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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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23.07.16 15:33
최근연재일 :
2023.1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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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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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왔는가

DUMMY

"명부 상선, 대왕 대비전의 전갈입니다. 받으세요! "


푸른 술이 달린 노란 옥패와 함께, 빛바랜 서찰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으로 전해졌다.


"어허, 마마님. 하는 일도 없이 방구석으로 물러나 앉은 지가 오랩니다! 나라의 녹만 받는 처지자 된 것도 송구한데, 아직도 상선이라고 부르시면 이런 불충이 어디 있겠습니까!"


"명부 상선도 참, 대왕대비께서 그 정을 잊지 못해 항상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소인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망극한 일이... 대비마마의 소식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연통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네, 상선 영감. 그리고..."


명부 상선의 귓전으로 가까이 다가간 엄 상궁의 입술이 야무지게 옹알거린 후 물러났다.

이내 상선의 얼굴표정도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마마님.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영감만 믿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엄 상궁이 떠난 후, 잠시 생각에 잠겨들던 명부 상선이 하얀 문풍지 사이로 몰려오는 저녁 어스름을 한 동안 응시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영감마님... 촛불을 댕기도록 하겠습니다!"


방안의 촛불을 켜기 위해 다가온 하인의 인기척에 마침 생각이 끊어진 그가, 문 밖을 향해 소리를 건넸다.


"됐다. 무영이를 부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요. 영감마님."


추노꾼에게 잡혀온 어미와 아비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후, 핏덩이 아이를 노비문서와 함께 버리듯이 헐값에 내 놓은걸 데려와 키워온 아이였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맑았고 명부 상선을 아비처럼 따르며 섬겼다.


"영감마님, 무영입니다."


"그래, 들어오너라."


상선의 손에는 낡아 보이는 또 다른 종이뭉치가 몇 번이 접힌 채로 들려있었다.


"촛불을 댕기거라!"


"네, 마님."


무영이 부싯돌화로의 불씨를 옮겨 조심스럽게 촛불을 밝혔다.

지켜보던 명부 상선이 기다린 듯,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촛불위로 올려 불씨를 빨아들였다.

질이 좋지 않은 탓인지, 검은 연기를 담뿍 뿜어내며 종이는 무겁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영감마님, 이건..."


"그래, 너의 노비 문서니라. 지금까지 이런 삶도 살아 보았으니, 이제는 네가 원하던 대로 천불암으로 가서, 네 뜻대로 운명을 만들어 가거라!

내 진즉에 유연선사께는 말씀을 드려 놓았으니, 선이가 하산하는 날에 너를 올려 보내기로 하였다.

너 또한 선사께 가르침을 잘 받아, 후일 나라를 위해 그 힘을 아끼지 말고 쓸 수 있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구나!"


"아...영감마님... 어떻게 이런 일을...감사합니다! 마님..."


"그만하면 됐다. 우선 이 서찰과 옥패를 가지고 천불암으로 가서 유연 선사께 전해드려야 한다. 한시가 급한 일이니 지금 바로 빠른 말을 타고 나서도록 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도 가서 그대로 전해드리도록 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영감마님...!"



****



사부의 사래가 채 잦아들기 전에 말을 탄 사내가 벌써 사립문안을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매서운 사내의 눈빛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것은, 이제껏 사부에게서 말로만 듣던 무사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촉을 느끼는 순간, 원범의 입술이 바짝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다시 시작이 된 것인가!'


그의 집안을 쥐어짜듯이 잡고 놓아주지 않던, 역모의 올가미였다.

사람들은 왕족이라면 원래 그래야 하는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억울하게 그대로 잡혀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치닫기 시작했다.


"이번엔 누가 또 역모를 일으킨 거지? 형님인가! 아니면, 이번엔 나인 건가? 이도 저도 아니면, 어쩌면 두 돌 백이 형님의 아들인지도 모르겠군!"


제법 높은 나뭇가지에서 뛰어내려온 원범의 주먹은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 이미 불끈 쥐어져 있었다.

죽기 살기로 저 근사한 무사와 한판을 붙어 볼 마음을 다잡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이제 남은 씨앗을 마저 거두려 오셨다는 거군!"


마음속 깊은 곳에 쌓였던 원망이 거친 소리와 함께 터져 오르던 참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군 마마! 소인, 백 선. 천불암 유연선사의 말씀으로 군 마마를 궁까지 모시려고 합니다!"


