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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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해품글
작품등록일 :
2023.07.16 15:33
최근연재일 :
2023.11.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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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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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궁으로

DUMMY

변수가 생겼다.

갈 길은 멀지만, 무작정 걸음부터 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범은 말을 타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시진 가까이, 원범을 태운 말은 마당을 몇 바퀴나 돌아가며 등위의 인간을 길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원범의 모습을 지켜보던 노 상추가 지레 민망한 듯, 젊은 무사를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성부에서 지내시던 때에는 말을 타고 걷는 연습까지는 줄곧 하셨는데, 이 곳에 와서 말을 타신다는 게 어디 가능이나 하셨겠는가!"


원범을 쳐다보는 무사의 얼굴이 당황함을 넘어 사색이 될 만큼 이제 많이 조급해 보였다.


"궁에서 오는 봉영 행렬단과 마주칠 것 같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그들은 아무도 전하의 얼굴을 알지 못해. 그보다 양순이가 경응 도련님의 가족들을 산속 동굴 속으로 잘 모셔야 할 텐데..."


"댁에 개가 있다면, 절대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그야 상식 아닌가!"


한동안 원범의 승마술을 지켜보던 상추가 심각한 표정으로 원범에게 말을 건넸다.


"마마. 말 타기는 후에 차차 배우시고, 이번엔 차라리 백 선 무사와 함께 한 말에 오르시어 출발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싫습니다!"


'또 또, 저 직진형 고집...! 넘지 못할 벽이로다!'


"으 흠...! 그래도 군 마마, 일에는 순리라는 것이... 이러시면 너무 늦사옵니다."


"사부님, 제발 그 '마마' 소리는 하지 않으시면 안돼요? 남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내 품에 안겨서 가는 건 내키지 않습니다."


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에 원범도 제법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백 선이 다시 말을 거들고 나섰다.


"군 마마.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실 만큼 고삐만 잘 잡고 계시면, 말은 소인이 천천히 이끌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네! 네, 그러세요 마마. 그러면 조금 나을 것 같습니다! 문제 끝입니다!!"


곁에 있던 노 상추가 화들짝 박수소리와 함께 끼어 들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그의 장단은 계속 이어졌다.


"마마. 그러시면 이제 이 길로 바로 나서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그냥 이대로 어서, 어서 출발을 하시옵소서!"


"이대로요? 저 혼자 가요? 사부님은요.. 또 형님은 같이 가시지 않으십니까?"


"우선, 제발 먼저 출발 좀 하십시오 마마! 소인이 계산 하기에도, 이제 이각 정도만 지나도 오늘 뭍으로 나갈 바닷길이 완전히 닫혀 질 것 같습니다.

저희는 며칠 후에 따로 찾아 뵈올 테니 그 걱정은 두시고, 군 마마께서는 오늘 중으로 반드시 이 강화 섬을 먼저 벗어나셔야 하시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원범도 일을 너무 돕지 못하는 자신이 민망한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럼 너무 늦지 않게 저를 찾아오셔야 합니다!"


"네 마마, 망극하옵니다. 자, 자...! 백 선, 이대로 얼른 출발 하시게!"


"알겠습니다 상추 어른. 그럼 이만!"


한쪽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신호를 보내는 상추를 쳐다보던 백 선이, 이내 원범의 말고삐를 잡아 들고 천천히 사립문 밖을 나서기 시작했다.



****



왕을 봉영하는 행렬은 문무백관과 왕실, 군사를 포함해 오백여명에 달하였다.


갑곶진에 이르러 아직도 건너오지 못하는 행렬을 조금 남겨두고, 강화도에 먼저 도착한 신료와 궁인들이 휘황찬란한 의장기를 앞세우고 정렬을 시작하고 있었다.

새 임금을 모셔오기 위한 행렬은, 하나같이 화려한 의복을 반듯하게 입고 강화도의 모든 길목을 빼꼼하게 줄로 서서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만큼은 강화섬 안의 구석구석까지 치 닫지 않는 풍류가 없을 만큼, 풍악소리 또한 높고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라에서 무슨 일로 오셔시까? 살면서 이런 구경도 다 해보네. 어서 어서 이리 와보시겨!!"


갑곶진 초입의 백성들은 국상 중에도 이런 풍류에 의아함이 가득했지만, 여하튼 눈앞의 화려한 행렬에는 만 가지 생각 따위는 잊고 풍악에 맞추어 그들도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화의 백성들에게 이곳 섬에 왕가의 손이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흥미롭고 궁금한 일도 아니었다.

자고로 왕족이든 고관대작이든 간에, 이곳 강화 섬에는 유배 차 누구든 수시로 드나들어야하는 곳이니 만큼, 유명하지 않은 먼 왕족 따위는 얼굴을 익힐 만큼 주목받을 만한 대상도 되지 못했다.


