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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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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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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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멸의 비애 (4)

DUMMY

터벅터벅.


이찬과 헤카테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암흑 위를 걷고 있다.

이찬은 정신을 집중했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길을 잃을 것이라는 왠지 모를 강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렇게 몇 분을 내리 걸었을까.


[도착했다.]


헤카테의 정성적인 안내로 이찬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누군가에게 도달했다.

이찬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궁금증이었다.


“여기 누가 있나?”


텅 빈 공터. 사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아무런 기척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성미가 급했던가··· ···.]


알 수 없는 독백을 반복하던 헤카테가 양손 깍지를 끼고 뭔가를 읊조리듯 외었다.


[이 세상 존재들의 모든 죽음을 관장하시는 《이상》의 파편이시여. 출입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끼기기긱!


과하게 녹슨 경첩의 소리가 기괴할 정도로 크고 어지러이 울리며 이찬의 귀를 세게 때렸다. 그러나 이찬의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입구가 어디에 있는 거지?”


문이 열리는 소리는 분명했지만 어디에도 건물은 없었다.

어디에도 문이 없었고, 아무데도 그 무엇도 없었다.


[따라오렴.]


헤카테가 이찬을 불러 공터의 입구를 밟도록 시켰다.


“무슨··· ···.”


[잔말은 말고.]


헤카테의 말을 듣는 것 이외에는 방도가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이찬은 그녀의 말 대로 공터의 경계에 발을 댔다.


우우우웅!


그러자 이찬의 신체와 공터의 공기가 공명하듯 요동쳤다. 이내 이찬은 검보랏빛 연기에 둘러싸였고, 이내 서서히 몸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이찬이 헤카테에게 버럭 역정을 냈다.


“너 이 새··· ···.”


그러나 헤카테는 그곳에 없었다.

반대편에서 이찬의 어깨를 잡고 서 있을 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문득 이찬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


기시감.

그뿐이었다.


이내 이찬의 몸은 어두운 그것으로 가득 감싸졌고, 이내 몸은 부식되듯 사라져갔다.

고통은 없었다.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후우웅!


강한 풍음(風音)을 흩뿌리며 나타난 곳은 어느 작은 단칸방이었다.

양옆으로 가득 찬 책장을 둘러보며 헤카테를 따라 간 곳에는 어떤 남성이 탁자에 앉아 단안경을 끼고 책을 염서하고 있었다.

헤카테가 정중하게 다가가 그에게 보고했다.


[행동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끼고 있던 단안경을 벗어 내려 놓고 그녀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알겠습니다.]


하나의 반문도 없이 복종한 그녀가 바깥으로 쫓겨나듯 나갔고, 방에는 이찬과 남성 둘만이 남아 있었다.

장발의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꽤 난항을 겪었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그럼 왜 여기에 있지?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인 것 같군.’


이찬이 온갖 추측을 제 머릿속에서 가다듬고 있을 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사람이라니. 너무 말이 심한데.】


기이이이잉!


고막에서 이명이 쏟아지며 이찬의 고막이 터졌다.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듯 답지 않게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른 이찬이 귀를 잡고 뒹굴었다.


【아, 너무 심했나.】


남성의 상상을 초월하는 신언에 이찬이 피를 쏟아냈다.


[아아. 크흠.]


여타 다른 신들과 신언의 수위를 맞춘 남자가 목을 가다듬었다.


[미안하다. 격이 낮은 존재와 소통하는 것이 너무 간만이라.]


남자가 손을 한 번 빙글 휘두르자 피가 멎고 고막이 수복되며 이른바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찬이 지친 기색으로 남자의 정체를 물었다.


“대체 누구지··· ···?”


그러자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딴 게 새 행동자라니. 헛웃음이 마구 튀어나오는군.]


남자가 읽던 책을 덮고 이찬과 눈을 마주했다. 이찬의 몸에 소름이 돋으며 남자의 정체를 유추했다.


“너는··· ···.”


남자는 이찬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찬의 말이 끊어지기 전에 답했다.


[네가 말하려는 것이 맞다. 너는 나다.]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연신 흘렀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네. 아 이렇게 얘기하면 되겠군. 나는 너였다. 너는 내가 될 거고.]


“뭐라고?”


이찬이 반문하며 그의 정체에 한발짝 더 다가가기 위해 애썼다.

남자는 마치 그런 이찬을 놀아주듯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의 장발 너머로 이찬과 같은 안광이 내비쳤다.


[책을 읽는 건 마음의 양식이라고들 하지.]


어영부영 다른 소리를 하는 남자를 이찬이 재촉했다.


“헛소리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너 누구야?”


[아무렴 나는 안 그랬던 거 같은데.]


여전히 실없는 소리를 하던 남자가 책을 피며 말했다.


[내 「매개체」는 책이었다. 네 「매개체」는 뭐지?]


“매개체?”


이찬이 처음 듣는 개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떤 상식도 전무(全無)하단 말인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앉지.]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단칸방에 안락의자가 생겨나며 이찬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긴 머리를 넘기며 이찬의 주변을 거닐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이찬은 경악했다.

노화는 되었지만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리라.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까.]


이찬의 주변을 배회하듯 거닐며 남자가 이야기의 주제를 정했다.


[그래. 매개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군. 매개체가 뭔지 아나?]


“아까 뭘 들은 거야. 모른다고.”


