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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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해품글
작품등록일 :
2023.07.16 15:33
최근연재일 :
2023.1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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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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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졸(卒)의 길

DUMMY

흥선군도 짜증이 섞인 소리로 투덜거렸다.


"귀신이오? 어찌 방에 앉은 사람이 잔 기침소리 한 번을 내지 않으시오!"


"아이쿠 이런, 내가 너무 조용해서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소리가 나는 곳을 둘러보니, 맞은편 방문 앞으로 내려진 수국이 채색된 발 뒤에서 나는 사람의 소리 인 것 같았다.


"예서, 뭐하시오. 흥선군?"


발의 가장자리로 손 하나가 슬그머니 나오더니,

수국이 일그러지도록 옆으로 제쳐 낸 발 사이로, 김 우진이 얼굴을 쏙 하고 내밀었다.


"아, 우진 도령이셨소?

나야 뭐 술 찾아다니는 게 일상인 사람이니, 예서 만나는 게 어디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하하!

그런데 오늘은 혼자이신가 봅니다. 어찌 술이 좀 남았습니까?"


"내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지 않았겠소!

그래도 술 한 잔을 다 비우기전에 이렇게 오시다니 ... 많이 궁금하셨던가 봅니다."


"무엇이 말이오?

허기 사 내가 안 채 술 방엔 많이 기웃해 보았지만, 뒤 채가 있다는 얘길 들었으니 안 궁금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 곳엔 얼마나 귀한 사람들이 모이는지 궁금할 만 하지요.

귀한 사람들이라면 분명 귀한 술이 있을 터, 어찌 그걸 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소. 하하!"


김 우진이 내다보는 방안으로, 어느새 머리부터 쑥 들이 밀 던 흥선군이 이미 차려진 소담한 술 상 앞으로 자리를 틀고 앉았다.


"네, 기개가 좋습니다.

딸꾹질 한번 하지 않고, 이런 얘길 만들어 내시는 걸 보면 말입니다!"


"딸꾹질은 무슨, 나는 술을 거하게 먹어야 딸꾹질이 납니다.

딸꾹질이 듣고 싶으면, 어서 그 술잔부터 좀 채워 주시구랴!"


"간교하고, 대범하고, 높고 낮음에 신경 쓰지 않으니, 탐은 납니다.

하지만 내가 흘린 말을 따라 이곳까지 이렇게 왔다면 ... 필시 우리 쪽은 아닌듯하니, 아까울 따름이군요."


술 한 잔을 맛깔스럽게 틀어넣던 흥선군이 야무지게 입맛을 다시며 김 우진을 바라보았다.


"사실 내 궁금한 게 있긴 있습니다.

요 얼마간 영상대감께서 시키신 일을 하고 있기는 하다만, 우리 편 남의 편이라고 하는 말들도 나오는 걸 보니 말이에요.

우리 조선에 ... 혹여 무슨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겁니까?"


흥선군의 이야기에 입 꼬리를 한번 쭉 하고 올리던 김 우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이 날카로운 웃음기를 흘리고 있었다.


"저는 사실 총에 맞거나 칼에 베어서 일찍 죽기는 싫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아프겠어요.

미리 얘기라도 살살 좀 해주시면, 식솔 들만 간단하게 챙겨서 산으로라도 피해 있으면 아니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정을 봐서라도, 그 정도쯤이야..."


애처로운 눈빛까지 지어 보이던 흥선군이, 김 우진의 날카로운 눈빛을 애써 피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창고에 숨겨두었다는 무기를 구경하러 이 곳까지 몰래 들어올 만한 사람이, 그렇게 겁이 많은 척 둘러대면 모두 웃습니다."


"그래요? 나도 몰랐는데, 내가 많이 용감하긴 한가 봅니다...?"


"누구를 위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가진 무기의 양에 대해서, 혼자서만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누구를 위한 사람이냐구요? 제가요?... 난 그런 거 없는데?

그러면 영상대감 쪽 일을 해주니까... 영상대감 쪽 사람이 아닌 겁니까?"


