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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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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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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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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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연회(1)

DUMMY

그리하여, 피오네가 깨어난 지금.


이제는 성지를 떠날 때였다.


유논은 마지막으로 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는 쌔근쌔근 잠들어 있다. 하얀 솜이불을 덮고, 뒤척임 하나 없이 무섭도록 고요하게.


무심코 뻗은 손길이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이내 힘을 잃었다.


“···다녀오마.”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작별인사를 전한 뒤, 유논은 성큼성큼 침실을 나섰다.

문 밖에는 시드의 경호를 맡은 최정예의 이단심문관들이 지키며 서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피오네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끝내셨습니까.”

“끝내고 말고 할 것이 뭐 있나. 곧 다시 만나게 될 텐데.”


애써 여상스러운 투로 말하며, 유논은 손을 내밀었다.


“가지.”


피오네가 그 손을 맞잡는 것과 동시에, 구름이 해를 가린 듯 하늘이 어둡게 물들었다. 마법사의 손동작을 따라 검은 원의 형상이 일렁이며 공허의 문을 열어젖힌다.


[구멍─다리]


유논은 새카만 심연 속으로 발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내 손을 놓지 마라.”

“···!”


순간 무시무시한 흡입력이 몸을 빨아들인다. 유논의 형상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공간이동의 마법으로 장소를 옮길 것이라 미리 설명을 들었지만, 실제로 경험하게 되니 이보다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암흑으로 녹아든 마법사에 등 뒤의 까마귀들의 표정에서 미미한 경악이 엿보인다. 피오네는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뒤돌며 묵묵히 말했다.


“위험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저 소녀를 나와 같은 레벨로 경호하고 보살피도록. 믿고 맡기겠···.”


그러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영혼에 울림이 전해진다.


[안전하다. 넘어와라.]


그 말과 동시에 유논과 이어진 손이 팔을 끌어당겼다. 저항할 수도 없이, 어어 하는 사이에 시야가 급변했다.

당황한 이단심문관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피오네는 새카만 허공을 몇 번이고 굴렀다.


무언가 많은 일들이 일어난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눈 한 번 깜빡인 것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물기 축축한 돌바닥에 누워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뱉어낸 검은 공간의 구멍 앞에서 유논이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이곳은 지저도시의 야광 수로에 놓인 다리 아래쪽. 과거 그가 포식왕 카르발네스와 전투를 벌였던 장소였다.


“크···읍. 커억, 하악···.”


숨을 헐떡이는 피오네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자, 그제야 회복된 듯 정화교의 이단심판관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생전 처음 겪어본 공간이동의 소감이 어떤가?”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군요.”


장난스럽게 물어본 것에 한숨과 함께 대답하는 모습. 공간 멀미의 여파가 상당한 것 같았다.

하기야 저게 정상적인 모습이기는 했다. 처음 겪는다면 누구나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그 또한 저 정도까지 힘들어하지는 않았어도, 처음 이 마법을 성공했을 때에는 상당한 어지럼증을 느꼈었다.


물론 정화교 쉘터에서 [구멍─다리] 마법을 사용했을 때, 시드는 공간이동을 처음 겪어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아했었지만···.

그건 시드니까 그런 것이다. 태양룡의 피를 가장 짙게 이은 신의 후보를 다른 인간종들과 동일선상에 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거 안타까운 일이군. 조만간 또다시 겪게 될 텐데 말이야.”


시간이 촉박했다. 이동하는 데에 걷고 뛰느라 세월아 네월아 하며 허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이곳 지저도시까지 오는 데에도 마법을 동원한 것 아닌가.

마찬가지로 죽지 않은 자들의 땅 또한 마법으로 한 번에 움직일 생각이었다.


“···다음번에는 좀 후유증이 덜하도록 조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력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농담이나 나누고 있던 때였다.


스르륵─


어디선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멀미로 몸살 앓던 피오네는 등을 꼿꼿이 세운다. 곧바로 그녀의 주먹에서 새카만 건틀릿이 번쩍이며 형태를 갖췄다.


유논의 일격을 받아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후 시간이 지나 다시 재생된 흑색무장이었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도시의 수로였고, 수로에는 배들이 지나가는 법이니. 그리고 배에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당장 유논만 해도 지난번 지저도시를 방문했을 때, 수로를 지나는 곤돌라를 타고 포식왕 카르발네스를 추적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피오네가 저리 심각한 표정을 짓는 까닭은 단순히 누군가가 배를 타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누군가’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나 맡을 법한, 지독한 방사능의 향.


