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풍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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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송담(松潭)
작품등록일 :
2007.06.26 18:12
최근연재일 :
2007.06.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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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2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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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강호풍운록(맹주 盟主 8)

DUMMY

연휘의 행보는 빨랐다. 소혜와 논의를 거치고 난 뒤 팽완과 검마 그리고 유택만을 대동하고 무맹이 있는 정주로 향한 것이다. 남궁기는 하륜을 따라서 운남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문도들이 운남으로 돌아갔으며 광도가 백인대 셋을 데리고 홍구로 떠났다.

무맹까지는 빨리 잡아도 열흘은 걸리는 거리였다.

부지런히 달려가는 와중에 사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벌써 폐관을 마친지도 한 달이 넘었구나...”

“사부님, 다시 폐관에 들까합니다.”

폐관에 들겠다는 연휘를 사부는 인자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말이 나올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괜찮다.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이니 너무 조급해 할 것 없느니라. 수없이 많은 무인들 중에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 한 시대에 결코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이야. 그러니 너무 집착하려는 생각은 금물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마지막 경지는 불현듯 찾아오게 될 것이야. 그 때가 언제 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 그렇다고 막연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결코 찾아오지 않겠지. 차분히 그리고 수시로 궁리하고 또 궁리해야 하느니라.”

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손자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사물을 구분하기도 전에 부모를 잃은 연휘다. 사람들 사이의 정이 무엇인지 확연히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부가 자신에게 쏟는 각별한 사랑은 사제관계를 떠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대하는 그런 정이었다.

“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궁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바람도 미풍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라... 허허.”

현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불쑥 나온 말이라 하기에는 지닌바 뜻이 결코 가볍지 않은 듯싶었다. 연휘가 사부의 말을 되 뇌이고 있었다.

사부가 변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랐다. 허나 사부의 장난기가 없어졌다는 것을 연휘는 알고 있었다. 사실은 장난기가 아닌 치매였지만 연휘는 굳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의 감정을 보여주던 사부였다. 말투며 행동 같은 것들이 꼭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치매라 부를 이유는 없었다. 연휘는 장난기라고 표현했다.

그런 사부의 아이와 같은 치기(稚氣)가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모습은 신선의 풍모에 어울리는 말투요 행동이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연휘는 왠지 불안했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인 것이다. 폐관에서 나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난 때였다.

“꽤 오래전에 이곳을 찾았던 이가 있었느니라. 대단한 젊은이였지. 삼년 정도를 같이 생활했던 것 같구나. 일부러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연기의 기본 운용법은 깨우쳤을 게야...”

그렇게 시작된 사부의 긴 얘기가 끝났을 때 불현듯 연휘는 예감했다. 사부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막연했던 불안감의 원인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프지도 않았고 오히려 젊은이들 보다 더 활력이 있던 사부였다. 아직도 정정한 모습이었지만 뭔가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보였다.

해주고 싶었던 얘기들이 많았던 사부였나 보다. 이번의 얘기는 전혀 달랐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휘야, 세상은 두루두루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너는 세상에 나가 이것도 보고 저것도 경험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해라.

무도를 추구하려 하지 말고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라. 모두가 잘못 된 길을 간다 하더라도 자신만큼은 올곧은 길을 가기 위해 힘써야 하느니라. 올곧음에 대한 것은 결코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타인의 삶에 비추어 생각하도록 해라.

모든 다툼은 서로의 이익과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남과 다툼이 생기게 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다퉈야 할 것이니라. 자신에게는 분명히 상대가 잘못 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음이니라.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남을 핍박 하는 자들을 경계하여야 하느니라. 그런 자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힘들어 지는 법이니, 그때는 머뭇거리지 말고 약자를 위해 힘을 쏟아야 하느니라.

항상 스스로를 갈고 닦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스스로에게는 절대 엄격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며 남에게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강호에 들어서게 되면 그를 찾아 가도록 해라. 올곧은 성정을 가진 참으로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부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도록 해라.”

조용히 눈을 감으시는 사부였다. 생각을 정리하시는 듯싶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연휘였다. 허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사부의 기척을 살펴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어언 일각쯤 지나서였다.

