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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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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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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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능선 전투(1)

DUMMY

잠깐 졸았었던 모양이다.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었었나.


가끔은 잊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몸이 되고서도, 생리현상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때를 맞춰 찾아온다.


이럴 때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어땠을까. 왜 죽지 않았을까.


가신들이 알았더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상념이었다. 눈치 빠른 윌리엄이 곁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아무리 지극정성이라도, 자는 와중에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딘가 외로운 감각이 반쪽의 뼈를 달궜다.


“······.”


이쯤이면 되었다. 인간적인 사고는 끝이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눈을 떴다.


실로 오래간만에, 옛적의 꿈을 꾼 것 같았다. 정체 모를 끈적한 이물감이 눈가를 맴돌아 불쾌했다.


악몽이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라지만, 과거는 잔상처럼 남아 현실을 따라온다.


공기가 서늘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시체들의 썩은 향이 코를 찌른다. 음울한 보랏빛으로 장식된 해골들이 왕의 의지를 따라 대전을 밝혔다.


차가운 손발을 옥좌로부터 밀어낸다. 죽지 않은 왕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천천히 내려와 맨발로 땅을 밟았다. 바스락거리는 감촉과 함께 기지개를 키자, 석상처럼 무릎 꿇으며 열을 맞추고 있던 죽음의 기사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왕을 지키는 기사단. 그 선두에는 유난히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는 한 기사가 묵묵히 서 있었다.


생전에는 기사왕騎士王이라 불리던 자다. 저 제국의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조차 한 수 뒤쳐진다 일컬어지던 환상세계 제일의 검사.


죽음 이후에까지 지속되는 그의 세계를 향한 헌신에는 항상 감사함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시장하군.”


정확히는 공허했다. 뱃가죽뿐만 아니라 전신 구석구석이 텅 빈 것 같은 감각이었다.


멍하니 중얼거린 소리에, 죽음의 기사가 반응했다.


[모실까요.]

“아니, 식사는 나중에. 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윌리엄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던가?”


그 물음에 데스나이트의 갑옷 사이로 푸른 귀기가 번쩍인다. 죽어서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진 기감으로 사자성 전체를 훑어보고 있는 것이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맞습니다. 그가 보낸 연락이 있군요. 그가 폐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지. 내가 없으면 그 혼자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할 거야.”

[신수를 타고 가시겠습니까.]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멈칫한 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엄이야 살겠다만···요즘 들어 통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더군. 겨울잠이라도 자는 모양이야.”

[불경한 파충류로군요.]

“내버려두게. 변온동물이지 않나. 추위에 예민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말 한 필이면 족하네.”


그 말에 죽음의 기사는 곧바로 뼈로 된 말 한 기를 몰고 왔다.

고삐도, 박차도 필요 없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이 말의 배에 손을 대자마자, 내부가 보랏빛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이 순간, 왕은 말과 하나가 된 것처럼 공감하고 있었다. 죽어서조차 달리고 싶어 하는 군마의 마음을 읽는다.


“다행히도 이뤄줄 수 있는 소망이로다.”


한 번의 도약만으로 안장 위에 앉는다.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이, 말이 알아서 힘차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왕에게 기름부음 받은 말은 그 자체로 이미 괴수나 다름없다. 바람을 가르고 대지를 짓밟으며 나아가는 감각, 그 쾌속하고 파괴적인 질주.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저 평원 위 끝없이 이어져있는 사자들의 군대 사이를 지나치며 지휘 막사로 향했다. 아음亞音의 속력으로 쏜살같이 달린 덕에 도착은 금방이었다.

그의 뒤에는 마찬가지로 왕의 보랏빛 오오라를 휘감은 죽음의 기사단이 따라오고 있는 채다.


세계 제일의 무력을 지닌 기사단이 파괴적으로 모든 것을 휩쓸고 나아가는데도, 무리지은 군대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서로의 감각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찾은 결속은 군대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막사 앞에서 콧김 뿜는 해골마 아래 내린 왕을 마중 나온 것은 총군사, 윌리엄 스왈로우다.


“폐하.”


무릎 꿇은 그를 무심히 손짓해 일으켜 세우며,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말했다.


“그래. 방사능의 아이들과 제국주의자, 그리고 지구숭배자 세력의 연합이라고.”


현장에 직접 나와 전두지휘하고 있던 윌리엄 스왈로우조차 방금 막 정찰대에게 보고받은 소식일진데, 왕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놀랄 일도 아니다. 윌리엄 스왈로우는 당연히 제 주군이라면 그쯤은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대왕은 세계가 배출한 최강의 네크로맨서, 모든 죽지 않은 것들의 지배자였다.

