찌할 수가 없군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요즈음의 사교계는 말만 상냥하게 할 뿐 모두들 서로를 쳐내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사내는 요즈음 세상의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내의 말을 요약하자면 서로 물고 뜯는, 동물들의 세계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겠군, 요즈음 사교계는. 그런 곳에서 그와 클레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왕의 눈밖에 벗어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야 한 번 그 전례가 있다고 하지만, 클레어는 아니다. 걱정이 되어 클레어를 바라보는데 의외로 그녀는 스릴이 넘친다는 듯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이런 면이 있었던가? 조금 더 조용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 모습에 놀라 레지스가 물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방금 이야기를 듣고 난 솔직히 무서운데.”


“그런가요? 하지만 멀리서 전해들은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 걸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꽤 잘할 것 같아요.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시는 군요, 아가씨.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사내가 우려 섞인 말을 하자 클레어는 애써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나 즐거워하다니. 하긴, 그토록 가고 싶었던 왕성의 연회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부담이 된다. 자신 혼자이면 괜찮지만 옆에는 챙겨야 할 사람이 더 늘었으니까.


마침내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먼저 와 있었던 귀족들의 시선이 한 몸에 쏟아진다. 그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왕족이기 때문에 낮은 신분의 귀족들은 감히 말을 걸지 못하고, 쫓겨난 왕족이기 때문에 높은 신분의 귀족들은 자존심에 말을 걸지 않는 상황.


그저 새장 안의 보기 좋은 새처럼, 구경이나 당하는 위치. 향수 냄새로 가득한 연회장 안의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수치심에 연회장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만일 그의 팔을 굳게 잡고 있었던 클레어의 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왕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왕이 올 때까지 이렇게 수군거리는 구경꾼들 사이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클레어 또한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 척만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폐하께 동생분이 있다고 들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젊으신 분일 줄은 몰랐어요.”


어수선한 분위기를 깬 맑은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둘은 태어나서 바다를 처음 본 시골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는 절세의 미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황금빛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 그리고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는 어쩌면 소름끼칠 수 있었음에도 아름다웠다. 마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인간을 홀려 잡아먹는다는 괴물처럼. 그녀는 그들의 반응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빙긋 웃은 뒤 말했다.


“제 남편이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홀로 왔는데, 이렇게 대단한 분들이 올 줄 알았다면 제 남편도 억지로 데리고 오는 것을. 아, 제 남편은 로즈퍼드 자작이랍니다. 한미한 가문이라 알지 못하시겠지만.”


로즈퍼드 자작이라는 말에 둘은 그제야 그녀를 알아보았다. 멀고 먼 그라니우스에서조차 유명한 로즈퍼드의 자작부인이 아닌가? 물론, 그 미색으로 말이다. 본래는 평민 출신이었으나 미모로 자작부인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크로이츠 왕국에 오는 외국 귀족들조차 그녀에게 반해 값비싼 선물을 사다 바친다는 여자.


그리고 마침내 왕의 마음까지 빼앗았다는 소문이 도는 그런 여자였다. 적어도 그 소문은 사실이었음을 레지스는 깨달았다. 왕의 마음을 빼앗았으니, 아무도 말을 걸지 못하는 그에게 직접 말을 걸었고, 주변의 귀족들도 흉을 본다기보다는 모두들 다 ‘역시 로즈퍼드 부인이로군.’이라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 정도의 대단한 여자가 말을 걸어준 것을 감사해야할까? 레지스는 어리둥절한 모습을 감추고 그녀에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부인. 부인의 소문은 그라니우스에서도 들릴 정도였지요. 이쪽은 모르건 가의 클레어 양입니다.”


“아, 폐하께 직접 들었답니다. 좋은 가문에 미인이라니, 레지스 님은 운이 좋은 남자로군요.”


로즈퍼드 부인은 굳이 ‘직접’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빙긋 웃었다.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긴, 그 정도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여자였지만. 그 때였다. 클레어가 갑자기 앞을 나서며 말했다. 눈을 빛내며.


“과찬이세요, 부인. 부인께 이런 칭찬을 듣다니 영광인걸요.”


“어머?”


로즈퍼드 부인이 부채를 살짝 펴 얼굴의 반을 가린 뒤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럴 만도 했다. 모르건 가문은 지금은 세가 약해졌다고 하나, 명문가였다. 그런 가문의 여식이 한낱 평민인 자신에게 저렇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녀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직위 높은 가문의 여자들은 그녀를 무시했지 저렇게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것도 왕족의 약혼녀가 될 여자가 아닌가? 레지스 마저도 부끄러워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사교계와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그였기에 클레어의 행동에 그저 놀라고만 있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었나, 하고 말이다. 로즈퍼드 부인은 빙긋 웃은 뒤 레지스에게 물었다.


“레지스 님.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클레어 양을 제 친구들에게 소개를 해도 될까요? 클레어 양에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어머? 정말요? 상냥하기도 하시지! 레지스. 갔다 와도 될까요?”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보낼 수 있을까? 레지스는 갔다 오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그의 심경으로써는 누가 옆에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 것 같으니까. 먼저 남에게 말을 붙이는 성격도 못되고. 클레어는 정말로 연회를 즐기러 온 것 같으니 자신보다는 로즈퍼드 부인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그들이 떠나자 레지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벽에 기대 물을 마신다. 술을 마셨다간 실수라도 하게 될까봐. 영락없는, 수도에 갓 상경한 시골 귀족같은 자신의 모습에 레지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짓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약혼할 분이 굉장히 권력 지향적인 분이시군요. 피곤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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