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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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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5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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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8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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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_한요재의 초대

DUMMY

소소공방을 나와서도 부루는 사빈을 재촉하지 않았다.

마음숲에서 상산대원이 빨리 다니면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평소에는 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이즈막광장으로 들어서며 사빈은 소소공방을 돌아보았다. 요선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두모랑 얀다, 웅비랑 이수, 다림과 아투. 알겠어?’


대차사 두모와 얀다는 염라부를 총괄하고, 웅비와 이수는 낙원과 황천의 중앙구역을 수비하고 있다. 다림과 아투는 영천옥을 지키는 대차사였다.


그들은 모두 연인이거나 부부였다. 원래는 다른 임무를 맡았는데, 중앙황제 현원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바꾸어 주었다.


‘부부나 연인인 대차사들 얘기라면···?’

사빈은 돌아서서 눈썹 사이에 힘을 주었다.


‘가시버시 축제 때문이구나! 맞아, 얼마 안 남았지?’

가시버시날도 크고 화려한 축제였다. 하늘열림날만큼은 아니어도.


중앙황천에는 축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네 개의 축제가 특별했다. 하늘열림날은 지나갔고, 다음은 가시버시날이다. 그 후에는 바람길 연회와 화평축제가 있다.


화려하고 웅장한 축제를 생각하니 가슴이 부풀었다.

사빈의 걸음이 느려지자 부루가 돌아보았다.

“대감이 기다리는디···.”


“무슨 일 생겼나요? 대감이 저를 찾다니?”

“가보면 알 거여. 나랑 차미가 모심장터까지 갔다 왔당께.”


‘모심장터?’

대명천의 모심장터라면 정인과 소린을 도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부루님도 모심장터 잘 아시죠?”

“이. 그라지.”


“위즐증가에서 쓸 재료가 필요해서요.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그런 거라면 걱정 말어.”

부루는 가볍게 주먹을 쥐어 가슴을 두드렸다.


사빈의 걸음이 다시 가벼워졌다.


먼 곳에서 찾을 필요 없었다. 상산대 삼인행이라면 위즐증가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 테고, 모심장터 근처 영진촌에는 인도자들의 숙소가 있지 않은가.


‘대취님과 산여님도 나서줄 거야.’

적어도 가시버시날까지는 수련혼들도 제법 솜씨를 키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란다.’

공방 선생들의 말을 되새기니 걸을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한요재에 들어선 사빈은 맞이방 문가에 우뚝 멈춰 섰다.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얼음대장이라는 명성처럼 장식 없이 단정하고 깔끔했는데, 오늘은 위즐증가의 별실 같았다.


하얗고 서늘하던 맞이방에서 색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벽에는 연한 노랑, 분홍 같은 은은하고 화사한 가리개를 드리웠지만, 배경과 동떨어진 기운이었다.


‘뭐지? 이 해괴한 느낌은?’

사빈은 주춤거리며 요상한 탁자를 바라보았다.


탁자에는 꽃무늬 천까지 씌웠고, 아날빛숨에서 빌려온 찻잔과 주전자도 있었다.


‘이건 또 언제 가져오셨나?’

사빈은 하얀 바닥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접시에는 빛깔 좋은 간식이 담겨있었다. 모심장터의 이루리에서 만드는 겨우내떡과 아무나전, 정과수도 있었다.

다식과 약과는 고샅공방의 것이었다.


조금 전 소소공방에서 먹던 것과 똑같아 사빈은 웃음 지었다. 겨우 하나 맛을 보다가 불려 나왔다.


‘정말 모심장터까지 갔다 오셨네? 무슨 일로?’

백하는 보이지 않았다. 부루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맞이방에는 사빈 혼자였다.


“대감? 절 찾으셨다고요?”

사빈이 부르자 백하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들어왔다. 늘 예의 바른 모습이지만, 오늘은 더 진지해 보였다.


“사빈님,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 몇 가지 준비했소.”

“예?”

사빈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뻐끔거렸다.


백하는 자리에 앉았어도 사빈은 엉거주춤 서 있었다.