호흡이 멈췄다. 말씀하시던 온화한 표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저리 생생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 사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서야 연휘는 일어났다. 절을 올리고 사부의 시신을 수습했다. 절차와 상관없이 최대한 정성을 쏟아 양지 바른 곳에 안장해 드렸다. 그리고 석 달을 머물렀다.

정리를 하고 무맹까지 오는 동안 그에 대해 수소문을 했다. 허나 그의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막막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강호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무맹에 들게 되었다. 정보가 많이 모이는 곳이란 말을 들은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끝내 알 수 없었다.

사부께서는 그에게 자연기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그것을 수련하기 위해 폐관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무맹의 생활에 젖어들었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그를 잊고 있었다.

이제야 그를 찾았다. 벌써 십년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연휘가 무맹으로 향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시대를 바꾼 거인이었다.

그를 보고 싶었다.

연휘의 신형이 갈수록 빨라지며 앞으로 죽죽 나아갔다.


제갈문을 비롯한 각료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아쉬움을 달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이제 이런 생활을 언제나 다시 하게 될 지 알 수 없었던 그들이었다. 잘못 된다면 오늘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고 그나마 잘 풀린다면 이곳을 벗어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터였다.

신분을 드러내놓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최소한 검왕이 실각(失脚)할 때까지는 숨어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현재 상황으로 본다면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이라면 그나마 떵떵거리는 삶을 영위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권력을 쥐고 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이기는 했다.

“후다다다닥!”

“전주님! 전주님!”

머뭇거리는 그들의 눈에 그런 것들로 인한 안타까움이 가득한 그때였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수하 한 놈이 정신없이 제갈문을 불러댔다.

“웬 호들갑이냐! 지금 분위기를 알고도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수하는 제갈문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게 말입니다. 전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모용강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느냐!”

“헉! 어찌 아셨습니까!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지금 다급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것 외에는 없었던 까닭에 제갈문이 입에 담았던 것인데 수하 놈은 화들짝 놀라버렸다.

“정말 모용강이 왔다는 말이더냐!”

“예, 그렇습니다. 지금 장원은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무인들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할 만큼 사람들로 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과는 달리 이번엔 제갈문이 놀라며 되묻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얘기하는 수하 놈의 입에서 침이 튀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제갈문이다.

“어찌! 도대체 그들이 어찌 알고 이곳을 찾았다는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워낙 많은 무인들이 정주에 깔린 터였기 때문에 발각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검왕은 어떻더냐!”

“이리로 오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들어서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직 검왕이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렇다고 그들이 나갈 수 있다는 말은 아닌 것이다.

“큰일이오. 이를 어쩌면 좋겠소.”

“놈들이 예상보다 빨리 이곳을 찾아내는 바람에 이제 꼼짝없이 당하고 말게 되었소.”

“도주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된 것이오. 이제 죽은 목숨이구려...”

옥현진인이 탄식어린 걱정을 뱉어냈다. 호광이 한 술 더 뜨자 모용척의 얼굴이 검게 변하며 더욱 암울한 소리를 지껄여댔다. 마치 금방이라도 죽음이 찾아들 것 같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오. 아직은 아니오.”

구완이 모용척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거요. 저들이 벌써 장원을 포위하고 검왕이 들어서는 중이라는데 아직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오. 경황이 없다보니 말도 헛 나오나 보오.”

“아니란 말이오.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있지 않소.”

호광이 모용척을 거들고 나섰다.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말에 반박을 하며 심한 말을 해대고 있었지만 구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아이들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허나 여전히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각료들이었다.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모용척이 구완의 말에 여전히 토를 달았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일 때 써먹을 수 있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소용이 없을 것이오. 더구나 검왕의 아이들도 아닌 바에야.”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소. 게다가 십대고수 중 네 명의 아이들이오. 누가 그리 쉽게 생각할 수 있겠소.”

구완은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갔다.

“허면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검왕을 협박해 보자는 것이오? 검왕이 넘어 올 것이라 보오? 그러다가 잘 못 되면 오히려 더욱 비참해 질 수도 있단 말이외다.”

“잘 못 된다고 해봐야 어차피 죽는 것 아니겠소. 일단은 시도라도 해보고 죽어도 죽읍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한 번 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 아니냔 말이오.”

재차 죽음에 대해 말을 하면서 시도라도 해보자는 구완의 말에 드디어 제갈문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들을 이끄는 듯싶어 보이는 그였다.

