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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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
작품등록일 :
2012.11.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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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5.2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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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제 12막. 잊혀진 왕가의 이야기.

DUMMY







“가서 뭐하게?”


“몰라. 일단, 일단 가야겠다. 가면서 생각해보지.”


“흠. 그 전에 이걸 보고 가.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군.”


클라우스가 아까부터 잡고 있었던 종이를 그에게 던졌다. 한쪽 면은 새카맣게 석탄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새카만 배경 위로 하얀 글씨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이 종이를 대고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압력에 의해 글의 내용이 고스란히 종이에 찍힌 것.


무슨 글을 썼는지 알아보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인가? 아까 전부터 석탄으로 계속 이 종이를 칠했던 것은. 레지스는 클라우스를 바라보고는 다시 종이로 눈을 돌린다. 발신인은 클레어였고, 수신인은 모르건 가문의 주인이자 클레어의 아버지였다. 내용은 스쳐지나가듯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왕이 자신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다고. 지금의 왕비는 조만간 쫓겨날 지도 모르는 운명이라는 것과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레지스가 그를 망치려 하고 있다는 것.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배신.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서 대신관 데스마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만약 당신이 저 여자를 버리지 않는다면, 저 여자가 먼저 당신을 버릴 겁니다. 더 높은 지위의 남자를 얻게 된다면 말이죠.’


어째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런 일을 꾸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스마타가 어느 정도 관여가 되어 있느냐 라기 보다는 클레어가 자의로 자신을 배신하려 했다는 것이다.






* * *






무작정 성으로 왔건만 막상 오니 어디로 가야할지 헤매기 시작한 레지스는 일단, 아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찾자는 마음에 지난 번 도성에 왔을 때 그에게 아는 척을 한 하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 넓고 넓은 성에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중년의 사내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 사내의 이름도 모르고, 소속도 모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클라우스에게 도움을 청해서 같이 오든가 동행인을 데리고 오든가 할 것을. 주변을 흘긋거려 보니 하인들은 모두 저가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하긴, 그와 그의 형인 왕은 생각보다 닮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들 형제가 가진 검은 머리칼은 흔한 것이 아니니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벌써 왕의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가 성에 왔다는 사실을.


그래서 만일 왕이 그를 부른다면 어떻게 하지? 아니, 애초에 성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왕에게 따지기 위함인가? 자신의 약혼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함인가? 혹은 왕과 시시덕거리고 있을 약혼녀의 팔목을 잡아 채 거칠게 끌고 오기 위함이었나?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무대포로 성으로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어째서 다짜고짜 성으로 가겠다던 레지스를 클라우스가 멍청하게 바라봤는지도 깨달았다. 나쁜 자식.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알고서도 말하지 않고 일부러 가만히 둔 것인가?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클라우스는, 타인이 실수를 하기 전에 조언을 해줘서 방향을 틀게 한다고 하기 보다는 직접 겪게 놔두고 옆에서 비웃음으로써 다시는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녀석이니까. 즉, 아무 수확 없이 저택으로 갔다간 보나마나 클라우스에게 엄청난 비웃음을 들을 거라는 소리이다.


“레지스 님이신가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레지스는 흠칫 놀라 뒤로 몸을 돌렸다. 짙은 갈색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서 있었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꽤 검을 잡았던 그조차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 여자는 창백한 얼굴에 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눈매가 묘하게 클레어를 연상시키게 했다.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그녀 또한 미인이었다. 레지스는 자신이 그 여자를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레지스가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스스로를 그리 낮추실 필요 없습니다. 전 한낱 시녀일 뿐인걸요.”


여자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숙이자 레지스는 그제야 그녀의 차림새가 왕족들을 모시는 하인의 것임을 깨달았다. 얼빠져가지곤! 이 여자가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왕족인 자신이 시녀에게 스스로를 낮추는 꼴이라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레지스가 물었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왜... 아, 혹시 폐하께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래서 왕을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런데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왕비 마마를 모시는 시녀입니다. 마마께서 레지스님을 꼭 뵙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오늘 마침 폐하께 연통도 하지 않으시고 왕성으로 오신 것을 보고 이리 제가 접근을 한 것입니다. 그 점은 사죄드립니다, 레지스 님. 하지만 아시다시피 궁에서 마마의 입지가 워낙에 좋지 않으신지라... 이렇게 몰래 접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왕비의 입지를 말하는 시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궁에서 왕비의 편은 한 명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도 아닌가보다. 이렇게 왕비를 생각해주는 여자도 있었군. 적어도 이 넓은 궁에서 그것만큼 위안되는 것이 있을까?