흥선군의 지나친 너스레에 기분이 상한 김 우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았다.


"보세요 흥선군, 어차피 졸(卒)은 졸의 길만 가야지 문제가 없습니다.

졸은 뒤로 물러서서 장기판을 살펴 볼 수 없어요. 시키는 대로 옆으로 잠시 피하거나 앞으로만 가야 하지요.

그러면 장기판이 끝날 때 까지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




"이리 오너라! ... 이야 정말 크네."


향리에 은거한 양반이지만 일찍이 한양에서 청직을 맡으며 보낸 세월의 흔적은, 지금도 그의 모습을 충분히 귀하게 보이도록 해 주었다.

얼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아 대문이 열리고, 깨끗한 옷을 입은 하인 둘이 허리를 조금 굽힌 채 손님을 맞았다.


"유삼을 돌려 드리러, 노 상추라는 자가 왔다고 말씀드려 주게나!"


"네 들어 오십시요. 나리!"


노 상추가 옆의 하인에게 유삼을 건네 준 후 대문 앞에서 함께 기다릴 동안, 주인의 허락을 받으러 간 다른 하인이 바쁜 걸음으로 돌아왔다.


"나리, 사랑채로 모시겠습니다요."


"그래, 가세나!"


'뭐가 이리 넓어? 한양물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댓돌위로 푸른빛의 가죽신이 참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대감마님, 노 상추 어른 드셨사옵니다."


대답대신 맘씨가 후덕한 양반이 직접 일어나 문짝을 열어젖혀 손님을 맞았다.


집의 위용에 비하면 방의 모양은 별다른 물건은 없었지만, 맑은 여백의 글귀로 표구된 병풍을 휘두른 모습이 단아하고 고오한 멋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상추양반. 번거롭게 유삼은 무엇 하러 가져 오셨소. 함께 술이나 한 잔 기울이다 가시면 될 것을,"


"아닙니다, 유삼 덕에 이렇게 나리를 찾아 뵐 이유라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래그래. 그럽시다."




이내 또다시 방문이 열리고, 맛깔스런 음식이 즐비한 술상이 내어져 왔다.


"자자 한 잔 합시다. 노 선비 !"


"아이쿠 이건 신선로! 이야 이거 ... 융숭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접은 무슨! 진주까지 와서 백성들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해도, 누구하나 그 고충을 알아주지도 않았을 터인데.

오늘에 사 술 한잔으로 다 털고 갑시다!"


"이거 말씀 만으로도, 모든 피곤이 다 날려가는 것 같습니다. 하하!"


술 몇 잔에 지기가 된 듯,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어색함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며칠 후 수곡장터에서 열릴 집회의 분위기가 많이 거칠어 질 것 같네."


이 명윤의 한숨 섞인 걱정이 새어나왔다.

그 생각을 미처 잊어버렸던 노 상추가, 찔끔 놀라는 표정과 함께 눈앞의 이 신선 같은 자태의 선비를 쳐다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유 계춘이라는 사람의 의지가 대단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특히나 여기 진주 쪽 관리들의 횡포가 너무 포악한 편이기는 하지.

백성들의 분노는 십분 이해가 가긴해... 하지만 이건 방법이 아니야! "


"잔뜩 화가 난 백성들에게 그 기운을 부채질 한다면, 분명 순박한 백성들의 분노는 정도를 모르고 어느새 폭동으로 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하네. 만약 감영이나 나라에서 이들의 폭동을 말로만 타이르기에 그 정도가 넘는 상황이 된다면,

관에서는 난을 다스리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노 상추도 이젠 술잔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심각함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을 향해서 조총과 칼을 휘두르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이지."


"아...네. 하지만, 임금께서는 윤허를 하지 않으실 겁니다.!"


원범을 떠올리던 노 상추가 나름 자신 있다는 투로 대답을 이었다.


"이 사람아, 어디 이 나라가 임금님 한 분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일이 잘 있던가!

내가 이곳 향리에 묻히려는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조정의 흐름이 너무 엿 같아서였네."


