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유사 아공간
#015 유사 아공간
공원에서 전철 반대 방향으로 쭉 가면 대로변에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구도심이다 보니 건물은 대부분 낡고 초라하다.
하지만 편의점, 핸드폰, 그릇, 만두 가게 등 있을 건 다 있었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낚싯대 판매점도 있다.
상당수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금이 갔지만 그래도 멀쩡한 곳이 많아, 물건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무너진 건물에서도 조금만 돌아다니면 괜찮은 물건이 나온다.
음식은 다소 구하기 어려웠지만, 부탄가스나 냄비 정도는 굳이 닫혀있는 가게를 강제로 열 필요도 없었다.
마침 가방과 옷을 판매하는 곳이 있어서 신발을 넣어 다닐 작은 가방도 두 개 골랐다.
주희는 조금 귀엽고 예쁜 것으로, 나는 평범한 합성 가죽을 선택했다.
옆으로 메는 가방이라 흘러내릴 염려도 없고, 급할 때 손을 넣어 신발 만지기도 적당히 괜찮은 물건이었다.
배에다 천으로 둘둘 감아놓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고, 정신 건강상으로도 좋을 것이다.
아무리 탈취 마법을 걸어뒀어도 역시 신발을 맨몸에 두르고 있는 건 좀 그렇지.
주희가 사용할 배낭이나 속옷 같은 것도 챙겼다.
그녀는 대피소를 나오면서 거의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필요한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들고 다니는 게 힘들다고 여겼는지 아니면 남의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는데 저항이 있는지,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정도밖에 가지려 하지 않았다.
주희는 가끔 슬픈 얼굴로 약탈당한 가게의 흔적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녀의 가족이 운영하던 가게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가게도 저렇게 되었겠구나 생각하면 마음은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거리를 걷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약탈당하고 있다면 내가 무단으로 가져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겠지.
오늘은 어딘가 자리를 잡으면 주희 배낭에 경량화부터 걸어야 할 것 같다.
오토바이가 있기는 하지만 급할 때는 몸 하나로 도망쳐야 한다.
정말 중요한 물건은 배낭에 넣고 항상 지니고 있는 것이 좋다.
나는 주희가 우울하게 한숨 쉬며 슬픈 눈으로 물건을 살피는 동안, 지금 당장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골라 오토바이에 실었다.
내가 가져온 오토바이 뒤에는 제법 큼직한 수납공간이 달려 있었다.
오토바이 자체도 비싼 것처럼 보였지만 기타 장비에도 돈을 쏟아부은 것 같다.
어쨌든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다.
도로가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가끔은 내려서 끌고, 조금이라도 평평한 곳으로 이리저리 핸들을 꺾으면서 가다 보니, 거리를 진행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도로 사정이 나쁜 곳은 차라리 걷는 게 빠를 것 같다.
그래도 앞으로 오토바이가 있으면 낫겠지 싶긴 하지만, 기름이 떨어지면 그냥 버리게 되지 않을까.
굳이 힘들게 기름을 찾아 헤매면서까지 사용하지는 않을 것 같, 아니, 적당한 곳에 버려두고 기름을 찾은 뒤에 귀환으로 되돌아가면 되는구나.
아니면 어디 숨겨두었다가 나중에 필요하면 되면 그때 가지러 가도 되고.
'귀환, 이거 정말로 편하네.'
그렇다고 해서 귀환이 만능은 아니다.
실험해 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그냥 지나친 장소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다 멈췄던 곳으로만 귀환할 수 있다.
그것도 조금은 이상한 게, 오토바이를 멈춘 뒤 땅에 발이 닿지 않아도 그 장소로 귀환한다.
그 자리에 멈추기만 하면 되는 모양이다.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나저나 먹을 건 역시 가장 먼저 없어지는구나.'
대로변의 가게에 남아있는 음식은 대부분 상했거나, 골뱅이, 과자 같은 것이다.
한 끼 식사로 삼을 만한 건 깨끗하게 없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대로변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이나 큰 마트 쪽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우선은 여기에서 떠나 개천으로 향할까 생각하는데, 주희가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오빠, 이 안쪽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면 가게가 있어. 아는 분이 하던 건데, 가게 뒤쪽에 물건을 쌓아두는 데가 있거든. 거기라면 아마 먹을 게 남아있을 거야."