그저 강화의 백성들은 유배 차 이곳에 머무는 왕손을 임금 자리에 앉히기 위해 데리러 온다는 사실에, 마치 섬의 자랑거리라도 된 양 그들이 더 뿌듯해하며 흥이 하늘까지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광성보를 지날 무렵부터 백성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희한한 일도 다 이시다. 그럼 몇째 도련님 이시까?"


하지만 궁의 어느 누구도 임금님의 존함을 안다고 해도 입에 올릴 수는 없으니, 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를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임금이 탈 빈 연(輦)을 앞세운 행렬이 드디어 원범과 경응 형제의 집 앞으로 이르고, 강화 유수 조 형복이 나서서 문이랄 것도 없는 싸릿대를 열어 제쳐 주자, 영의정 정 원영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끝이 없는 봉영행렬이 도착하며 작은 집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는 통에, 임금님이 될 분의 얼굴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백성들은 점점 먼 거리로 밀쳐지고 있었다.


"으 흠...!"


밖이 어수선함을 느낀 문 안의 집주인이 버선발로 튀어나와 놀란 눈으로 이들과 마주 섰다.

영의정 정 원용이 그의 눈앞에 나선 사내의 위아래를 유심히 흩어보았다.


"강화 유수. 이곳인가? 그런데 자네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말인가!"


나즉한 소리로 정 원영이 강화 유수를 향해 먼저 채근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대감. 강화 근해에는 이양선이 워낙 많이 출몰하는 곳이다 보니, 미처 이곳까지는 신경을..."


"어허.. 참!"


여전히 젊은 사내를 바라보던 정 원용이, 이번에는 사내에게 나긋하게 말을 건넸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하나하나 풀어서 말씀을 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경응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역시 주변에서 그들을 조금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고 하여도 전혀 들려질 수가 없는 거리였다.


"이름은 원자 범자 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과 분명 같았다.

이어 영의정인 그가 관복을 옆으로 밀어제치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자, 주변의 모든 이들도 땅에 코가 닿일 듯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소신 영의정 정원용이 대왕대비마마의 전교를 받잡고 덕완군 마마를 책임지고 궁으로 봉송하기위하여 도착 하였나이다!"


아무 대답도 없는 이 경응을 향해 정 원용이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군 마마, 오늘은 시각이 늦어 강화 유수 관아에서 봉영식을 거행하고, 내일 물길이 열리는 대로 출발을 하도록 하겠나이다!"


궁인 몇 명이 경응의 앞으로 나서며 귀해 보이는 비단도포를 걸치고 가죽신을 내어 신겨 주었다.


"마마, 관아로 모시겠나이다. 연에 오르시옵소서!"



****



원범과 무사 백 선이 갑곶 나루에 도착하자, 통진 에서 강화로 들어서는 수많은 문무백관과 궁인들이 떼를 지어 염하를 건너고 있었다.

삼도수군통어영 본진이 주둔한 교동도와 강화도 쪽에 확보해 두었던 약간의 선척을, 오늘은 모조리 봉영행렬이 차지하고 바닷길위로 울긋불긋 수를 놓고 있었다.


그들의 행렬 속에 묻혀 강화도에서 통진으로 나오는 배를 타고 김포와 양천을 지날 즈음에는, 밤별이 둘러싼 초 저녁 하얀 달이 두 청년의 길을 밝게 내리 비추고 있었다.


"무사 형, 아까 먹은 육포로는 이미 소화가 다되어서 트림을 해도 아무 냄새도 올라오지 않습니다. 말도 힘이 들 텐데..."


" ... "


"말 탄지도 오래 되었는데, 어디 주막에 들러서 요기나 좀 하고 가는 게 어떨까요? 마침 내가 돈이 있어 본지가 오래되어서 대접할 만한 상황은 되지 않지만, 무사 형님이 오늘 한턱 쏘시면 다음번엔 제가 거하게 대접 한번 하지요. 어때요?"


김포로 들어 설 때부터 직접 건네받은 말고삐를 두 손으로 야무지게 잡고 있었지만, 아직도 삐죽삐죽한 모양새가 영 멋있는 태가 나지는 않았다.


"군 마마, 저희가 빨리 궁에 도착해서 대왕대비마마를 뵈어야 강화도에 계신 경응 도련님의 신변도 안전해 지실 수 있습니다.

군 마마께서 궁에 도착하시면, 봉영 행렬단이 빨리 돌아오라는 전교를 대비마마께서 보내실 수 있습니다."


"아..."


비로소 이 걸음이 그리 순탄한 길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는 이 길의 끝에는 그도 알지 못하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치닫자, 이 말을 타고 어디로든 내빼버리고 싶은 생각마저도 간절해지고 있었다.


