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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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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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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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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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2)

DUMMY

눈과 바람이 스치는 사이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너를 보고 있자면, 어딘가 먼 곳에서 떠나온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어.’


샤를로트.


그리고 그 바깥의 딱딱한 말투.


‘너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갈 것만 같다.’


니샤르.


전부 그의 인생 중간에 큼지막한 방점을 찍은 여인들이었다. 아직까지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를, 그들과 헤어졌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순간들이었다.


그들이 속삭이길, 그는 머나먼 행성에서 잠시 표류한 것만 같다고.

언젠가는 이곳 환상세계를 떠나, 그들의 곁을 떠나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만 같다고, 그랬다.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그들의 곁을 떠난 것도 맞았고, 환상세계를 떠났던 것도 맞았으나, 결국은 돌아왔음으로. 어느새 그에게 고향은 이곳 망가진 세상이 되어버렸음으로.


돌이켜보면,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떠나는 쪽이었다. 기다리는 쪽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이들의 애달픈 심정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심정을 안다.


피오네가 성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지금, 시드가 용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지금···.


그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갈 것만 같은’ 소중한 이를 지켜보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가 어째서 끝내 그들과 이어지지 못했는지.


“······.”


괴로움을 접어두기 위한 다른 잡념을 떠올리고자 한다. 영원한 기다림, 시간을 잡아당겨 늘린 것만 같은 그 초조한 무료 속에서···.


그는 얼마 전에 만났던 도마뱀 중개상, 인간이 되어버린 빛의 신수를 기억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일화가 있었다.


최후룡이 오래된 비밀, 잊힌 옛 시대의 역사라며 대수롭지 않게 알려주었던 용들의 기원.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서 용들이 깨어났다. 전능한 마나의 위력으로 그들은 천지를 창조했고, 생명들을 싹틔웠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의 굴레가 지나가고 나니, 지성체들이 등장했다.

인간, 오크, 엘프, 수인···.


그들의 곁에 함께하는 용들은 그들과 동화되었다. 필멸하는 생명들을 위해 신들끼리 치고 박고 싸웠다.

그리하여 화려한 전쟁을 벌이던 자들은 전부 저 멀리 천공으로 승천하고, 중립을 유지하던 자들만 지상에 남아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으로 세상을 지켰다.


그리하여 마지막 남은 것이 최후룡, 백색의 알렉시오스였다.


그리고 이름 모를 빛의 신수는 용의 창조물이니···창조주들의 이력을 그대로 따라가기라도 한 듯했다.

인간들과 함께하다 인간에 물들어버린 신수. 전설 속 미물들과 명운을 함께한 용들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지 않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본 역사는 어리석고 또 우스웠다. 필멸자들을 위해 불멸을 바친 신들이라니. 창조물을 위해 서로를 죽고 죽인 창조주들이라니.


그러나 결국은 그 우스운 역사 덕에 시드가, 그녀의 가문인 카라얀이 있을 수 있었다.


수많은 용신들이 인류, 엘프, 드워프, 오크···수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대전쟁 못지않은 파괴와 창조의 연속을 벌였고, 그 끝에 마침내 등장한 승자, 세상 단 하나의 유일신이 있었다.


태양룡, 초대 황제 멜로디우스 마그누스 폰 카라얀.


시드의 기원은 어쩌면 거기에서부터였다.


어리석게도 인류를 위해 완전무결한 신성을 져버린 용.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이 되었고, 혼란한 대륙을 정복한 후 다시 천상으로 승천했다는 전설.


그가 인간계에 남긴 핏줄이 대대손손 이어져, 가끔은 흐려지기도 하고 가끔은 진해지기도 하다가─당대의 태양, 엘리자베스 시드 카라얀에게로 이어졌다.


신의 유전자를, 그 강력한 초자연적 형질을 가장 짙게 물려받고 태어난 아이. 공간과 시간을 볼 줄 알았던 샤를로트가 낳은 아이.


차원을 넘고 세상을 재생할 자질을 타고난 차세대 신의 씨앗. 그리하여 시드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멸망을 목전에 둔 세상이 또 다른 태양신을 원했던 것이다. 용과 우주가 합심해 세계를 구원할 인재를 낙점해 놓았던 것이다.


그녀가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건 시드일 터였다.


아이러니했다.


참으로 오래전, 그는 스스로가 주인공이라 생각했었다. 이제는 버린 지 오래된 낡은 고집이지만, 한때는 그랬던 적이 있었다.

내가 이 낯선 환상세계에 떨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내가 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곤 했었다.


그러나 순전히 착각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두 차원이 영겁의 세월에 걸쳐 아주 드물게 마주치며 생겨난 사고였다.