나이가 아주 많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진이 났을 때 기르던 개를 데리고 나오려다 건물이 무너져 다치고, 결국 대피소에서 다음날 사망했다.
"그럼 거기로 가볼까."
내 말에 주희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게 도둑질이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나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뒷좌석을 툭툭 쳤다.
"가자."
"...."
주희가 올라타 허리를 꽉 잡자 서서히 출발한다.
"이쪽으로 쭉 가면 되니?"
"응. 안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뽑기 기계가 여러 개 있거든. 거기야."
"뽑기라...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한 개 뽑아볼까."
어차피 서둘러 어디론가 갈 곳도 없다.
가게가 괜찮아 보이면 닭을 처리한 뒤에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도 괜찮을 거다.
안쪽 도로의 상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오토바이가 굴러갈 정도는 된다.
슬슬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는데, 주희가 등에 얼굴을 대고 물었다.
"오빠, 오토바이는 언제 배웠어?"
그 말에 대답이 약간 막혔다.
주희는 우울한 마음을 억지로 떨치려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정직하게 말하면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우울해지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
나는 한때 비행 청소년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한동안 집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돌았다.
집 안에 있으면 부모님과 함께 웃고 대화하던 시절이 뇌에 달라붙은 듯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봐도 부모님의 얼굴이 있어, 환각처럼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만 집에 던져두고 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걸었다.
밤이 되어 어두워져도, 새벽이 되어도,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 걷거나 건물 그늘에 숨듯이 앉아있었다.
그러다 불량 학생들과 알게 되어, 그들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웠다.
불량하다고 해서 모두가, 혹은 항상, 폭력적이거나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의 그들은 대부분 끼리끼리 농담하고 담배를 피우거나 새벽 내내 오토바이를 달리기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낡은 스쿠터를 타고 있었지만, 몇 명은 상당히 좋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었고, 가끔 박력 있게 생긴 성인도 섞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북극파라고 불렀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 자신도 그들과 한 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나를 친구로는 대했어도 같은 그룹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두운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이었다.
그런 시간은 한두 달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밤에 그들을 만나면 함께 어울렸다.
그 시간이 끝난 건 주희 때문이다.
어느 날 주희와 비슷하게 생긴 여학생이 그 그룹에 들어왔다.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가 닮은 여자였다.
그녀가 특별히 뭔가 했거나 무슨 일을 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직 학생인데도 캄캄한 밤에 그들과 어울리고 담배를 피우고 새벽이 되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보면 가끔 웃었다.
그 미소가 마치 주희가 나를 보고 웃는 것처럼 보였다.
오빠, 여기서 뭐 해?
왜 이런 사람들하고 있어?
나를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쯤으로 생각하는 주희가 묻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몇 번 하게 된 뒤, 나는 더 이상 밤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한동안 내팽개쳤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미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걸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적어도 수업에 나가고 어떤 대학이든 들어가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모두 주희 덕분이었다.
그때 주희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 그룹에 섞여 지금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오빠?"
주희가 내 등에 뾰족하게 턱을 대며 부른다.
하지만 오토바이를 언제 배웠는지 하는 질문에는 여전히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수하게 나를 히어로로 믿는 아이는 없어졌지만, 내가 한때 엇나간 길을 걸었다고 고백하는 건 역시 오빠 체면에 곤란하지.
"... 아는 사람한테 배웠어. 학교 다닐 때."
"학생 때? 성인이 아니어도 탈 수 있는 거야? 면허도 있어?"
이니, 면허 같은 건 없다.
운전면허증은 있지만 오토바이를 타려면 다시 시험 봐야 해.
오빠는 무면허로 오토바이 탔다.
아, 이거 안 된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망설이는 동안 뽑기 기계가 보였다.
거기까지는 길이 좋지 않아 오토바이에서 내려야 한다.
주희가 먼저 땅으로 훌쩍 내리더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보았다.
나한테 오토바이 면허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다.
이런 세상이 되었으니 면허 정도야 거짓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있다고.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좋아, 그렇게 말하자.
나는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릴 때는 천연덕스럽게 잘만 나오던 거짓말이 왜 지금에 와서야 안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입을 다시 다물고 주희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중간에 찾아낸 물티슈로 닦기는 했지만 손에서는 여전히 닭에게서 묻은 똥 냄새가 은은하게 난다.
주희가 재빨리 머리를 피했다.
"이놈!"
웃으면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잡으려 하자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그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나는 가게 뒤편으로 향했다.