"그래, 죽일 거면 강화도에서 끝냈겠지. 이렇게 멀리까지 데리고 갈 필요가 있겠나! ... 형님, 무사하셔야..."


"...?"


백 선이 원범을 돌아보았다. 좀 전과 사뭇 다르게 바뀌어 진 모습이었다.

말을 재촉하는 허리는 꼿꼿이 서고, 원범의 말고삐를 휘어감은 손에는 더 큰 힘이 뻗치고 있었다.



하지만 의지와는 다른 현실 속에서,

아직도 시원스럽게 말을 달리는 것에는 통달하지 못한 원범에게 맞춘 걸음은 더디고 힘이 들었다.


지루한 걸음이 이어지는 사이, 그들 뒤로 새벽달이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오랜 시간 숲길을 걸었던 원범과 백 선이 도성주변으로 들어섰다.


통행이 금지된 밤거리는 적막했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원범이 백 선을 돌아보았다.


"무사 형님. 야금(夜禁) 은 어찌합니까? 도성의 순라꾼들은 쇠방망이와 쇠사슬까지 들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이미 물금첩(勿禁帖)을 승정원에서 발급해 주었으니, 군 마마께서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십니다."


"아, 네... 정말 높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드네요..."


도성의 서북방향으로 향한 창의문을 통과한 후, 말위에 얹혀 진 원범의 몸뚱이가 많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를 지나지 않아 높다란 팔작지붕을 에워싼 커다란 대문 앞에 백 선이 멈춰 섰다.

이내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을 텐데도 희한하게 대문은 급하게 열려지고, 검은 옷의 듬직한 형상의 사내들 몇몇이 그들 앞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분명 그들을 반기는 무리들인 것 같았다.

몇 명의 무리들이 조심스럽게 원범을 말에서 내려 부축을 하고 있었다.


"상선 영감께서 아까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말이 없는 검은 옷의 사내들을 대신해서 하얀 도포에 갓을 쓴 청지기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이들을 맞이하였다.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중문을 두어 개쯤 지나자, 또 다시 이들과 같은 무리들이 맑고 창백한 문종이를 뚫고 나오는 빛을 등지고 믿음직하게 서 있었다.


하나같이 떡 벌어진 어깨선과 예사롭지 않게 굳건한 자태로 보아 무사들의 모양새라는 것은 금방 보아도 알 수가 있었다.






*야금- 야간 통행금지

*물금첩- 야간에 궁중의 급한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 발급되는 야간통행증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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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32 베르겐
    작성일
    23.08.06 19:59
    No. 1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작가님 건필하십시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06 20:27
    No. 2

    베르겐님~ 이렇게 또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이 ... 힐링인 것 같습니다~ㅋ
    시원한 저녁 되십시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백화™
    작성일
    23.08.08 18:54
    No. 3

    오우... 저런 방언을 썼군요.
    경응이 동생을 사칭한 저의가 궁금해서 더 봐야겠네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08 20:08
    No. 4

    관심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당~ㅎㅎ
    저두 밥먹고 왔어요..ㅋ.
    힘내서, 열작 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3 하윌라
    작성일
    23.08.16 11:20
    No. 5

    강화에 경사가 난 듯하여, 저 또한 흥이 났습니다. 오늘도 더위가 물러감없이 오히려 그 기세가 대단허니, 조심에 조심을 더하십시오. 몸을 살펴 돋우고, 얼른 일어나시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08.16 23:42
    No. 6

    오늘 어찌 이렇게 많은 글을 읽으셨는지, 시간 쪼개서 내글 올려놓고 나니,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좀 많이 느린 편인지.. 글 한번 올리려고 하면, 모든게 스톱 되는데..
    좀 배워야 겠습니다.
    이 열정! 팡팡튀는 긍정의 아우라~^^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6 ka****
    작성일
    23.10.08 07:43
    No. 7

    스토리는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묘한 흡인력이 있군요, 게다가 정갈한 문장과 적당한 긴장감은 몰입감을 높여주고 중독성마저 제공하고 있군요.
    작가가 제시하는 원범의 한양 행을 읽고 난 뒤...... 실제 철종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보았군요.
    철종의 한양 길...... 재밌게 읽고 갑니다. 힘차게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4 해품글
    작성일
    23.10.08 12:05
    No. 8

    아... kant91 님..
    이렇게 많은 평과 함께, 격려마저 느껴지는 글을 대하니..
    제가 묘한 긴장감에, 한 동안 먹먹함으로 주저하였습니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글의 한부분이라도 건성 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마저 느끼는 고견이었습니다.

    오히려 가야 할 길을 제시 해주는듯 하였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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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약속 지켜 드리리다. +11 23.07.17 778 16 15쪽
1 <서문> 준비된 왕 +16 23.07.16 1,348 2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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