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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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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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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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멸의 비애 (1)

DUMMY

이찬의 몸이 주춤하며 와 본 적 없는 미지에 도착했다.


“무사히 도착했나.”


이찬이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동그란 물체를 쥐어 터뜨렸다.


채앵!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속에서 암흑을 담은 기체가 흘러 이곳의 공기와 동화되었다.

일전에 거대한 석상이 가지고 있던 그 구체였다.

석상의 몸체는 반으로 갈랐지만 구체는 원형 그대로 떨어졌기에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판단하고 가져온 것이 잘한 단안이었다.


스르릉.


이찬이 기도를 칼집에서 발검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공간에 검을 수납할 수 있는 좋은 능력이 있음에도 굳이 칼집의 무게까지 견뎌야 하는 수고로움을 택한 것이다.


절그럭.


이찬의 왼쪽 허리에 차인 단단한 칼집이 시선을 끌었다.

이는 강환중의 요구였다. 마철에게 쓸 만한 칼집을 요구한 강환중이 기도와 딱 맞는 칼집을 보곤 즉시 이찬에게 건넸다.


-칼집에 검을 넣어 두고 다니면 안심이 됩니다. 검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신신당부하는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칼집을 동반했다.


“어떻게 잘 풀렸군.”


이 행동이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아니, 《관념》에 거주하는 어떤 이가 봐도 그저 정신이 가출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수많은 관념인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편린을 겪었다는 그곳.


“시스템도 불안정한 건가.”


이찬은 시스템의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그때마다 반복되어 오는 구절은 [서비스 불가능 지역입니다.]라는 단호한 문구뿐이었다.


“괜히 부정타는 거 아닌가.”


이찬이 기도를 추켜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불길했으나 결코 다른 계열의 상상력이 이찬을 적대했다. 그리고 이찬은 그들의 관심을 외면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에게 괜한 관심을 주었다간 예기치 못한 봉변을 당할 수 있었기에 최대한 변수를 자제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 조금 익숙한데.’


이찬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이찬은 몇 시간을 내리 걸었다. 그 사이 흉흉하던 상상력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필히 백호를 마무리하기 위해 태극본성으로 향한 것이 분명했다.


‘도박이었어.’


그랬다. 너무도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이었다.

애초에 두 집단이 전혀 다른 곳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단서는 부족했고, 이찬은 자신을 너무나도 과신하는 경향을 보였다.

허나 이 한 대성단의 존폐를 건 도박을 성공한 것은 다름 아닌 이찬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태극본성에 암살을 위한 소수의 병력만을 보냈다간 큰코다칠 것이었다.


“조금 더 기다린다.”


병력 충원을 기다리며 이찬이 검붉은 색 큰 바위에 기대어 잠시 주저앉아 휴식을 청했다.


“후··· ···.”


이찬이 단전 깊이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땅이 꺼지듯 내뱉었다.

‘행동자’라는 굴레에 갇혀 움직이고 있다곤 하나 그도 결국 사람이다.

이런 과한 특별함은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세계와 단절되고 싶었건만··· ···.’


이찬은 그 짧은 적막 동안 너무 많은 상념에 파묻혔다.

이찬은 파묻힌 적막 속 상념을 파헤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모든 상념과 제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의 답변은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난 행동자니까.’


그에게는 의무가 있다. 알 수 없는 인과관계에 묶인 그의 운명이자 의무.

세계를 멋대로 휘어잡고 좀먹는 이들을 끌어내리고 유토피아를 만든다.

그것이 그가 세운 자신의 의무였다.


절그럭.


그때, 이찬의 귀로 어떤 소리가 속삭였다.

특별할 것 없는 돌 굴러가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바람이 불지 않은 이곳에서 돌이 굴러간다는 것은, 여기 누군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찬이 슬쩍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


그곳엔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들’은 얼핏 보기에 좀비와 닮아 있었다.

눈에 초점이 없었고, 뇌엔 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행동거지엔 의미가 손실되었다.


