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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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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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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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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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화 (6)

DUMMY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신들의 비명과 고통 섞인 생명체들의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들려왔다.

개중에는 이찬의 동료들의 소리도 섞여 있음이 분명했다.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찬을 시선에서 떼지 않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사건의 주동자로 의심되는 올림포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총애를 받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으로, 심지어 그녀의 이명마저 ‘달의 총애를 받는 자’로 지어졌을 만큼 아르테미스에 대한 충성도가 엄청나다.

그녀의 이름은 아탈란테.

긴장감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이찬이었다.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그러자 아탈란테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역으로 질문했다.

호의적인 미소는 분명 아니었다.


[우리가 왜 널 죽이지 말아야 하느냐?]


끝없이 들려오던 비명과 신음이 한 번에 멎는다.

귀는 듣는 것을 거부하고, 뇌는 이를 기록하기 거부한다.

입은 그 양 입술을 벌어지게 두지 않았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할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왜 죽이지 말아야 하냐고? 당연하잖아. 무엇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하지? 매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이젠 우리의 터전을 잃어야 하는 거지?’


이찬이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상념은 상념을 잇고, 이어진 상념은 이내 분노에 닿았다. 닿은 분노가 가리킨 곳은 오른 주먹이었다. 정확히는 오른 주먹에 쥐어져 있는 ‘기도’였다.

불끈 쥔 주먹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검파(검의 손잡이)가 부서질 듯 끼긱, 마찰음을 냈다. 하지만 세기의 명장이 만든 검답게 절대 부서지지 않았다.

이는 이찬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했다.


‘어떤 상황이 있어도 부서지지 않으리. 부서질 일 없게 하리.’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르테미스가 그리 말하더냐?]


풍백이었다.


[<올림포스>. 너희들은 분명 성전에서 패해 영향력을 거의 잃었을 텐데. 어떻게 지구에 현현할 수 있었지? 너희들이 성전에서 패하고도 지구에 현현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많은 성단이었나?]


방금 풍백의 발언은 <올림포스>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성단도 전방위적으로 공격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 우주를 통틀어 보아도 <올림포스>보다 총 상상력이 많은 성단은 드물다.

그 마저도 타 성단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

그런 성단에게 풍백의 발언은 타 성단 소속의 신이 들으면 극대노하며 하림해도 무죄인 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풍백도 생각이 없진 않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이를 다른 신들께서 들으시면 당신과 <태극>은··· ···.]


아탈란테는 <태극>의 천신 풍백을 알아보곤 곧장 말투를 존댓말로 바꾸었다.

이찬이 풍백에서 아탈란테로 시선을 옮기자 역시나 아탈란테는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당황했고, 황당을 드러냈다.

또한 황당함이 범람했기 때문일까, 아탈란테는 풍백의 앞에서 <태극>을 언급했다. 그 발언은 현재 큰 타격을 입어 회복 중에 있는 대성단 <태극>과 그 타격의 지분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는 풍백을 동시에 도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풍백은 그저 평온했다.


[맞는 말 아닌가? 성전에서 패해 놓고 이 어린 아이 하나 잡으려고 지구에 하림까지 하나? 제대로 정신 나간 집단이 아니고서야 실행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지. 아니면··· ···믿는 구리고 구린 구석이 있다거나?]


아탈란테가 분노를 참기 어려운 듯 고개를 까딱하자 이때다 싶은 풍백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말한 건 이 얘기를 누군가가 ‘들으면’이라는 거지 않느냐? 여기 누가 있어? 너와 나 말고, 너희 동료 말고, 우리 동료 말고 누가 있느냔 말이다. 제대로 격도 펴지 못하는 마당에 시스템이 여기 들어찰 구멍이 있나?]


풍백의 말은 아탈란테의 정곡을 찔렀다.

이미 신들의 상상력에 의해 허용 상상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쓰고 있는 상황에 시스템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발언이었다.


쿠구구구구국.


씻을 수 없는 위압감과 압도적인 상상력이 아탈란테를 짓눌렀다.


[그리고, <태극>이 뭐라고 했느냐.]


아까는 유하게 넘어가는 듯 보였지만 역시나 마음에 담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천신의 하수인 따리밖에 안 되는 놈이 <태극> 들먹이느냐.]


[커헉. 컥!]


아탈란테가 고통을 호소하며 목을 붙잡았다.


[한 번만 더 그 주둥아리에서 <태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지를 찢어 발겨 죽이겠다.]


한창 언쟁을 벌이던 풍백이 갑자기 이찬의 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허용 상상력이 다했다. 이제 네 차례다.]


‘예?’라고 반문할 틈도 없이 풍백은 바람으로 화해 이찬의 내부로 다시 들어왔다.

그제서야 아탈란테는 숨을 몰아쉬었다.

천신은 존재만으로도 타 존재에게 깊은 압을 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상상력이 가득 담긴 신언 때문에 질식사 직전까지 간 아탈란테였다.


[후··· ···. 이제야 좀 편안해졌군.]


하지만 이찬은 아탈란테에게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질문?]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저 태도.

그런 태도가 한층 더 이찬의 분노를 유발했다.