사자들의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자왕의 감각 아래에 있으니, 그를 속이기란 불가능하다.


“예. 최근 들어 공세가 뜸해진 것이,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구나 싶기는 했습니다만···제 예상보다 훨씬 은밀하게, 또 쾌속하게 움직인 모양입니다. 어떤 마술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진형을 갖추고 영토로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막을 수 있겠나.”


다른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신하들이라면 분골쇄신하여 어떻게든 막아내겠다고, 안 되도 되게 하겠다고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윌리엄 스왈로우는 달랐다. 그는 충성스러우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전황을 볼 줄 아는 인재였다. 사자왕이 그를 믿고 기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슬아슬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쉽지 않은 전쟁이 될 듯합니다.”

“우리가 방어하는 쪽임에도?”


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는 세상에서 가장 수비전에 능한 세력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 몸처럼 이어지는 유기적인 대군으로, 죽은 것들만이 가득한 영토에서 행하는 밀도 높은 방어인 것이다.

단순히 군대뿐만 아니라, 영역 전체가 적들에 맞서 싸운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시체들이 보급을 끊고, 습격을 감행한다. 죽은 자들은 군세의 일원이 되어 산 자들을 공격한다.

끝없이 자원이 갈려 나가는 최악의 진형, 난공불락의 지대다.


지구숭배자들이 아무리 많은 고화력의 무기들을 쏟아 부어도 군세가 지키고 있는 게이트 하나를 뚫어내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사자왕은 군세가 방어하는 측임에도 전황이 불리하냐고 묻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능히 막아낼 수 있겠다 대답하겠습니다만···적들도 이번 공세에는 사활을 다할 것 같습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끔 비밀리에 군대를 진군한 것도 그렇고, 무려 세 세력이 한꺼번에 연합을 한 것도 그렇고···수상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믿는 구석 하나 없이 저러지는 않겠죠. 지구군의 사령관 토마스 킴이 그만큼 멍청한 사내는 아닙니다. 오히려 냉정한 전략가이죠. 그의 성향대로라면, 무언가 비장의 한 수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 비장의 한 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예. 송구하오나, 아직까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분명 확신이 있어서 쳐들어오는 것일 텐데···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일지, 제 창의력만으로는 한계를 느낍니다.”


그 말에 죽지 않은 자들의 왕 또한 곰곰이 생각에 빠진다. 윌리엄 스왈로우는 그에게서 번뜩이는 직관이라도 기대하는 것인지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왕이지 천재적인 전략가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뿐이었다.


“지구 것들의 본토 쪽에서 새로운 무기를 개발했는지도 모르겠군. 혹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다른 방향일지도 모를 노릇이고···그러나 어느 쪽이건 상관은 없다.

적들이 지닌 비장의 무기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지 못하는 부분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적들의 동향에 계속해서 귀를 기울이고, 방어에 전력을 다하도록.”

“알겠습니다.”


윌리엄 스왈로우가 고개를 넙죽 숙인다.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그런 그의 뒤에 서 있는 언데드들─뱀파이어 토미, 죽음의 기사 돌쇠 등등의 호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제국주의자들이라. 자립이 불가능한 세력이니 지구 측에 붙어서 어떻게든 기생해 보려는 심사를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그들은 본디 지구숭배자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아니었나?”

“저도 그리 여겼습니다만, 이번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수뇌부에서 파격적인 결단을 내린 듯합니다. 제국제일검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의 실종 이후로, 무언가 변화를 결심했나 보지요.”

“위협이 되겠는가?”


윌리엄 스왈로우는 답했다.


“파빌리안 스트라우스가 건재하다면, 그의 실종 사실이 우리를 기만하기 위한 술책이었다면···예. 위협이 됩니다. 상당한 위협이 되겠지요.”

“그가 정말로 실종되었거나, 죽어서 전쟁에 개입할 수 없는 처지라면?”

“그렇다면 당연히,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옛 제국 기사들의 실력이 출중한 수준이라고는 하나···그들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변두리에만 머물러 있었지요. 마력을 잃고 나이가 들었으며, 신체는 퇴보하고 의욕마저 잃었습니다.”


반면 죽음의 기사들은 노화를 겪지 않는다. 그들은 생전의 신체 능력 그대로, 지구숭배자들의 군대와의 끝없는 전투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은 최고의 정예들이다.

윌리엄 스왈로우는 그의 산하 죽음의 기사단이 제국의 기사들을 말 그대로 박살낼 것이라는 데에 천금도 더 걸 수 있었다.


“그대는 어느 쪽이 더 가능성 높다 생각하나?”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래.”