차원이동에는 아무런 숨겨진 목적도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표류자, 낙오자, 방랑자에 불과했다.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세상의 신이라는 알렉시오스에게 확답을 들은 바 있던 사실이었다.


스스로가 주인공이라 굳게 믿었지만 결국은 주인공이 아니었던 사내.

세상을 바꾸고자 마음먹었던 것을 포기하고서야 본의 아니게 진정으로 세상을 바꾼 남자. 멸망에 일조한 마법사.


그런 그가 세상의 진짜 주인공과 마주쳐 그녀의 스승이자 보호자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허무가 감돈다.


명색이 흑색의 마법사면서, 명색이 차원을 뛰어넘은 나인 서클의 대마법사이면서 제자에게 일어나는 일 하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백룡이 세운 계획을, 시드의 신체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신적인 화학작용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다만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리하여 지금까지 오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결국 그는 또다시 손쓸 수 없는 세상의 움직임 앞에 소중한 것을 잃을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 허무하다.


그리고 동시에 희망이, 오기가.


백룡이 끝까지 그를 계획의 자그마한 일부로밖에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에, 치명적인 변수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에 오기가 흘렀다.


그게 동시에 희망이었다.


세상이, 백룡이, 그들이 설계한 주인공의 미래에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함은 그에 대한 대비책도 불충분했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그가 세상보다 시드를 우선시하는 경우를, 세상을 망가뜨리고 나서는 또 재생까지 방해하려는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면, 그의 존재가 저 신적인 영역의 예상 밖에 있었다면.


“···예상 밖의 일격을 날리기에 딱 좋은 상황일지도 모르지.”


입김을 뿜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흐리게 빛을 잃은 동공 너머로 눈발이 세차게 지나갔다. 머리칼이 미친 듯 휘날리고 바람소리가 어지럽게 귓가를 찌르는 와중이었다.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


고개를 들었다.


우연처럼 그녀가 눈앞에 있었다.

새하얀 눈송이 곳곳에 묻어있는 하늘색 머리칼, 눈 내리는 밤에 더욱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 가슴이 시렸다.


시선을 돌리자, 백색 성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굳건히 닫혀 있었던 성소 아타락시아가 여인의 명을 따라 그의 출입을 허가한 것이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찔렀다.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였다. 유논은 침묵하며 저 투명한 동공을 마주보다 입을 열었다.


“새 옷이 잘 어울리는군.”


인사치레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빈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잘 어울렸다.


푸른 여인이 걸친 것은 검과 흑이 뒤섞인 정교한 문양의 고위 사제복이었다. 청량하면서도 차갑고, 딱딱하면서도 아름답다. 어딘가 가까이하기 힘든 머나먼 향기가 났다.

성녀가 있다면 이리할까.


황야에서 일개 흑색 전투사제, 까마귀들의 옷을 입고 함께 구르던 때와는 다른 태가 났다. 그러나 피오네는 여전히 피오네였다. 눈빛만 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지위가 달라져도, 겉모습이 달라져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만날 때에는···.”


유논은 홀로 마법사를 맞이하러 나선 피오네, 그리고 그 뒤에 눈 쌓인 밤을 배경으로 줄지어 도열해 있는 검은 그림자의 부대를 눈짓하며 물었다.

하나같이 형형한 기세를 뿜어내는 변이 능력자들, 교단이 양성한 전장의 까마귀들이 피오네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무릎 꿇고 있었다.


“···이단심판관장이 되어 있겠다고 했던가.”


지난날의 대화, 정화교 쉘터의 경계에서의 이별을 상기하며 건네는 질문이었다.

분위기를 풀려고 꺼낸 말이었으나, 피오네는 되레 난감한 기색이었다. 볼을 붉히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여인은 바다를 닮은 빛으로 언제나처럼 딱딱하게 말했다.


“아직은 일개 이단심판관입니다.”

“그런가?”


의외였다. 이단심문관이었던 이전에 비하면 승진한 것이기는 하나, 부족하지 않은가.


아무리 피오네가 전장에서 날뛰던 이단심문관들의 수장, 까마귀들의 왕이라 대우받는다고는 하지만 뚜렷한 지위 없이 그것만으로 저 많은 정예 돌연변이들을 전부 수족으로 부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인데.


그리 생각했으나, 뒷말을 듣고는 곧바로 잡념이 시원해졌다.


“예. 자리를 이을 예비 심판관장으로서 여러 업무들을 맡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면 그렇지. 예비 이단심판관장이라 당당히 말할 수 있을 정도면 이미 현직 심판관장의 업무를 대부분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아직은 나이가 어리고 성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위 상승이 지나치게 빠를 시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사리고 있는 것일 뿐.