“그렇게 해봅시다. 검왕에게 위협을 가해 포위를 풀고 길을 열라 합시다. 혹시라도 그리해서 길이 열린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렇지요. 일단 해보십시다. 안 해도 죽고 해도 죽을 것이라면 당연히 해 봐야 하겠지요.”

결국 제갈문이 나섬으로 인해 한동안 시끄럽던 설전이 막을 내렸다. 아이들을 인질로 검왕을 위협하자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어차피 아이들을 이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는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허나 상황이 변하며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들을 한 명씩 품에 안고 한 손에 비수를 꺼내들었다. 문을 나서는 이들의 어두운 얼굴에 삶에 대한 욕망이 끈적거리며 엉겨 붙었다. 흉신악살의 모습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이들의 모습은 보기가 흉했다.

추잡한 인간의 욕망이었다.

이들이 마루로 나왔을 때 검왕이 장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종리격과 그의 세 친우들도 행보를 같이했다.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주변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제갈문의 얼굴이 하얗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이미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주변의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그만, 거기서 멈춰라!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보인다면 아이들의 목숨은 없다! 굳이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니 더는 다가오지 마라.”

품에 어린아이를 안고 모용강을 향해 협박을 하는 제갈문이다. 옥현진인과 구완등도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 결 같이 짧은 비수를 아이의 목에 들이댄 상태였다.

“허어, 어찌 어린아이의 목숨을 이용하려 든단 말이냐. 다시는 상종 못할 인간 망종이로구나.”

“네놈이 바로 검왕이로구나. 앞으로 네놈이 어찌하나 두고 보겠다.”

모용강의 말에 제갈문이 이를 갈아댔다.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금수만도 못한 놈이 무엇을 두고 본다는 것이냐.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용서를 구한다면 정상을 참작할 것이나, 그리 않을 시에는 죽음을 그리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어서 돌려보내라.”

“웃기는 소리하지마라. 네놈이 우리 입장이라면 그리 쉽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긴말 할 것 없다. 어서 포위를 풀고 길을 비켜라. 아이들의 목숨이 두렵지 않느냐.”

“허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제갈문과 모용강의 계속되는 입씨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나 모용강은 포위를 풀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내심 초조해졌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제갈문이 구완에게 눈짓했다.

“뚜두둑!”

“우애애애앵!”

가뜩이나 굶주림으로 인해 피골이 상접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한 줌도 안 되는 팔꿈치를 구완이 움켜쥔 것이다. 뼈가 바스러지면서 아이가 울어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당사자인 구완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저 살짝 힘을 주어 아이에게 아픔을 느끼게 하려던 생각이었다. 아이의 울음을 만들어 낼 목적이었던 것이다. 헌데 아이의 연약한 뼈가 그의 작은 힘조차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지다 못해 바스러진 것이다.

제갈문을 비롯한 각료들의 눈에도 당황스러움이 떠올랐다. 반면 모용강을 위시한 쪽에서는 눈에 핏발이 서며 안타까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아가야! 이노옴!”

종리격의 손녀가 당했던 것이다. 시대가 인정한 거인인 종리격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눈물어린 외침이 장내를 뒤흔드는 가운데 이들의 대치는 더욱 험악해지고만 있었다.

“어서 포위를 풀고 길을 열어라! 우리는 이미 죽기를 각오했다. 이보다 더한 행위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다. 제갈문이 떨리는 마음을 다잡아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악에 받친 외침인 것이다.

“이노옴!”

모두들 노성을 질러대기만 할 뿐이다.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이들을 피해 놈들을 제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길을 열어 줄 수도 없었다. 검왕이 아직 버티고 서있는 까닭이었다. 아니 버티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 발 나선 상태였다. 그와 같은 고수에게 있어서 한 발의 의미는 일반인의 열 걸음보다도 더 큰 움직임이었다.

“그만! 멈춰라!”

제갈문이 기겁을 하며 한 발 물러서더니 고함을 질렀다. 허나 그보다도 더욱 격한 반응을 보인자가 따로 있었다. 공동의 옥현진인이었다.

“빠지지직!”

“우애애애앵!”

옥현진인이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검왕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띤 채 아이의 손목을 잡고 힘을 준 것이다. 이제 두 돌도 채 안되었을 아기였다.