바람처럼 말 등을 스쳐 내려온 무사가, 그를 향해 낮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바다만 바라보며 길들여진 무르고 맹한 표정이 원범의 얼굴을 덮어 내리고 있었다.


"... 뭐라는 거야! 사부님, 이 자가 지금...?!"


또다시 순식간에 일어 선 무사가, 이번엔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사부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노 상추 어른?"


"그렇네. 그런데... 군 마마라고?"


"대왕 대비전에서 군호를 이미 내리셨다고 합니다."


사부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무사가 건네는 노란 옥패를 보는 순간, 사부의 목에 항상 걸려있던 같은 색의 옥패를 가슴 안에서 당겨 올리고 있었다.


사부의 미세하게 떨리는 손에 들린 옥패의 홈 안으로, 사내가 건넨 작은 옥패를 끼웠다.

잠시 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작은 옥패는 사부의 옥패 안에 꼭 들어 맞았고, 사부의 얼굴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색으로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사부의 표정도 무사와 다르지 않게 비장한 빛을 띠더니, 원범을 향해 두 무릎을 바닥으로 내리꽂고 있었다.


"군 마마! 죽여주시옵소서! '전하'가 되실 분인걸 알면서도 선대왕께서 명하신 일을 받드느라, 그동안 불충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나이다!"


'사부님이 뭐라시는 거야? ... 아마 꿈 인거야... 별난 꿈...!'


원범 또한 이해 할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남의 일인 듯 구경삼아 그들을 내려 보고만 있었다.


'툭-'


잠시 후 무게감 있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이들 사이의 정적을 깨고 끼어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에는, 젖혀진 사립문사이에 꼭 낀 듯이 서 있는 양순이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 몸만 한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린 모양 이었다.


"원범 오라버니, 이러고 놀면 진짜 역모 죄로 잡혀갈 수 있다고요. 무섭게 왜 그래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있던 양순이가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사부와 원범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양순이 네년은 여기 또 우쩐 일인 게야!"


노 상추가 신경질적으로 양순이를 향해 나무라고 있었다.


"말이... 막 달려가잖아요. 원범 오라비를 찾아 가는 것 같아서, 그래서..."


양순이는 언제나 참 착한 아이였다.

원범을 지키겠다고 제 몸만 한 막대기 하나를 해 들고, 이 언덕배기집까지 말만큼 빠르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양순이의 진심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 젊은 무사에 의해 단숨에 튕겨버리고 말았다.

무사는 곧바로 노 상추에게 다급한 투로 부추기기 시작했다.


"상추 어르신, 시간이 없습니다! 영의정을 앞세운 행렬이 벌써 백석현을 지나 통진에서 배를 타기위해 정렬을 하는 모양을 보고 건너오는 길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주변을 의식한 사부가, 양순이를 향해 다시 다그치듯이 입술을 질근 깨물고 말을 건넸다.


"양순아! 지금 이 길로 곧바로 내려가서, 누구와도 얘기하지 말고 마마의 형님을 모셔오도록 하거라. 아무 누구와 눈도 마주쳐서도 안 될 것이야. 명심 또 명심하고 얼른 내려가거라!"


"... 마마 형님요...?"


"그래, 창식이 아부지!"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얼굴 마냥, 사부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양순이가 낡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아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



새벽녘부터 출발한 행렬이 양화진과 악포교를 지나 통진에 다달아 뱃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거 참... 얼굴도 이름도 나이조차도 알 수 없는 임금을 모시러 가야한다니. 앞으로의 일이 참으로 ..."


"영상 대감, 그보다 이판 대감의 계획대로 할 것 같으면 오늘 강화 유수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네. 어차피, 통진에서 갑곶진까지 이르는 바닷길은 물살도 센데다가 세시진마다 바닷물이 갑자기 들어왔다가 빠지는데, 그 높이가 제각각 이어서 거칠기로도 유명하지. 그러니 배를 띄울 수 있는 때를 잘 맞추어야 하니,

아무리 대비전에서 서두르라고는 하나, 하루를 늦추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이유도 없을 것이네."


"그나저나 대감. 이 경응이나 이 원범이나 거기서 거기 일 텐데, 뭣 때문에 이런 수고를 무릅쓰고라도 이 경응이 필요한 것입니까?"