하지만 그들과 좀비는 엄연히 다른 존재였다.

느껴지는 상상력의 크기가, 결코 어떤 이의 소환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스르릉.


도로 집어넣었던 칼집에서 이찬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그것들은 일제히 이찬이 있는 바위를 응시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이찬이 발을 떼어 움직였다.

명불허전 이찬이 가진 최고의 이동 기술 「풍화」를 사용해 그것들의 중앙으로 침투한 이찬이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후우웅!


가공할 바람이 성지에 일며 그것들을 저 멀리로 밀어냈다. 하나 그뿐, 그들에게 타격은 없었다.


‘단단하다.’


보통의 소환수 혹은 성주의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이 정통으로 타격을 당하면 생채기나 준치명상을 입기도 하는 일격이다.

그만큼 상상력을 많이 소모하는 기술이고, 위력도 보장되어 있는 기술이었다.

그런 공격을 그들은 미약하게 뒤로 밀려날 뿐, 어떤 타격도 입지 않았다.


채앵!


금속음이 번지며 이찬이 제대로 싸울 준비를 마쳤다. 저들은 강하다. 어쩌면 그들의 성주에게 닿지도 못한 채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찬은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결연하게 다짐한 이찬이 그들의 선공을 기다렸다.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뭐지?’


그들은 자신이 공격받은 것도 잊은 양 마저 평야를 돌아다녔다.


“이게 무슨··· ···.”


이찬은 적잖이 당황했다.

선공을 맞았고, 대응이 있어야 했다.

지금껏 이찬이 상대한 모든 이들이 그랬다.


그으어.


허나 그들은 알 수 없는 의성어만 자꾸 토해낼 뿐 어떤 반격도 없었다.


“대체 이것들은 뭐야··· ···!”


이찬은 순간 두려워졌다.

숱한 싸움을 겪어보았고, 이제 나름 숙련자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숱한 착각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며 지나가는 괴인에게 이찬이 한 번 더 달려 들었다.


“흐라아앗!”


과할 정도로 강한 기합을 토해내며 기도를 횡으로 그어 괴인에게 타격을 입히려 했다.


타앙!


이찬의 몸체가 달려든 것의 두 배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카가가각!


기도를 땅에 틀어박아 겨우 뒤로 밀려나는 것을 상쇄했다.


끼기긱··· ···.


섬뜩하고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 괴인의 목이 이찬을 향해 틀어졌다. 이찬이 그에 조응하듯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이찬의 숨은 거칠어졌고,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작금에 달려들었던 것보다 배는 빠르게, 배는 강하게 격을 발현하여 죽일 기세로 격을 파했다.


후욱!


이찬이 달려드는 속도보다 빠르게 괴인이 손을 들어 이찬의 기도를 막아 냈다.

이찬은 그제서야 그 괴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느꼈던 묘한 기시감이 수면 위로 빠르게 모습을 나타냈다.


“키··· ···.”


순간 이찬의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 재현되었다.


“키트리노스··· ···?”


이찬이 《관념》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던 적이자, 지금 생각해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최흉의 적.

이면 세계로 떠난 전신(電神) 제우스의 마지막 남은 주민.

이제서야 이찬은 그가 느낀 기시감의 이유를 알아챘다.


“키··· ···트리노··· ···스?”


그러자 키트리노스의, 아니, 키트리노스였던 괴인이 몸체를 고개와 동기화시켜 이찬을 응시했다.

그의 삐뚤어진 시야가 이찬에게 구역감과 무력함을 선사했다.


수우웅!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키트리노스가 이찬에게 접근했다.


“그게··· ···뭐지?”


이찬은 그것을 막기엔 역부족이라 판단하여 전력으로 속도를 높여 가까스로 피해냈다. 허나 정면 타격만 피했을 뿐 이마 쪽에는 길게 상처가 뻗어 있었다.

주르륵 흐르는 피를 닦아낸 이찬이 다시 기도를 움켜쥐었다.