척 보아도 다가오게 놔두는 것이 이로울 리 없을 것 같다.


“···먼저 공격할까요?”


절로 그런 물음이 튀어나왔다. 전투에는 언제나 선제권이 중요한 법. 피오네는 벌써부터 저 정체불명의 적과 맞붙을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쉽사리 머릿속에 그릴 수가 없다. 스스로가 이길 것이라고 백 퍼센트 확실할 수 없었다.


‘지저도시에 이만한 변이 능력자가. 괜히 방사능의 아이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것이 아니었나···!’


잔뜩 긴장한 채 주먹 움켜쥔 피오네의 주위로 흑색 기파가 아롱진다. 본능적인 영역에서부터 발동한 무장의 공간감각. 금방이라도 곤돌라를 터뜨릴 것만 같다.

유논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진정시켰다.


“그럴 필요 없다. 아군이니.”

“아군···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접선하기로 했는데, 시간약속은 잘 지키는군. 하기야 지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지.”


그제야 전투를 앞두고 달아올랐던 머리가 가라앉는다. 피오네는 퍼뜩 떠올라 말했다.


“그렇다면 저 배 위의 인물이···.”


그랬다.

지저도시에서 피오네가 선명히 인지할 정도로 저만큼 강력한 오염된 마력의 향을 흩뿌리고 다닐 인물이.

정화교의 까마귀 왕이라 불리는 피오네가 승부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변이 능력자가, 유논과 하필 이곳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이번 작전의 아군이 달리 있겠는가.


가능한 후보는 한 명 뿐이었다.


방사능의 아이들 세 분파를 각각 지배하는 세 수장 중 하나.


현재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돌연변이라 일컬어지는 괴물.


스르르륵─


점차 속도를 줄인 곤돌라가 멈췄다. 분명 여러 명이 타는 배였을 것인데, 노를 젓고 있는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배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두건과 망토를 걸친 거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 동공에는 싸늘하고 위협적인 괴수의 붉은빛이 감돈다. 그 시선이 유논의 검은 눈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 피오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자가 바로 월드 이터즈의 대왕, 포식왕 카르발네스였다.


유논이 지난 일주일간 죽지 않은 자들의 암살 모의를 위해 각 세력의 수장들과 접촉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포식왕 카르발네스와 연이 있어 그를 통제할 수단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유논이 카르발네스에게 지는 그림은 상상할 수조차 없지만, 만약 이곳에서 돌연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래서 지저도시에서 분란을 일으켜 두더지들과 척을 지게 된다면,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면···.


염려와 의심 섞인 눈초리로 근육질 거한을 노려보던 때였다.


유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딜 꼬나보나.”

“···!”


지켜보던 피오네가 지레 놀라 당황했다. 아무리 저자를 통제할 수단이 있다고는 해도, 저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논의 모욕에 반응하는 카르발네스의 모습이었다.

잠시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저 호전적인 방사능의 제왕이!


“이번에도 사공을 죽인 것은 아니겠지.”


마법사가 자연스레 곤돌라의 앞에 앉으며 내뱉는 말. 포식왕은 으르렁대며 대답했다.


“네가 죽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대답을 그것보다는 공손하게 하는 게 이로울 텐데.”

“···그래서 배를 샀, 습니다. 적절한 가격···에 말입니다.”


세상에, 월드 이터즈의 대왕이 다른 누군가에게 어색한 존댓말을 사용하는 광경이라니.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벌린 피오네에게 유논이 소리쳤다.


“걱정 말고 타라! 어차피 정면으로 맞붙어도 이놈─널 못 이긴다. 별 것 아니니 겁먹을 필요 없어.”


고오오오···.


그 말에 수면이 떨렸다. 배가 거세게 흔들며 점차 가라앉는다.


다른 모욕은 참아도, 이번 것만큼은 도저히 가만히 넘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거한이 번뜩이는 붉은 안광과 함께 부풀어 오르는 근육으로 우렁차게 말했다.


[나를 도발하려고 했던 거라면, 보기 좋게 성공했다고 말해야겠군! 내가, 이 내가! 저 조금만 힘주면 내장과 살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얇은 여자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고도 네가···!]


