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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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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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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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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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화 (11)

DUMMY

방대한 상상력을 담은 기도와 차크몰의 애병. ‘파라도하 프에고 (불의 역설 paradoja fuego)’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둘은 각자의 격을 맞대며 승부를 겨뤘다.


화아악!

카가각!


불처럼 타오르는 '불의 역설'의 화기가 이찬의 몸을 따라 흘렀다.


화르륵!


격에 호응하여 화기를 발산하는 그 횃불은 이찬의 주 전투 방식인 근접전을 억제했다.


[그게 전부인가? 떠들던 내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던데, 역시 거품이었나.]


이찬이 차크몰의 말을 무시하듯 「풍화」로 제 모습을 감추었다.


[어째 풍백과 이리 같을 수 있나.]


차크몰은 이찬의 급습을 대비하기는커녕 눈을 감고 해이해진 듯 가만히 있었다.

이 틈을 놓칠 리가 없는 이찬이 차크몰의 뒤에서 나타나 한 바퀴 빙글 돌며 가속과 추진력을 더해 그의 등을 노렸다.


콰앙!


하지만 그런 이찬의 노력이 무색하게끔 차크몰이 뒤를 돌아 ‘불의 역설’을 가볍게 들어 기도를 막아 삽시간에 기도를 과열시켰다.


“크윽!”


압도적인 열기 그대로를 받아낸 이찬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하지만 과열되는 열기를 받아내는 동시에 이찬은 그 둘의 연결을 끊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네가 타오르는 건 순식간일 텐데. 우매하구나.]


이윽고 이찬의 몸일 붉게 달아올랐다.


쿨럭!


이찬의 내부에서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핏덩이가 입을 통해 바깥으로 분출되었다.


[아직 나를 달아오르게 하지 못했다. 이대로 죽을 셈인가!]


이찬이 줄기줄기 흐르는 피를 끊어내고 쩌적 입을 열었다.


“이게··· ···일 대 일이라고 생각해?”


차크몰의 생각이 찰나간 멈췄다.

많은 정보양의 범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과부화되는 정보를 모두 정리했을 때쯤. 그의 몸은 허공을 날았다.


텅!


작고 가녀린 몸체가 지면으로 떨궈졌다.


[크윽!]


하지만 역시 높은 격의 신답게 금시에 정신을 차리고 그 격의 근원지를 찾아 눈을 빠르게 굴렸다.

근원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비겁하구나. 바람의 신이여.]

[영리한 거라고 하지. 너는 멍청한 거고.]


차크몰이 기막히다는 투로 헛웃음을 내리쉬었다.

아무리 기습이었다곤 하나 풍백은 풍백이었다.

풍백의 고유격 중 9단계의 「큰센바람」이 차크몰을 이찬에게서 떼어내는 것은 물론 유효타까지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타닷!


이에 맞춰 풍백의 곁으로 온 이찬이 시스템 상점에서 구매한 물약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직 허용 상상력의 부족으로 물약은 제 효능의 반도 내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쩌자고 그 뜨거운 것을 붙잡고 있었느냐?]


“저 녀석을 묶어 놔야 했으니까요.”


실제로 이찬과 맞붙어 있지 않았다면 차크몰은 그 바람을 진작에 인지한 후 유유히 회피했을 것이다. 허나 작금의 상황은 이찬과 격을 맞대고 있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뿐더러 이찬이 목숨을 담보로 차크몰의 주의를 끌고 있었기에 가능한 연계 공격이었다.


“다시 갑니다.”


사자분신한 이찬은 차크몰이 숨 고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콰앙!


이찬이 땅거죽을 강하게 박차며 기도를 휘둘렀다. 전투의 박자에 어긋나는, 엇박자의 공격이었다.

한 타이밍 빠른 공격이었기에 위력은 확연히 줄었으나 차크몰이 반응하지 못한다면 충분히 치명상을 입힐 만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이찬이 검을 종으로 긋는 순간.