“그게 뭐냐고?”


이찬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전류가 흘렀다.


“이것의 주인.”


전격(電擊)을 방출한 이찬이 눈을 노랗게 부라린 채 키트리노스에게 다가갔다.


“저것이··· ···나인가?”

“아니, 네 모조품이다.”


이찬의 기도에도 전격이 흘러내려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퍼어어엉!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키트리노스였던 괴인이 허공을 날았다.


“그··· ···그어어어··· ···!”


이 녀석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알··· ···았다. 너는 그 빌어먹을 녀석이구나··· ···.”


왜 죽어서도 그를 잊지 못하는가.


“넌 왜 죽었지?”


왜, 죽었는가.


“나도··· ···모르. 깨어나 보니··· ···.”


언어 능력이 감퇴한 탓인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어떻게 알았지?”

“익숙한 냄새가··· ···난다.”


전격의 영향인가, 혹은 이질적인 행동자 행동거지 때문인가 키트리노스는 기억의 대부분을 잃은 순간에도 이찬을 알아봤다.


“나는 이찬이다. 너의 이름은 키트리노스. 마지막 남은 제우스의 주민이었지.”

“제··· ···제우스··· ···!”


키트리노스가 제우스의 이름을 여럿 외더니 경련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언제, 어떻게 여기 오게 됐는지 말해.”


이찬은 서서히 전격이 흐르는 기도를 키트리노스의 머리에 조준했다.


“말해!”


이찬이 역정을 내자 키트리노스의 몸에서 전류가 흐르며 격이 방출되었다.

이후 높이 일었던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키트리노스의 인영이 드러났다.


“이런··· ···.”


욕지거리를 찍찍 뱉으며 먼지 속을 걸어 나온 키트리노스가 이찬에게 물었다.


“아직 살아있었나?”


그러자 이찬이 부르르 떨리는 눈으로, 파르르 떨리는 웃는 입술로 그를 맞았다.


“너보다는 늦게 죽었지 아마?”

“내가 죽었던가?”


이찬은 ‘두 경우가 양립할 수는 없는 것인가’하고 생각했다.


“죽느니만 못했던 건 맞았지.”


이제 그에게 불온하거나 어두운 기운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과 같은 순수한 전기의 격과 그에 상응하는 상상력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네가 약해진 건가, 내가 강해진 건가.”


느껴지는 격의 크기나 상상력의 양이 너무나도 상이하다는 것.


“기고만장하군.”


이찬은 더 이상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듯 기도를 꽉 쥐고 그것에 전류를 흘렸다.


“모방인가.”


콰과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며 키트리노스의 주 무기이자 제우스의 무기 그리고, 풍백의 마지막 주민을 죽였던 그 무기.

아스트라페(Astraphe), 전설의 번개가 무수히 많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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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영멸의 비애 (4) 24.04.14 19 0 10쪽
123 영멸의 비애 (3) 24.04.12 22 0 11쪽
122 영멸의 비애 (2) 24.04.10 18 0 12쪽
» 영멸의 비애 (1) 24.04.07 18 0 11쪽
120 경계 (7) 24.04.05 20 0 11쪽
119 경계 (6) 24.04.03 18 0 10쪽
118 경계 (5) 24.03.31 22 0 11쪽
117 경계 (4) 24.03.29 14 0 11쪽
116 경계 (3) 24.03.27 23 0 10쪽
115 경계 (2) 24.03.24 17 0 11쪽
114 경계 (1) 24.03.22 19 0 10쪽
113 성지화 (14) 24.03.20 15 0 11쪽
112 성지화 (13) 24.03.17 22 0 12쪽
111 성지화 (12) 24.03.15 19 0 11쪽
110 성지화 (11) 24.03.13 23 0 11쪽
109 성지화 (10) 24.03.10 28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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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성지화 (8) 24.03.06 23 0 10쪽
106 성지화 (7) 24.03.03 27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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