"아...네, 엿...!"


이 명윤의 인간적인 발언에, 하마터면 웃음이 풋 하고 새어 나올 뻔 했지만 잘 참아 낸 것 같았다.

욕 발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정도를 잃은 모습을 매일 보는 게 힘 들었어.

내가 관직을 마다하고 떠나려 할 때, 전하께선 작은 나의 힘이라도 붙잡고 싶어 하셨지.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네.

아무리 나 같은 힘 백 개가 보태어 진다고 해도, 바뀌어 질 일이 아닌 것 같아 보였거든."


노 상추가 거칠게 술잔을 집어 들어 목구멍으로 들이 부었다.


"궁에선 말이지. 불충한 자들을 곁에서 보고만 있어도 홧 병이 날 것 같고, 혹시 잘 못 되었다고 나서서 설쳐대다간 바로 이 목이 달아나 버릴 것 같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네."


"네, 어디 나리만 그러하시겠습니까..."


멋쩍은 표정을 짓던 이 명윤이 다시 단호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하니, 이 곳에 내려와서 만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고 하네. 자네도 함께 해 주게."


"네...그야 물론이지요. 나리."


"앞으로 백성들이 모이는 모든 집회장소와 모임에는 빠짐없이 참석을 해야 하네.

그리고 그들의 동향이 그릇된 곳으로 향한다면, 우리는 힘을 다해 그들을 막아야 해."


그의 비장함에 사뭇 놀란 노 상추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의 말을 들으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나리."


"우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후, 관군들에게 백성들의 의지를 전해야지.

백성들을 달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노 상추의 얼굴에 조금씩 그늘이 끼었다.


'백성들보다 먼저 이 사람이 큰일을 치르겠는데...'


"나리, 그러면 오히려 관군들은 나리를 주모자로 몰아 갈 것입니다.

일이 잘못된다면, 나리가 먼저 끌려가실 수 있습니다."


"자네도 함께 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네? 아, 네...그렇...지요."


노 상추의 머릿속에는 온통 맑고 환하게 웃는 연이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서는 그 입김이 약하지. 노련하고 힘 꽤나 쓸 수 있는 양반들이 몇몇 필요해.

자네처럼 백성들이 고개 숙이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지.

우리가 중간에서 백성들의 방패막이 될 것이야."


"나리,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없다면, 순박한 백성들은 그들의 힘으로만 관에 맞서려 할 게 뻔 한 일이지.

그들의 수많은 목숨에 비해 우리 같은 양반들이라면, 그 수보다도 훨씬 작아도 가능성은 훨씬 클 수 있다네."


현실을 느끼기 시작한 노 상추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었다.

오늘 술 먹으러 괜히 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관에서 양반들이라도 봐주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야 뭐... 각오를 해야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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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10.30 01:33
    No. 1

    작가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출장중이라 제대로 못 보는데 조만간 재밌게 쭉 읽겠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10.30 03:03
    No. 2

    앗. 안녕하세요 베르겐님~
    이렇게 항상 글을 찾아 주시는 것만도 정말 감사한데... 늦은시간에 댓글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아껴주시는 한분의 마음이 글을 참 빛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얼마남지 않은 철종의 여정 잘 이끌어 가겠습니다.
    편한밤 되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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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강화로 가시지요. 23.11.05 71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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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시작된 농민항쟁 +2 23.11.01 81 4 11쪽
107 움트는 진주민란 23.10.31 70 3 12쪽
106 섭정왕 23.10.30 77 5 12쪽
» 졸(卒)의 길 +2 23.10.29 84 4 11쪽
104 엽전 헹굼 23.10.28 68 4 12쪽
103 나랏일만 생각할 것이다. 23.10.27 72 4 12쪽
102 출결장 23.10.26 81 4 11쪽
101 추노꾼잡는 귀신 23.10.25 87 4 12쪽
100 비밀 향회 23.10.24 77 5 12쪽
99 선대왕의 유산 23.10.23 81 5 11쪽
98 조총을 가져오게 23.10.22 9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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