“앉으시오.”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사빈은 앉으면서도 재촉하듯 물었다.


그녀는 백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뚫어지게 바라보니 몸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사빈님의 기력이 약해진 것도 큰일이잖소? 마고가 마음숲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 터이고.”

백하가 정과수를 두 잔 따라 한 잔을 사빈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지난 그믐에···.”

사빈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반계에 갔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백하가 얼마나 반계를 혐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반계의 숨이 인간세보다 가볍기는 해도, 몸에 더 오래 머물러.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것도 반계의 힘일까?’

사빈은 옷깃을 쓰다듬는 척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지금은 반계의 숨이 모두 사라졌다.


백하는 비스듬히 앉아 미소 지었다.

나름 다정한 웃음을 짓느라 애쓰고 있지만, 사빈에게는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내가 뭘 잘못했나? 딱히 잘못한 일은 없는데.’

보는 시각과 위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니 섣불리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빈은 백하의 눈치를 보며 겨우내떡을 바라보았다.


겨우내떡은 연두와 노랑이 얇은 층을 이룬 위에 하얀 가루를 얹은 것으로 고소하고 달콤하면서도 개운한 맛이었다.


위즐증가의 정인도 만들겠다고 벼르는 떡이었다.

‘위즐증가에서 만들면 어떤 맛이 날까?’


‘역시 겨우내떡을 좋아하는군.’

백하에게는 사빈이 군침을 삼키는 것으로 보였다. 어서 먹으라고 손짓했다. 그로서는 마음을 다하여.


“예? 예.”

사빈은 떨리는 손으로 떡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녀에게 백하는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 그대로였다.


빙천술의 대가답게 냉기가 느껴졌다. 머리카락부터 옷까지 하얀 데다, 눈동자까지 옅은 회색이니 한동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중간자에 반인반천이라···. 그런 자가 마음숲을 감당할 수 있겠소?’

그가 건넨 첫 마디였다. 비난이 아니라 걱정임을 알면서도 두려웠다.


그래도 마음숲에 적응하는 동안,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상산대원과 도우미들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상산대원들은 지금까지 그대로지만, 도우미들은 여러 번 바뀌었다.


도우미들이 마음숲에서 수련하는 기간은 삼백 년을 넘지 않는다. 지금 있는 도우미 중에서는 아날빛숨의 용희가 기한이 다가온다.


사빈도 약과를 하나 들어 백하에게 건넸다.

“고샅공방에서 만들어서 달고 맛있어요.”


“고맙소.”

백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약과를 받아 들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사빈은 정과수로 목을 축였다. 혹시 차미가 가까이 있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지?’

반계의 일은 말하면 안 되고, 어리화도 아직은 숨겨야 하고, 공방의 문제는 구태여 상산대감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사빈은 간신히 한 가지 질문을 끌어냈다.

“대감, 예전 마고가 바뀔 즈음에 어땠는지 기억하세요?”


“아란 이전이면··· 하늬나 예님 말이오?”

“마고가 바뀔 때가 되면 마음숲이 어려워진다고 해서요.”


“음···. 혼들이 공명력을 잃고 헤맨 적도 있고, 바래강과 반다강이 거꾸로 흐른 적도 있소. 혼알판이 뒤집히기도 하고.”


사빈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백하가 손을 저었다.

“다음 마고를 찾아내면 저절로 해결되니 걱정할 것 없소.”


“또 다른 일은 뭐가 있을까요?”

사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비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백하가 고민하는 사이 맞이방 바깥에서는 부루와 차미가 발을 굴렀다.


“아후, 지금 저런 얘기할 때가 아니잖아요?”

“내 말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일러드렸건만.”

“하이고, 저걸 워쩐댜.”

부루는 쯧쯧 혀를 내둘렀다.


차미는 창밖에 서서 눈짓 손짓을 보냈으나 백하는 마음숲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생각하느라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사빈이 먼저 그들을 알아보았다.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고개를 돌렸는데, 부루와 차미가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잘 됐다. 차미님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아.’