조화선옹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분했던지 그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손자였던 것이다.

검왕 모용강의 눈빛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허나 그 역시도 별다른 방법이 따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을, 저 아이들을 어찌 하실 것이오. 검왕.”

“차라리 내 목을 줄 터이니 내 손녀를 놓아주게, 이리 부탁하네.”

종리격이 모용강에게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탈혼검 서문화중이 놈들에게 사정을 했다.

모용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런 놈들을 상대로 이렇게 힘든 고민을 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한 터였다. 암담하기만 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서 포위를 풀고 길을 열어라! 일각의 여유를 주겠다. 그 안에 말을 듣지 않는다면 차례로 하나씩 목숨을 끊어줄 것이다.”

전개되는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이자 모용척이 한 소리 떠들어 댔다. 그런 놈의 얼굴엔 묘하게도 희열의 기색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 서문화중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던 제갈문이 의외의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상황을 또 다른 국면으로 몰고 갔다.

“아니다. 길 여는 것은 조금 늦어도 상관없다. 그보다도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네놈들의 혈을 짚어라. 아니, 아예 검왕 네놈부터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그래, 네가 목숨을 끊는다면 아이들을 풀어주겠다. 너는 그리할 용기가 있느냐. 하하하하! 패악을 일소하겠다는 놈이 아이들 다섯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결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졌구나. 어째 그것만은 못하겠느냐? 그렇겠지. 결국 네놈도 위선일 뿐이야. 자신의 야욕을 숨긴 채 겉으로만 난척하는 놈일 뿐이지.”

제갈문이 검왕의 죽음을 거론하자 구완이 눈에 광기를 드러내며 거들고 나섰다. 침을 튀겨가며 거칠게 쏟아내는 그의 말에 사람들의 낯빛이 변하고 있었다. 종리격을 비롯한 친우들의 안색은 아예 흑빛이 되고 말았다.

“이놈들! 어찌 네놈들이...!”

제순이 격분해서 몸을 날리려했다. 그러자 호광이 재빨리 움직였다. 자신이 인질로 잡고 있던 아이의 목에 손을 가져간 것이다. 흠칫한 제순의 몸이 그 자리에 딱 멈춰버리고 말았다.

제갈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는 못할 것이다. 네놈이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그리 할 수는 없을 것이야. 해서 내 자비를 베풀겠다. 네놈과 나머지 모두 혈을 짚어라. 그리고 조장급 이상 되는 놈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혈을 짚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사두마차를 준비해라. 건량을 비롯한 음식물도 충분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뒤를 따르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아이들의 목숨은 네놈들이 하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모용강을 주시하던 제갈문이 마무리를 지었다.

“이만한 조건이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리로서도 최대한 양보를 한 것이니 그리 하도록 하자.”

다시 이어지는 제갈문의 말에 모용강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찌 해보려 해도 아이들은 너무 연약했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놈들이었다. 이들의 악독함은 이미 겪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아이들은 죽을 것이었다. 한 놈이라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멀리서도 사물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허나 놈들은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 놈들을 풀어 줄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씹어뱉듯이 명령을 내렸다.

“조장급 이상은 모두 혈을 짚어라! 그리고 사두마차를 준비하고 음식물도 충분히 실어라!”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그가 네 명의 고수들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울분으로 가득한 눈이었다.

“네 분도 그리 합시다. 아이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소.”

“우리 아이들로 인해 누를 끼치게 되었소이다.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종리격이 진정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모용강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혈을 짚지 않은 수하들은 상관들을 뒤로 물려 보호하라! 우리도 저 쪽 옆으로 물러섭시다. 놈의 요구대로 응해야 아이들에게 피해가 없을 것 아니겠소.”

수하들에게 재차 명령을 내린 모용강이 네 명의 고수들에게 자리를 옮길 것을 말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몰라 혈을 짚지 않은 수하들에게 보호할 것을 당부하고 자리를 물러난 모용강이다. 어느새 조장급 이상의 무인들이 뻣뻣이 굳었다. 모용강을 비롯한 네 명의 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두마차가 준비되고 길이 열리게 되자 제갈문이 마차를 향했다. 그의 뒤를 각료들이 모두 따랐다. 걸음을 결코 빨리 하지 않고 느릿하게 걷는 이들에게서는 어느덧 없던 여유까지 보였다.

