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사 사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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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저항
작품등록일 :
2014.04.07 14:59
최근연재일 :
2014.07.24 14:30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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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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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0,507

작성
14.04.22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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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정중사 사중정 -2(7).

DUMMY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얇고 가지런하게 정돈된 속눈썹은 소녀의 고운 얼굴과 조화롭게 뻗어있어 마치 봄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착각을 일으킨다.

아직 여물지 않은 나이임에도 쭉 뻗은 콧대와 도톰한 입술은 손으로 빚은 것처럼 완벽했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소녀의 얼굴을 반쯤 밝혀 신비로운 매력까지 더해졌다. 이변이 없는 한, 10년 쯤 후에는 절세미인으로 이름을 떨칠 게 틀림없어 보였다.

“으...음, 여, 여긴?”

일주일 째 쓰러져있던 판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내려왔으나 다시 뜨기를 반복하자 서서히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연결된 고풍스러운 천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김이 나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어 누군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목이 갈라지는 듯한 고통에 본능적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판령이 침대를 나와 일어섰다.

“일어났니?”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정파무림맹의 비성각주라고 소개했던 허윤이었다.

“윽....”

그를 본 순간, 깨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갑자기 혈도를 누르던 아버지의 심각한 표정,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자신을 끝까지 업고 달리던 오빠 등의 감촉,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허윤의 설명까지.

‘사도련.’

가족과 식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집단의 이름은 생생히 기억났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 이름이 떠오를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났다. 어쩌면 다시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아, 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분노와 원한, 살심이 무섭게 밀려 들어왔다.

그것은 너무 거대하고 강인해 판령의 가녀리고 약한 몸으로 감당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머리를 감싸 쥐고 한참을 괴로워하던 그녀는 고통이 서서히 가시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허윤이 자세를 낮춰 판령과 눈높이를 맞춘 후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직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반가운 마음에 들어왔단다.”

“괜찮아요.”

허윤은 판령의 이마와 손목을 짚어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양호한 건강상태를 확인한 허윤이 판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깨어나 줘서 너무 고맙구나. 목욕물을 준비해 놓았으니 씻거라. 밥은 그 연후에 먹자.”

“저기...."

“응?”

판령은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은 채 허윤을 불러세웠다. 그녀는 힘들어하면서도 강한 의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힘이 필요해요.”

“힘? 복수라도 할 생각이니?”

“네. ”

“안 된다. 그들은 너무 강하단다.”

허윤은 딱 잘라 거절했다. 할 말을 마친 그가 자세를 돌려 방을 빠져나가려 할 때,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은 판령이 충혈돼 빨개진 눈으로 쳐다봤다. 이를 악물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그녀는 간절하게 말했다.

“...죽여주세요.”

“뭐?”

“힘을 주지 않을 거라면 저를 죽여달라구요.”

“허....”

예상치 못한 판령의 행동에 살짝 당황했지만, 허윤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잘하면 잘 벼린 비수로 활용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도 판령의 활용 방안을 놓고 고민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제 발로 품에 들어와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제 오빠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아이 또한 혈의 흐름이 원활하고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신체를 타고났다.

게다가 배우려는 열망이 강하니 조금만 이끌어 준다면 재능은 알아서 꽃이 필 터. 만약 사도련주가 된 판극이 허튼 생각을 한다면 그의 등을 찌르는 건 이 아이가 될 것이다.

노련한 허윤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숨을 섞어 잠시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여준 그가 판령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령아야. 많이 힘들 게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을 것이며 여자로서의 삶은 대부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하겠느냐?”

끄덕.

한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판령에게 허윤은 다시 한 번 물었다.

“칼을 잡는 순간, 판씨의 성은 지워야 한다. 내가 너에게 가르칠 무공은 일인전승의 비전이라 외부인에게 함부로 전수할 수 없다.”

고민하느라 눈썹을 붙이며 말하던 허윤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렇지, 네가 내 딸이 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되겠구나. 또한 네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잡념을 비롯한 과거의 기억을 지울 생각이다. 이 대법이 성공하면 또래의 누구보다 성취가 빠르리라 장담한다. 선택은 너의 몫이야. 하겠느냐?”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판령이 마음을 굳히고 말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말하거라.”

“내가 기억을 잃더라도 사도련에 대한 원한은 되새겨주세요.”

“약속하마.”

대답을 들은 판령은 망설임 없이 절을 올려 부녀의 예를 갖췄다.

“소녀, 아버님을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래.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딸이란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됐다. 그렇게 하나의 인연을 끝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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