흥분해 떨치는 성량에 폭풍 일듯 수로가 요동치던 와중, 돌연 거인의 눈동자가 거멓게 까뒤집어졌다. 감전당한 것처럼 전신을 덜덜 떨며 발작하는 모습에 피오네는 움찔했다.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포식왕의 머리, 정확히 두뇌 쪽에서 익숙한 마력의 향이 느껴졌다. 흑색무장과 똑같은 공간마력의 기척이었다.


“쯧, 그러게 공손하게 대답하라니까, 어디서 반말을 싸대고 있나.”

“···저자의 뇌에 마법을 거신 겁니까?”


그제야 조금이나마 감을 잡은 듯 물어오는 피오네. 유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저놈은 내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다. 거부했다가는, 지금 같은 상태가 되지.”


마력으로 직접 편도체의 통증 영역을 자극하는 가혹한 통제 마법. 지난번 지저도시에서 포식왕과 싸운 이후 놈을 길들이는 데 사용했던 목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다.


유논이 손을 휘젓자, 그제야 전신 핏줄을 터뜨리며 괴로워하던 카르발네스가 정신을 차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사이에 전보다 수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구부정한 모양새다.


“네놈한테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노나 저어라.”


입 하나 벙긋하지 못하고 순순히 굴종한다. 거대한 근육질 팔이 무색하리만치 벌벌 떨며 노를 휘젓자, 그제야 배가 다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유논은 천천히 움직이는 배 위에 올라탄 피오네에게 저 거구의 사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힘만 센 어린애,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네가 염려할 대상은 아니야. 감히 네 상대가 되기엔 너무 하찮은 존재다.”


천고의 인내 끝에 그가 직접 소환한 공간의 폭풍조차 견뎌낸 피오네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녀가 염려해야 할 대상은 저보다 훨씬 무서운 괴물들이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충직한 수하들까지.


총군사 윌리엄 스왈로우, 왕의 수호기사 데스나이트, 죽어 되살아난 신수···.


전부 목줄에 묶인 짐승 따위보다야 훨씬 위험한 존재들이다.


패배한 왕은 더는 왕이 아니기에, 피오네는 카르발네스 이외의 다른 왕들을 경계함이 마땅했다.


마침 지금 향하는 곳에도 왕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꽤나 많았으니···.


유논은 코웃음을 쳤다.


세상이 멸망하고 나니, 스스로를 왕이라 자칭하는 것들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왕들의 연회라, 하.”


가장 강력한 왕, 죽지 않은 자들의 왕.


그를 암살하기 위해 모인 각기 다른 왕들이 이곳 지저도시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이어서 다섯 편이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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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죽음에 관하여(3) +1 22.03.21 156 9 14쪽
257 죽음에 관하여(2) 22.03.21 173 9 13쪽
256 죽음에 관하여(1) +1 22.03.21 172 10 14쪽
255 피투성이 기억(4) +3 22.03.20 178 12 14쪽
254 피투성이 기억(3) +1 22.03.20 166 10 14쪽
253 피투성이 기억(2) 22.03.20 175 12 14쪽
252 피투성이 기억(1) 22.03.20 183 9 12쪽
251 검은 능선 전투(5) +1 22.03.19 192 11 17쪽
250 검은 능선 전투(4) +1 22.03.19 185 12 13쪽
249 검은 능선 전투(3) 22.03.19 189 10 15쪽
248 검은 능선 전투(2) +1 22.03.19 182 9 14쪽
247 검은 능선 전투(1) 22.03.19 176 10 12쪽
246 왕들의 연회(6) +1 22.03.18 194 13 13쪽
245 왕들의 연회(5) +2 22.03.18 173 11 14쪽
244 왕들의 연회(4) 22.03.18 181 13 14쪽
243 왕들의 연회(3) 22.03.18 191 11 13쪽
242 왕들의 연회(2) +1 22.03.18 191 12 14쪽
» 왕들의 연회(1) 22.03.18 193 13 12쪽
240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6) +6 22.03.17 226 17 13쪽
239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5) 22.03.17 200 14 13쪽
238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4) +1 22.03.17 196 13 14쪽
237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3) 22.03.17 207 13 15쪽
236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2) +3 22.03.17 226 16 12쪽
235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1) +18 21.08.01 567 24 13쪽
234 용은 어디에 있는가(5) +6 21.07.30 326 15 15쪽
233 용은 어디에 있는가(4) +4 21.07.28 305 17 13쪽
232 용은 어디에 있는가(3) +4 21.07.26 307 15 13쪽
231 용은 어디에 있는가(2) +3 21.07.24 318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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