[그럴 줄 알고 말한 것이지.]


남자가 이찬을 골리며 킥킥 웃었다.


[내 매개는 책이었다. 그리고 네 매개는··· ···그래, 눈이구나.]


이찬은 그제서야 「매개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매개체」라는 게··· ···.”


[그래. 행동자에게 주어진 특권이지.]


남자가 이찬의 맞은편에 안락의자를 하나 더 만들어 푹신한 그곳에 자리했다.


[너는 눈 덕분에 어디든 마음대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그렇지?]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찬은 이제 속내를 감추지 않기로 했다. 묘한 신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 책은 단순한 「매개체」였다. 아무런 기능도 없는 그저 종이조각. 그뿐이었지.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책을 펴면 《관념》으로 이동했다. 어떤 책을 펴든 그랬다. 소설을 펴도, 동화를 펴도, 심지어는 연 것 안에 종이가 들어 있었다면 그마저도 내겐 매개가 되었다.]


남자가 한탄하듯 읊조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나마 책을 이리 좋아하게 된 걸지도 모르지. 무튼, 난 그곳에 다가간 첫 행동자였다. 521번째였던가.]


“그곳?”


[다시 묻지 마라. 차례로 알게 될 테니까.]


남자가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아니, 이찬과 자신의 공유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그것에게도 점점 다가갔고, 마침내 신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전후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는 어떻게 됐지?”


[이겼다면 여기엔 나 대신 내 상대가 있었을 거다.]


“졌다는 거로군.”


[너무 콕 집어 말하지 않나.]


남자가 앞에 간단한 음료를 만들어 내놓았다.


[마셔라.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다.]


이찬이 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이리저리 훑더니 남자를 째려보며 말했다.


“정말 너는 나인가?”


[그래. 나는 너였다.]


“자꾸 반복하는데, ‘너였다’가 대체 무슨 말이지?”


[지금의 나는 보다시피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혼이나 성주는 더더욱 아니지.]


딱 봐도 인간이라면 느껴져야 할 감정이, 영혼이라면 드러나야 할 영기가, 성주라면 표출되어야 할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머리가 충분히 복잡한 건 안다.]


“그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래서 난 단 한 가지만 충고해 주려 한다.]


“충고?”


충고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던 이찬에게 남자는 신신당부했다.


[네가 시스템과 세계의 체계를 부수려 하는 걸 안다.]


“놀랍지도 않네.”


[그건 모든 행동자들의 숙명이었고, 모든 이찬들의 의무였다.]


“이찬’들?’”


[이부분은 차차 알게 될 거다. 어떤 존재는 때론 언급만으로도 모든 상상력을 소모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필리브크랩트가 누군지 아나?”


필리브크랩트.

풍백의 서재에서 여럿 봤던 저자의 이름이자 헤카테와 키트리노스의 언급에서 마주한 존재.


[필리브. 잘 알지. 그놈이 마지막 행동자였고, 결국 이상이 되었다는 것까지 알지.]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나.”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결국 여기도 《관념》의 일부분. 《관념》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의 감시를 받게 된다.]


“그게 시스템을 칭하는 말이라면, 모순적이지 않나?”


이곳에는 시스템이 없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간섭할 존재도 없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놈은 시스템을 애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매개는 시스템이 아니지. 더 높은 고차원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 모든 걸 알고 있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호언장담할 순 없지만, 아마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대화 정도는 알 수 있겠지.]


남자가 자리에서 의자에서 일어서며 다시 단안경을 착용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뭐?”


[한 가지 말해 줄 수 있는 게 있긴 하다.]


“그게 뭐지?”


이찬이 은근 기대하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남자의 말은 이찬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


[너는 더 강해져야 한다. 그 정도로는 시스템은커녕 주신조차 쓰러뜨리기 힘들어. 네가 이미 한 단계 초월한 것을 알고 있다. 그 감각을 잃지 않도록 하라.]


신뢰가 충분한 말이었다.

이찬이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겠다.”


[응? 더 궁금한 것이 있나?]


“백호를 공격하라 지시한 게 너인가?”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던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가 지시했다.]


“왜지?”


[그 또한 네 성장의 일부다. 자세한 건 헤카테에게 묻도록.]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이찬의 몸으로 검보랏빛 연기가 휘감겼다. 이곳으로 올 때 느껴졌던 그 기분이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이찬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들을 최대한 많이 접촉해 정보를 얻어라. 퍼즐처럼.]


마지막으로 들린 남자의 음성과 함께 이찬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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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영멸의 비애 (5) 24.04.17 21 0 11쪽
» 영멸의 비애 (4) 24.04.14 19 0 10쪽
123 영멸의 비애 (3) 24.04.12 21 0 11쪽
122 영멸의 비애 (2) 24.04.10 18 0 12쪽
121 영멸의 비애 (1) 24.04.07 17 0 11쪽
120 경계 (7) 24.04.05 18 0 11쪽
119 경계 (6) 24.04.03 18 0 10쪽
118 경계 (5) 24.03.31 21 0 11쪽
117 경계 (4) 24.03.29 14 0 11쪽
116 경계 (3) 24.03.27 2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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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성지화 (11) 24.03.13 23 0 11쪽
109 성지화 (10) 24.03.10 28 0 12쪽
108 성지화 (9) 24.03.08 24 0 11쪽
107 성지화 (8) 24.03.06 2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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