“왜 우리를 죽여야 하—”


[아, 그거? 그거 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기 때문이지.]


생각보다 더 무미건조한 대답에 결국 이찬이 폭발했다.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했어. 빌어먹을 이 세상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내가 행동자가 되고 싶어서 된 거야? 아니 난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어. 평범한 고등학생. 그런데! 대체 왜! 내가 너희의 표적이 되고 사살의 대상이 되는 거냐고.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참아왔던 감정.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그 감정이 울컥 범람했다.

아윤을 찾기 위해 난생 처음 보는 세상인 《관념》을 헤집고, 옥황상제의 반강제적 권유로 투쟁대회에 나서고, 무기를 받고 여러 행성과 성단을 오가고.

결국 안면도 없는 남과, 그것도 마신(魔神)이라 불리는 괴물과 말이다.

결국 이겨내 친구를 되찾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이찬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우연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이는 계속되었어. 가스페르에겐 《관념》의 병사들이. 이노에겐 자객이 갔다. 둘 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겨우 돌아와 연유 모를 기연으로 지구에 다시 모였고, 너희들은 또다시 이런 사태를 벌였지. 이것 모두 내가 택한 일이 아니야.”


이찬이 《관념》으로 넘어온 이후 스스로 결정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아윤의 구출과.”


절그럭.


이찬의 기도가 소리를 내며 동조하듯 흔들렸다.


“이 검의 이름.”


이찬이 촉촉해진 뺨과 눈 주변을 문질러 닦았고, 제대로 아탈란테를 응시했다.

이어 아탈란테의 입이 열렸다.

그 빌어먹을 입에서 나온 말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단 세 어절.

그 세 어절에 이찬은 머리가 핑 돌고 말았다.

게다가 이어진 말은 더 가관이었다.


[어쩌라는 거냐. 위로라도 해 달라고?]


대개 신이란 족속들은 다 비슷하다.

감정은 결여되어 있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설령 그것이 생명을 해하는 일이더라도.

사실 신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봤으니까.

너무 많은 상상력의 범람과 요동을, 그리고 메말라가는 상상력을 수없이 지켜봤으니까. 수없이··· ··· 겪어 봤으니까.


평생 쓸 감정을 모두 소진한 이들은 이제 꼭두각시 인형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가끔 새로운 유형의 상상력이 신의 머릿속에 잔류하는 순간에는 감정이 풍부해진다.

지금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안타깝지만 난 지금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 줄 상황이 아니다. 그게 내 표적인 너라면 더더욱.]


이찬이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참고 요동치는 분노를 제어했다.

그것이 이찬의 특기였다.

감정을 숨기고, 본성을 감춘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어린 시절. 누군가가 이찬에게 로봇이라는 별명을 붙여 준 기억이 생생했다.


“차라리 로봇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로봇은 감정이 없다.

인위적인 감정을 나타낸다 한들 결코 그것은 진짜가 될 수 없다. 그저 질 떨어지는 모조품일 뿐.

그런 면에서는 어쩌면 신과 로봇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찬이 아탈란테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하려는 말은.”


이찬이 눈에서 옅은 안광을 뿜어냈다.


“이젠 내가 정한 길로 갈 거야.”


결연한 표정의 이찬이 검을 고쳐 잡았다.

이찬은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관념》에 있던 내내 생각했다.

마치 군대에서 갓 전역한 20대 남성처럼 말이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놓인 걸까. 내가 이런 지독한 세계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말이다.


“남이 정해 주는 삶은 살지 않아. 나와 나의 동료를 해하는 이들을 모조리 소멸시켜 주마. 그런 새끼들을 박멸하기 위해선 이 빌어먹을 사태를 묵인한 《관념》부터 사라져야 한다. 나는.”


기도의 검 끝이 아탈란테로 향한다. 아니, 아탈란테의 배후에 있는 모든 것으로 향한다.

명백한 악역의 추태와 그 뒤에 감춰진 추악한 사실을 부수기 위해서.


“《관념》을 멸망시킨다.”


이찬이 스스로 내리는 첫 번째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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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영멸의 비애 (2) 24.04.10 18 0 12쪽
121 영멸의 비애 (1) 24.04.07 17 0 11쪽
120 경계 (7) 24.04.05 19 0 11쪽
119 경계 (6) 24.04.03 18 0 10쪽
118 경계 (5) 24.03.31 21 0 11쪽
117 경계 (4) 24.03.29 14 0 11쪽
116 경계 (3) 24.03.27 23 0 10쪽
115 경계 (2) 24.03.24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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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성지화 (13) 24.03.17 21 0 12쪽
111 성지화 (12) 24.03.15 19 0 11쪽
110 성지화 (11) 24.03.13 23 0 11쪽
109 성지화 (10) 24.03.10 28 0 12쪽
108 성지화 (9) 24.03.08 25 0 11쪽
107 성지화 (8) 24.03.06 23 0 10쪽
106 성지화 (7) 24.03.03 27 0 10쪽
» 성지화 (6) 24.03.01 22 0 10쪽
104 성지화 (5) 24.02.28 36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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