"어허... 병판. 우리끼리 이유를 알려고 해봤자 잘못하면 역모 죄만 뒤집어 쓸 수 있으니 아무 말도 묻지 말고, 자네 또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게.

어차피 대신들의 택군이 있기도 전에, 이판의 뜻대로 나선 걸음이 아닌가!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알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네... 영상 대감."


"따르는 이들에게 천천히 움직이도록 전하시게."



****



칠월 한낮의 열기를 무릅쓰고 작은 방의 꼬옥 여민 문살 안에서 세 사람이 제각각 모두 난처한 모양새를 짓고 있었다.


작은 방이지만 언제나 그의 사부가 차지해 앉아있던 서탁이 놓인 상석에는 원범을 멍하니 앉혀두고, 무사가 건네는 서찰을 사부가 묵묵히 펼쳐들고 있었다.


빛바랜 종이에 힘 있게 휘갈겨 쓰여 진 글자는 단촐했다.


' 시 (時) '


그리고 순조대왕의 어보(御寶)가 붉은 빛으로 장엄하게 눌러져 있었다.


"정상적인 왕위 계승 시에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오늘의 일은 서찰로 남길 수가 없었다네. 믿을 수 있는 이들로 하여금 순조대왕의 그 뜻만 이어가게 하였던 것이지.

시(時)자는, 순조 대왕의 뜻을 받아들이시겠다는 명경 대비의 결정이시고 지금이 나서야 할 때라는 신호인 거야!"


"하지만, 이조판서인 김 좌근 대감의 생각이 이에 맞서고 있어서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홍 명부 상선의 지시로는, 전하께서는 일단 시각을 다투어 소신과 함께 먼저 말을 타고 궁으로 출발을 하시고, 남은 일은 경응 도련님께서 ..."


흐름을 대충 파악해가던 원범이 이들 사이를 급하게 비집고 들었다.


"안됩니다 사부님. 그러다가 혹시 형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며, 저는 앞으로 그 어떤 일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마세요 군 마마.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경응 도련님 곁을 떠나지 않고 책임을 다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으셔도 되시옵니다.

그래도 한 때 전하의 사부였는데, 저를 믿지 못하시지는 ..."


노 상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눈을 가늘게 치켜뜨던 젊은 무사가 날듯이 빠른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방문을 세게 밀쳐내었다.


한낮 더위 속, 산속의 모든 나뭇가지에서는 성가실 만큼 시끄럽게 매미 떼들이 들러붙어 울어대고 있었고, 역시 그 소리에 파묻힌 원범과 그의 사부의 귓전에는 문밖의 인기척은 전혀 들릴 틈이 없었다.


젊은 무사가 멋있게 밀쳐낸 문 앞에서는 여전히 놀란 눈을 뜨고 이들을 바라보고 서있는 양순이와, 이번에는 원범의 둘째형인 이 경응이 묵묵히 방안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사부님이나 나나 이 젊은 무사처럼 문 밖의 소리도 하나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한데, 나한테는 사부님의 실력을 믿으라고 하시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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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08.05 19:33
    No. 1

    가독성이 좋아서 이야기를 술술 읽습니다.
    작가님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05 20:14
    No. 2

    감사합니다. 베르겐님.^^
    자주 찾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올매나 뿌듯한지...
    낙 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백화™
    작성일
    23.08.07 00:43
    No. 3

    작가님 엄청나게 꼼꼼하신 분 같아요. 글이 참 깔끔하네요.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07 03:49
    No. 4

    매번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글녀석님~^^
    덕분에 또 한번 충전 받았습니다.
    열씸 열씸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6 ka****
    작성일
    23.10.06 19:38
    No. 5

    문장이 정갈한 데다 스토리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흘러가는군요. 그런 몰입감을 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재능이겠죠.
    철종의 운명 이야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힘차게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10.06 22:13
    No. 6

    이렇게 좋은말씀 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kant91님.
    흔들리지 않고 바른길 찾아갈 수 있도록, 많은 관심 부탁드려 보아요..

    중반부 쯤에... 이러저러한 개인 상황으로 퇴고가 욕심껏 이루어 지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많이 소심해져 있습니다.

    후에, 기회가 된다면...
    양해의 말씀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다시 정리를 할 수 있도록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휴일 잘 보내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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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준비된 왕 +16 23.07.16 1,350 2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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