차크몰의 몸체가 이찬이 휘두르는 검의 궤적에 따라 물방울로 변화했다.

방울방울 떠다니는 유체가 이찬의 당황을 유발케 했다.


[한 박자 빠른 공격은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크다는 것도 알아야지.]


이찬이 엇박의 빠른 공격을 하며 차크몰의 쉴 틈을 주지 않았지만 쉴 틈이 없는 것은 이찬도 마찬가지였다.


[변칙적인 공격은.]


불의 역설을 아래로 쳐지게 한 차크몰이 반응의 여지를 주지 않고 빠르게 위로 그어 이찬의 안면을 강타했다.


치이익!


뜨거운 불길이 이찬의 얼굴을 삼킬 뻔했지만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물약을 통째로 얼굴에 부어 진화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었고 볼에 작은 화상 자국이 남는 것으로 그쳤다.


[영 시시한 건 변함이 없군.]


“내 사투를 재미로 치부하지 마.”


[그럼 좀 즐겁게 해 보란 말이다!]


이찬의 심장이 터질 듯 긴장됐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해 봤다.

뉴턴의 「중력장」으로 차크몰을 짓누르기도 해 봤다.

「한계 돌파」의 압도적인 무력도 차크몰에게는 닿지 못했다.

게다가 더욱 문제인 것은 이찬은 상상력을 소모하며 전투하지만 차크몰은 상상력을 이례적인 수준으로 가지고 있어 전투를 하면 할수록 허용 상상력만 증가하며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 그의 등에 메어 있는 가스페르의 무기 아르코 솔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이찬의 화살을 쏘는 능력은 영 꽝이었다.


[당랑거철이로구나. 더 발악해 보거라. 아직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 않느냐?]


이찬이 이를 으드득 갈며 자세를 아래로 숙였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모습에 차크몰이 씨익 웃으며 맞이했다.

이찬이 순간의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려는 순간.

이찬의 시야에 넓게 펼친 왼 손바닥이 꽉 차게 들어왔다.

그 손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풍백이 기절한 가스페르와 아윤을 살포시 이찬에게 건넸다.

이찬이 차크몰을 상대하는 동안 둘을 구출해 온 것이었다.


[넌 여기까지. 가스페르와 아윤, 이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빠져 있어라.]


“네? 안 됩니다. 저 녀석은 너무 강해요.”


이찬이 무심결에 뱉은 말에 풍백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되느냐?]


이찬을 뒤로 물린 풍백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차크몰을 마주했다.

풍백이 지붕으로 꽉 막힌 천장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마치 하늘을 투영하듯이.


[고약한 취미로군.]


차크몰의 눈이 묘하게 꿈틀댔다.


[무슨 말이지?]


풍백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만큼 이곳을 아는 신도 많이 없을 것이다. 이곳은 우사가 아끼던 곳이었으니까.]


우사의 이름이 나오자 차크몰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 증거로는 차크몰의 무기인 역설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옛 탁저에 맥을 끊는 이 건물을 지은 것은 아무렴 우사의 심기를 건드리기 위함이겠지. 네가 살아있을 적 넌 우사에게 늘 밀렸으니까.]


차크몰의 하관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입 닥쳐라.]

[옹졸하고 하찮은 짓거리는 그만둬라. 수긍하고 받아들여. 넌 이미 죽었다.]

[그 입 닥치라니까아아아!]


차크몰이 분에 이기지 못하고 역설의 불꽃을 휘둘러 풍백을 공격했다.

역설의 이름에 걸맞은 격이 방출되었다.

횃불에서 불꽃 대신 뾰족하고 날카로운 빗방울이 날아든 것이다.


촤아악!


하지만 풍백은 이런 구도에 도가 튼 신이었다.


[한참 약하다. 겨우 이 정도로 우사를 이겨 먹으려 했단 말이냐?]