그와 동시에 남편의 동생을 만나는 것조차 이렇게 가슴 졸여야 하는 왕비의 신세가 안타까웠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왕이 그토록 미워하는 왕비를 만나서 왕의 눈 밖에 나면 어떡하나 싶어서. 문득 그는 이토록 소심하게 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탁드립니다, 레지스 님. 마마를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마마는 태자 저하께서 그리 가시고 나서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굳이 만나려 하시지도 않으셨고요. 그런 분께서 만나고 싶다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인지라 그 분의 바람을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레지스 님.”


“저, 저는 사실 마마께서 왜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마마를 그렇게 내동댕이친 사람의 동생이 아닙니까, 저는?”


“만나 뵈면 풀릴 의문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마마께서는 그리 저하를 잃고 나서도 단 한 번도 폐하를 원망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진심으로 저하께서 그리 되신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시고 죄책감에 살아오셨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어 억지로 살아오신 것이나 다름이 없답니다. 그러니 부디...”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시녀가 부탁하자 레지스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부탁이라는데 안 들어주는 것은 너무한 것 같고, 그렇다고 만나자니 왕의 노기가 두렵다.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레지스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닥쳐올 두려움보다는 바로 앞의 연민이 더 우선이었던 것이다. 클라우스가 항상 답답해하던 성격. 그 성격이 비로소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깨닫고 레지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그랬다. 클라우스는 옳았다.


“가지요. 마마를 뵈러.”


그 말에 시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궁정식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분명 마마께서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 따르시지요.”


시녀가 앞서 걸어갔고, 레지스는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잘 된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하루 종일 왕궁을 배회하다가 힘이 빠진 채 저택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스의 비웃음을 듣고, 막 왕궁에서 돌아온 클레어의 냉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왕비를 만나 그녀를 위로해주면, 하루를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우스웠다. 한심했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한심해진 것일까, 자신은? 아마도 오른손의 상처가 생기고 난 후부터였을 것이다.


“상냥한 분이시군요, 레지스 님은.”


뜻밖의 말에 레지스는 눈을 깜빡이고, 앞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벙하게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옛날에 마마와 친했던 분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면, 하나같이 다 차갑게 거절하셨답니다. 본인들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안 것이지요. 폐하께서 그리 냉대하시는 마마를 뵈었다가 불똥이 튈까봐 말입니다. 아까 제가 부탁드렸을 때 레지스 님은 망설이셨지요. 적어도 마마를 만나 뵙고 난 후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겠죠. 그럼에도 마마를 뵙겠다고 하셨어요. 그런 분은 처음입니다. 특히 레지스 님은 마마를 뵌 적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상냥한 분이시지요.”


“제 입장이 난처해질 줄 알고서도 그런 부탁을 하다니. 그리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말하기 굉장히 죄스럽습니다만 이기적이시군요.”


“용서해주시길. 이런 말을 하는 순간에도 저는 마마의 안위를 가장 걱정하고,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말을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결국 마마께서는 레지스 님을 보고 기운을 차리실 테고, 저는 그것이면 족한 사람이에요.”


보기 드문 충심을 가진 여자였다. 왕을 모시는 귀족들 가운데에도 이런 충심을 가진 자는 드물다. 레지스는 순수하게 눈앞의 여자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이토록 굳은 심지를 가지려면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 이런 여자를 수하로 둔 왕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제야 레지스는 왕비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연민으로부터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 왕의 정비이고, 태자의 어머니였으며, 지금은 조롱의 대상이 된 여자. 그렇게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이런 여자를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여자.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 예.”


레지스는 여자의 부탁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왕성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인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었다. 스산하기까지 한 조용함에 레지스는 괜히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사람은 있었다. 죽은 표정을 한 채 걸어 다니는 시녀들이. 그녀들의 표정은 아까의 여자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까의 여자는 분명 성심성의껏 왕비를 모시는 충견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다른 시녀들은 창살에 갇힌 사형수들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한 나라의 왕비가 머물고 있었다. 이건 꽤...


“레지스 님?”


“예?”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톤이 올라간 목소리를 냈고, 여자도 자신도 눈을 깜빡였다. 여자는 싱긋 웃은 뒤 말했다.


“따르시지요. 마마께서 굉장히 기뻐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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