실질적인 직책이나 능력은 이미 이단심판관장, 정화교의 삼대 권력 기관 중 하나의 중추라 보아도 되는 것이다.


“얼마 안 걸릴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 사실을 알기에, 유논은 농담조로 내뱉었다. 피오네 또한 그 의미를 알기에 가볍게 받아친다.


“기한이 그리 촉박할 줄은 몰랐습니다. 심판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하기야 따지고 보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수확의 계절에 헤어져 역경의 계절에 재회했으니. 끽해야 몇 달 정도였다.

어딘가 아련하고 그리운 감정과 대단한 회포가 싹트기에는 부족한 간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면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간은 짧지만, 거친 일들은 꽤나 많았다.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다.


황야에서의 변종 미어캣들과의 조우, 지저왕자와의 만남, 지저도시 입성, 포식왕과의 전투, 지저대왕과의 만남, 고블린과 그레이트 데스웜과의 전투···기타 등등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이 연달아 펼쳐졌다.


단순히 행선지만 따져도 지저도시, 황도 카라얀, 용의 유언을 받든 신수의 처소.

굵직굵직한 장소들, 세상의 명운이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곳들만 다녀왔다.


그 짧은 몇 달 간을 꽉꽉 압축해서 지나왔기에 정신적인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기분 좋은 성공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직까지는 질척한 실패의 늪을 빠져나오는 과정에 불과했다.


“나에게는 꽤나 길게 느껴졌는데 말이지, 그간의 시간이.”


얼핏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으나, 피오네는 그 속의 행간을 읽었다. 마법사의 어두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제게 마법으로 전하신 내용을 들었습니다. 함부로 남에게 도움을 요청할 분이 아닌데, 정말 큰일이 일어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보니,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피오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빛 눈동자로 물었다.


“···시드는 어디에 있습니까?”


언젠가는 나올 질문이었다. 언제나 함께 다니던 스승과 제자였거늘, 이번에는 홀로였다. 시드가 없어진 채 보이지 않았다.

소녀와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정화교의 심판관으로서는 무언가 변고가 일어났구나,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논은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염치가 있어 용의 손아귀로부터 제자를 지키지 못했다고 속 시원하게 밝히겠는가.


그러나 언젠가는 대답해야만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 당장 본론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시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유논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거다.”


작가의말

정말...많이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이어서 네 편이 더 올라갑니다. 자세한 작가의 말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6)에 적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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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드래곤 사냥(1) 22.03.22 167 9 13쪽
259 죽음에 관하여(4) +1 22.03.21 166 10 13쪽
258 죽음에 관하여(3) +1 22.03.21 155 9 14쪽
257 죽음에 관하여(2) 22.03.21 173 9 13쪽
256 죽음에 관하여(1) +1 22.03.21 171 10 14쪽
255 피투성이 기억(4) +3 22.03.20 178 12 14쪽
254 피투성이 기억(3) +1 22.03.20 166 10 14쪽
253 피투성이 기억(2) 22.03.20 175 12 14쪽
252 피투성이 기억(1) 22.03.20 183 9 12쪽
251 검은 능선 전투(5) +1 22.03.19 192 11 17쪽
250 검은 능선 전투(4) +1 22.03.19 185 12 13쪽
249 검은 능선 전투(3) 22.03.19 189 10 15쪽
248 검은 능선 전투(2) +1 22.03.19 182 9 14쪽
247 검은 능선 전투(1) 22.03.19 176 10 12쪽
246 왕들의 연회(6) +1 22.03.18 194 13 13쪽
245 왕들의 연회(5) +2 22.03.18 173 11 14쪽
244 왕들의 연회(4) 22.03.18 181 13 14쪽
243 왕들의 연회(3) 22.03.18 191 11 13쪽
242 왕들의 연회(2) +1 22.03.18 190 12 14쪽
241 왕들의 연회(1) 22.03.18 192 13 12쪽
240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6) +6 22.03.17 225 17 13쪽
239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5) 22.03.17 200 14 13쪽
238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4) +1 22.03.17 195 13 14쪽
237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3) 22.03.17 207 13 15쪽
»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2) +3 22.03.17 224 16 12쪽
235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1) +18 21.08.01 566 24 13쪽
234 용은 어디에 있는가(5) +6 21.07.30 326 15 15쪽
233 용은 어디에 있는가(4) +4 21.07.28 305 17 13쪽
232 용은 어디에 있는가(3) +4 21.07.26 305 15 13쪽
231 용은 어디에 있는가(2) +3 21.07.24 318 1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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