분노의 신이 이제는 차크몰의 반대편에 서 그를 훼방 놓았다.


촤라라락.


마치 물웅덩이를 밟으며 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차크몰이 풍백의 앞에 당도했다.

풍백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화」를 이용해 공격을 흘리며 다시 나아갔다.


[녀석이 사용한 「풍화」는 그저 단편에 불과하지.]


허공에서 들리는 신언에 차크몰이 당황했다.


[너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넌 내 편린밖에 보지 못했다.]


날카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촤악!


‘날카로운’ 바람에 의해 속수무책 차크몰이 바스라졌다.


후두둑.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붉은 피가 그 자리를 다시 메웠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처 부위를 말아 쥔 차크몰이 물러서기는커녕 다시 한번 「풍화」가 해제되어 나타난 풍백에게 달려들었다.

이것까지는 예상을 못했는지 풍백의 얼굴에 은연한 당황이 나타났다. 하지만 거기까지.

백전노장인 풍백은 어느때보다 빠르게 대처했다.


[역시 싸울수록 강해지는 건가? 가끔 시스템의 법칙은 이해하기 힘들단 말이지.]

[너는··· ··· 지금껏 여유부린 상황을 후회하게 될 거다.]


풍백이 가라앉은 얼굴로 답했다.


[··· ···.]


침묵의 대답에 차크몰의 분노가 또다시 쌓였지만 어떤 것을 계획하듯, 그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 이 분노는 허용되지 않았다는 듯 그것을 꾹꾹 억눌렀다.


[심장을 바쳐라.]


차크몰이 나지막이 그 문장을 읊자 멕시코의 어딘가에서 검정과 동시에 붉은색이 천천히 서로를 휘감으며 빠른 속도로 차크몰에게 향했다.


파아앙!


삽시간에 차크몰의 심장을 파고든 그 정체불명의 것은 다름 아닌 심장이었다.

아주 과거 인신공양을 당하던 이들의 심장.

그 심장을 제대로 받아들인 차크몰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풍백이 낸 무수히 많은 생체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물기를 반복했고, 상상력은 허용 상상력을 뚫을 듯 가득 찼다.


[이래서 내가 너희 성단 종족들을 혐오한다.]

[내가··· ··· 말했을 텐데. 여유를 부리지 말라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탁!


차크몰이 풍만한 상상력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에 처참하기 짝이 없게 나뒹굴던 불의 역설이 환하게 타오르며 강대한 불꽃을 뽐냈다.


화르르륵!


그에 걸맞은 불기둥이 풍백의 주변으로 솟았다.


[기름인가?]

[빨리도 알아채는군.]


착화성 물질을 양껏 뿌린 차크몰이 승리를 확신한 듯 조소를 머금었다.


[활활 타올라 잿더미조차 남지 않게 하라아아아아!]


남자아이의 얼굴이 광기로 물들며 쾌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풍백!”


다급히 풍백을 부르짖은 이찬을 놓칠 리 없는 차크몰이 눈 깜짝할 새에 이찬의 앞으로 나타났다.


[네가 있었지. 이제 내 영광스러운 이야기의 제물이 되어라.]


이찬은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마주하며 웃었다.

이전의 차크몰이었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허탈함으로 인식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차크몰이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달라진 배경과 풍경이었다.

금과 은빛의 연회장은 온데간데없고 새로 나타난 풍경은 드넓은 푸른 초원에 주변을 넓게 감싸고 있는 폭풍이었다.


[이찬. 잘 봐 둬라.]


풍백이 불길을 헤치자 불이 명령을 따르는 듯 사그라들었다.


[이게, 곧 네가 걸어야 할 길이다.]


차크몰이 흠칫 이찬과 풍백에게서 멀어졌다.


[너 설마··· ···!]


낌새를 눈치챈 차크몰이 경호성을 발했지만 이미 늦었다.


[성지화. 「폭풍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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