종리격과 제순, 그리고 서문화중 등의 눈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만이 그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크하하하!”

그들의 웃음소리가 묘한 여운을 남긴 채 장내를 휘감아 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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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7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07.06.24 16:33
    No. 1

    음.. 조만간 연휘에게 다 죽을 듯 -ㅁ-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 묵검사
    작성일
    07.06.24 16:37
    No. 2

    잘 알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07.06.24 17:16
    No. 3

    잘 보고 갑니다..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엿l마법
    작성일
    07.06.24 17:53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3 자류
    작성일
    07.06.24 18:54
    No. 5

    흠 인간이 아니군요...
    어찌 그래도 고수라는 것들이 한낱 파락호보다 못하다니...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아몰라랑
    작성일
    07.06.24 18:56
    No. 6

    이 장면에서 정말 웃기는 모용강.
    사소취대란 말도 모르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철혈기갑
    작성일
    07.06.24 20:21
    No. 7

    건필하시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뚜레박
    작성일
    07.06.24 21:25
    No. 8

    오늘글은 어쩐지 맘에 와 닫지않네요 수백의 무맹이나 가솔들은
    죽이면서 아이들땜에 제일 악적들을 대책없이 보낸다라
    뒷편에서 어떻게 정리할지는 몰라도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안경벗어
    작성일
    07.06.24 21:40
    No. 9

    말도 안돼는 어거지로 글을 끌고가는거 알고나 있으신지?
    에이,,,,,
    건필 하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1 송담(松潭)
    작성일
    07.06.24 22:25
    No. 10

    조금 무리가 있기는 했지만...^^;
    헌데 독자분들께서 혹시 착각하고 계신 듯싶네요.
    모용강은 지금까지 등장하면서 죽인 사람이 딱 하나 뿐입니다.
    맹주 제갈천 만을 죽였지요.
    모용세가에서는 모용헌을 비롯 여덟 명을 옥에 가두는 것으로 마무리...
    아, 모용진을 완전히 밟아 버리긴 했네요.^^;
    사람을 죽이는 역할은 연휘였지요...
    어쨌든 아이들을 인질로 삼는 장면에서 설정이 무리했던 것 만큼은 인정 안 할 수가 없네요.^^;
    편안한 주말이 되었어야 할 것을 어설픈 소설로 망치신 것은 아닌 지...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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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3 초짜관객
    작성일
    07.06.25 01:24
    No. 11

    일이있어 오늘에서야 다읽었네요.위에 몇분이 지적하신데로 억지가 좀 심하게 느껴지는군요. 아무리 상종못할 인간이라도 그래도 정파인물에 가족을 거느린 가장일텐데....
    차라리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처리하는 사파나 마도 같으면 약간의 공감을 하겠지만 (사파라고 해도 핏덩어리 애들을 인질로 하는건 아니죠)..정파집단의 장로급위인들이 아무리 타락했다고쳐도 아니 목숨이 위태롭다 해도 설정이 너무 무리인것 같네요.
    어느정도 장년 들을 인질로 하고 대화중에 죽어도 좋으니 나쁜놈을을 잡아라던지 이런설정이 좋지않을까 하는 독자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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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78 Peuple
    작성일
    07.06.25 09:42
    No. 12

    인질극에서 최악의 상황은 인질범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는 겁니다.
    그 요구에 순응하는 척 하면서 함정을 파서 잡아내거나, 설득시키는
    방법이 요구되죠.

    나름 알 걸 아는 사람들이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간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 하긴 소설에 나오는 인질극 치고 저렇게 끌려다니다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 게 외려 드물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청학
    작성일
    07.06.25 12:03
    No. 13

    악의 말로는 ..여하시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99 zio5370
    작성일
    07.06.25 23:00
    No. 14

    건필 하시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석철두
    작성일
    07.06.26 01:47
    No. 15

    납치범들도 자기 애새끼들 있지 않나요?
    싹 쓸어버리거나 개먹이로 준다고 한다면...
    뭐 자기 목숨을 더 아까워 할 지도 모르겠지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7 뱃살이랑
    작성일
    07.07.07 03:10
    No. 16

    죽일넘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천지
    작성일
    12.08.12 14:27
    No. 17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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