사빈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부루님, 차미님! 모심장터까지 갔다 오셨다며요? 같이 먹어요.”

“아, 아니, 우리는 저쪽에···.”

차미는 괜찮다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 그믐 외출이 워떤지 궁금해서리···.”

부르는 껄껄 웃으며 목덜미를 긁었다.


사빈은 한요재 안쪽을 기웃거렸다.

“운와님은 안 계세요?”

“혼알방을 돌아보고 있당께. 헛것이 보인다는 야그가 있어.”


“예?”

처음 듣는 이야기에 사빈은 귀를 쫑긋거렸다.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부루는 허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별거 아닝께, 사빈님은 걱정 마쇼.”


백하가 굳은 얼굴로 창밖을 노려보았다. 부루와 차미가 난처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사빈은 차미의 팔을 끌어당겨 의자에 앉혔다.

“제가 겨우내떡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서 맛보세요.”

“그쵸? 사빈님이 좋아할 것 같았어요.”


“전과 튀김도 사왔어요. 모심장터에서 제일 많이 팔린다기에.”

차미에 이어 부루도 아무나전을 집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백하는 정과수로 입을 축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막상 자리에 앉았으나 차미도 부루도 할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음식 삼키는 소리만 조그맣게 맞이방을 울렸다.


참다못한 부루가 사빈에게로 어깨를 기울였다.

“인간세가 엄청 바뀌었다믄서? 멀리 떨어져도 얼굴 보며 말도 한다든디?”

“아, 휴대폰이요.”


천계에서는 바람과 물방울만 있어도 서로 통했다. 빛으로도, 깃털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많이 바뀌었죠. 산보다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밤이 낮보다 화려해요.”

사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기술이 나와도 인간세는 갈수록 일그러졌다. 뭔가를 만들어 내는 만큼 쓰레기도 쌓였다. 다행히 깨어있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세에서도 실증계만 그렇고, 존재계는 여전히 생명력과 정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존재계가 받쳐주는 한 인간세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성정은 변하지 않소. 겉모습만 바뀌지.”

백하는 아날빛숨에서 가져온 용숫주를 따라 마셨다.


“그러니 피천귀가 늘어나지. 갈수록 반계의 힘도 커지고.”

백하는 깊고 어두운 눈으로 벽의 한 곳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사빈은 조용히 정과수를 따라 마셨다. 예슬과 나윤이 생각났다.

‘지금쯤 열심히 향낭을 만들고 있겠지.’

아롱재의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라온향이 코끝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백하와 사빈이 제각각 생각에 잠겨 들자 차미가 쓰읍 입술 사이로 소리를 냈다.


‘그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하셔야죠!’

차미의 눈빛을 알아듣고 백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님은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히 하면 안 되오. 아시겠소?”

백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으름장을 놓듯 낮고 힘 있는 소리가 되었다.


“예. 조심하지요.”

사빈은 겨우내떡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는 오랫동안 마음숲을 지킨다오. 새하와 누림은 대혼란 때문이었으니 예외이고.”

백하는 용숫주를 한 모금 삼키고 잔을 내려놓았다.


“겨우 이천 년이 지났으니···, 사빈님은 앞으로 일만 년은 더 버텨야 하오. 기력이 없어서야 하겠소?”


백하의 말에 사빈은 들고 있던 떡을 떨어뜨릴 뻔했다.


조심스레 떡을 내려놓고 오른쪽 소매를 잡아당겨 손등을 덮었다. 소매가 길어 어리화가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차미의 눈이 번뜩였다.

‘저런 버릇은 없었는데.’


한 번 눈여겨보기 시작하니 같은 동작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뭔가 있구나.’

차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사빈은 사빈대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대감에게 알려야 하나? 아냐, 이번 그믐에 마고를 찾을 수 있잖아? 다음 마고를 데려와 얘기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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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천계_또 다른 비밀 23.06.11 9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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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계_한요재의 초대 23.06.08 95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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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천계_돋움다로차 23.06.06 100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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