파빌리안 스트라우스는 건재한가, 혹은 추락했는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는 세간에 퍼진 소문이 사실에 근접했다고, 파빌리안 스트라우스가 분명히 죽었다고 봅니다.”

“이유는?”

“마지막으로 목격된 바에 의하면, 그는 독기의 골짜기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졌습니다. 흑색의 마법사 유논, 그리고 그의 일행과 함께 말입니다.”


흑색의 마법사. 그 명칭에 사자왕이 움찔한다. 윌리엄 스왈로우는 두 눈을 지긋이 감는 대왕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흑색의 마법사, 그의 제자인 시드가 우리가 파악한 정보대로 정말 제국의 순수 혈통이라면···제국제일검은 분명 신혈을 찾기 위해 흑색의 마법사와 전투를 벌였을 겁니다. 사이좋게 하하호호 웃으며 독기의 골짜기를 빠져나왔을 확률은 전무하다고 봐야 하겠지요.”


잠시 뜸을 들인 뒤, 단언한다.


“그랬다면, 파빌리안 스트라우스는 흑색의 마법사에게 살해당했을 겁니다. 그럴 확률이 굉장히 높다고,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가 독기의 골짜기 위, 정화교 쉘터에서 흑색의 마법사의 일행과 함께했을 때도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으니, 독기의 골짜기에서 흑색의 마법사와 전투를 벌이고 패배했다 보는 것은 꽤나 합당한 추론이었다.


더군다나 파빌리안 스트라우스의 실종 이후 제국의 대외 정책까지 바뀌고, 이렇듯 파격적인 참전까지 행했으니.

모든 정황이 그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예 가능성을 배제하고 방심할 수는 없겠지만, 파빌리안 스트라우스라는 한 존재의 위험성 때문에 기존의 전략이나 전술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윌리엄 스왈로우의 설명에 죽지 않은 자들의 왕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 방사능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군세를 공격할 만한 여력이 있었던가?”

“그것이, 본디 대외적으로 앞에 나서 있었던 포식왕의 분파 말고, 본토 방어에 전념하던 마왕의 다크 워셔가 전면에 나서 돌격해오는 모양입니다.”

“그 정신 능력자 말인가? 정화교의 반응은?”


본디 정화교와 죽지 않은 자들의 군세는 우방 관계다. 대놓고 공표한 우방까지는 아니어도, 암암리에 서로를 도와주는 형편이었다.


작가의말

이어서 네 편이 더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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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드래곤 사냥(1) 22.03.22 166 9 13쪽
259 죽음에 관하여(4) +1 22.03.21 166 10 13쪽
258 죽음에 관하여(3) +1 22.03.21 154 9 14쪽
257 죽음에 관하여(2) 22.03.21 173 9 13쪽
256 죽음에 관하여(1) +1 22.03.21 171 10 14쪽
255 피투성이 기억(4) +3 22.03.20 178 12 14쪽
254 피투성이 기억(3) +1 22.03.20 166 10 14쪽
253 피투성이 기억(2) 22.03.20 175 12 14쪽
252 피투성이 기억(1) 22.03.20 183 9 12쪽
251 검은 능선 전투(5) +1 22.03.19 192 11 17쪽
250 검은 능선 전투(4) +1 22.03.19 185 12 13쪽
249 검은 능선 전투(3) 22.03.19 189 10 15쪽
248 검은 능선 전투(2) +1 22.03.19 182 9 14쪽
» 검은 능선 전투(1) 22.03.19 176 10 12쪽
246 왕들의 연회(6) +1 22.03.18 194 13 13쪽
245 왕들의 연회(5) +2 22.03.18 172 11 14쪽
244 왕들의 연회(4) 22.03.18 180 13 14쪽
243 왕들의 연회(3) 22.03.18 191 11 13쪽
242 왕들의 연회(2) +1 22.03.18 189 12 14쪽
241 왕들의 연회(1) 22.03.18 192 13 12쪽
240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6) +6 22.03.17 225 17 13쪽
239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5) 22.03.17 200 14 13쪽
238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4) +1 22.03.17 194 13 14쪽
237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3) 22.03.17 206 13 15쪽
236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2) +3 22.03.17 224 16 12쪽
235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1) +18 21.08.01 566 24 13쪽
234 용은 어디에 있는가(5) +6 21.07.30 326 15 15쪽
233 용은 어디에 있는가(4) +4 21.07.28 305 17 13쪽
232 용은 어디에 있는가(3) +4 21.07.26 305 15 13쪽
231 용은 어디에 있는가(2) +3 21.07.24 318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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