잠깐 시간은 벌었으니, 이제 앞으로 뭐라고 말할지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주희는 나에게 시간을 더 주지 않았다.
"오빠, 지금 면허 가지고 있어? 나 오토바이 면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선 채, 주희가 나를 보았다.
눈이 너무 반짝거려서, 나는 그냥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데 면허증의 실제 유무가 무슨 상관있을까.
면허 없이 탄다고 경찰이 잡을 것도 아니고.
"안 가져왔어. 지금 세상에는 필요도 없고, 급하게 집을 나와야 했으니까."
"아깝다. 오빠 사진 보고 싶었는데."
오토바이 면허에 사진은 붙어 있나?
나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아니, 면허니까 사진은 당연히 붙겠구나.
운전면허증하고 비슷하게 생겼을 거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은 신분 증명할 일이 있을지 몰라 챙겨왔는데, 오토바이 면허만 안 가져왔다고 하면 아무래도 이상하겠지.
'나중에 속아주려나.'
주희가 목표였던 가게와 옆 건물 사이의 좁은 공간을 가리킨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통로였다.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해."
과연, 이렇게 통로가 좁다면 뒤쪽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건물 일부가 무너졌지만 이곳은 용케 그대로 남았다.
"여기서 잠깐 기다려봐. 안이 안전한지 보고 올게."
나는 주희를 남기고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건물 뒤쪽에는 뒷마당과,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의 빈 공간을 활용해 만든 작은 창고가 있었다.
안에는 라면박스와 즉석밥, 과자, 탄산음료와 커피 캔을 비롯해 수프, 카레 가루 등의 음식이 박스째로 쌓여 있었다.
구석에는 생수도 있다.
'이곳이 완전 노다지네.'
계단 위로 올라가면 작은 살림집이다.
방 한 개에 부엌, 욕조 없는 화장실이 붙어 있었다.
가게 주인의 집인 것 같은데, 방에는 생활한 흔적이 거의 없었다.
가게에도 작은방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그곳에서 거의 살았던 모양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면 될 것 같다.
뒷마당은 좁긴 하지만 오토바이 한 대 정도는 충분히 놓을 공간이 되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주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도 충분히 남아있고, 이층으로 올라가면 집도 깨끗해. 오늘은 여기에서 자면 될 것 같아."
"다행이다."
주희가 안도의 숨을 쉰다.
나는 주변 건물에 일일이 들어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주택가이기 때문에 높은 건물이 없다.
주변만 확인하면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다행히 주변 건물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시체만 약간 남겨져 있었다.
나는 주변의 잔해를 가져와 통로를 막기 시작했다.
"오빠, 뭐해?"
주희가 이상한 듯이 내가 하는 일을 쳐다본다.
"우선은 이곳을 막아두고 귀환으로 왔다 갔다 할 거야. 그렇게 하면 나중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음식을 가져갈 수 있으니까."
주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면... 그런 식으로 하면... 여기저기 식량 창고가 생기는 거 아니야?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런 셈이지?"
"맙소사, 오빠, 진짜 대단하다. 이거 완전히 아공간이잖아."
아공간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기도 하네.
내가 웃자, 주희가 벌떡 일어났다.
"오토바이는 내가 안쪽에 놓고 올게."
"그래."
"좋았어!"
갑자기 신이 난 모양이다.
그녀는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불쑥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
오토바이에 손을 대고 작은 소리로 귀환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녀와 오토바이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통로를 은폐하는 내 뒤에 다시 나타난다.
"오빠!"
갑자기 그녀가 뒤에서 머리를 박으며 꽉 껴안았다.
머리에 박힌 등이 아프다.
"주희야, 이제 아가씨인데 적당히 머리로 박는 건 그만하지?"
"하지만 오빠! 이건 정말로 너무 대단한걸."
주희의 목소리가 튀는 것처럼 높다.
뭐, 대단하기는 정말로 대단하지.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치트 능력인 것 같다.
'귀환... 이거 죽을 마음으로 노력하면 또 하나 만들 수 있으려나.'
몇 개만 더 만들면 지구 정복도 꿈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주의의 목소리가 등을 통해 전해졌다.
"오빠, 귀환 몇 개만 더 있으면 지구 정복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
너나 나나 생각하는 수준은 여전히 초등학생인 것 같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말
12/23
“오토바이 기능 시험” 부분에서 “기능”이라는 단어를 제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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