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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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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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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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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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비밀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왈디에는 다리 옆에서 그 다리 밑을 흘러가고 있는

물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다리의 교각들 곁을 흘러가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부드럽고 흐릿한 반짝임으로

자신들만의 길을 변함없이 그리고 서두를 것도 없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

길은 다리와 엇갈리듯 비스듬한 수직처럼 나 있었고

다리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사람들은 멋지고 예쁜 옷들을 차려 입고

미소와 대화를 주고 받으며 느긋하게 거닐며

제각기 갈 곳들로 가고 있었다.

길은 다리를 통해서 건너가고 있었다.

조각들이 다리의 길고 긴 가로의 난간 그 밑과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짧은 기둥들과

각종 부분마다 새겨져 있는 다리는

대낮의 눈부신 햇빛들을 받아서 더욱 희게 빛나고 있었다.

조각들은 멀고 먼 아주 고대부터의 신화와 전설에서

벌어졌었던 전쟁이 주제였다.

왈디에의 남자답고 잘 생긴 얼굴은

그러나 평소의 명랑하고 낙천적이던 모습과는

달리 그다지 표정이라고는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남자답게 생긴 두상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크고 넙적하지 않았고

그의 성격이 명랑하고 재미있다고는 해도

그는 그렇게 심하게 시끄럽고 대단히 활기차지는 않았다.

지금 그의 얼굴은 굳이 유쾌한 기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시내의 길 곳곳에 심어져 있는 가로수들마다

휘어진 섬세한 그늘들을 드리우고 있었고

따가운 햇살 아래 도시는 깨끗하고 밝고 환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그렇게 편해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아름답고 세상은 눈부시고

사람들은 정답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왈디에만이 홀로였고 홀로 우울했다.

깊은 우울과 얕은 우울 그 사이 어디쯤에서

왈디에는 자신만의 방황을 하고 있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이 이곳을 지나가리라고

미리 연락을 받았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조사라도 하듯이 왈디에는 선생님에 대하여

물어보고 다녔다.

아직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은 그런 왈디에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대수롭지 않았고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선생님도 이런 왈디에의 감정을 알게 되고

받아줄지 그렇지 않고 거절할지 그것만이 그때는

중요하게 되리라.

거절을 한다면? 그 이후는 왈디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늘 이혼을 거론하면서

이틀 사흘에 한 번씩 말다툼을 하고

차가운 얼굴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걸 어렸을 적부터 지속적으로 보고 들으며 자란 탓에

보이지 않은 우울한 습성을 그러나 왈디에는

숨기고 살았었다.

자신에게 그런 감추어진 다른 얼굴이 있다는 걸

자신의 친구들은 몰랐다.

다만 그가 부모님이 서로 미워하며 늘 헤어지고 싶어한다는

그런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반목을 얘기는 자주 했었으므로

친구들은 그런 사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왈디에가 정작 다른 것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점은 잘 몰랐다.

왈디에는 가끔 냉혹한 살인마가 되는 것을 은밀히 상상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왕립 음악 학교의 학생이자 상당히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그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수는 없었다.

세상에는 허락한 것이 있고 허락하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다.

아무나 범죄자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음악 학교에 오면 기분이 안정되었다.

음악은 그를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했고 그러면 그는 모든 걸 잊고

그냥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갸름하고 희미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녀와 같이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낳고 함께 늙어간다면

왈디에도 더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거둘 수만 있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부모님 두 분이 싸우면서 퍼붓는 악담과

그리고 자식들에게 차갑고 격렬한 꾸중과 멸시도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과 결혼을 해서 같은 집에서 살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는 차마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때리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 외에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없었다.

자식들의 나이와 생일날도 가끔 잊어버렸다.

두 분 다 각자 사생활이 있었고 그래서 늘 밖으로만 나돌았다.

이미 마음이 떠나버렸으므로 집에는 될 수 있는 한 들어오고 싶어하지 않았다.

돈은 넘쳐나도록 흔한 두 분이었으므로 별로 집에 들어와야 할

이유라고는 있지도 않았다.

각자 영지(領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막대했으므로

언제나 금전적인 걱정과는 무관한 삶들이었다.

왈디에와 다른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 밑에서 정신적으로 힘들게 성장했다.

왈디에는 그냥 되는 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것처럼 그가 나이가 더 들어갈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그와 혹은 그의 가족과 무관한 타인들이었다.

그것이 더욱 그를 힘들게 했다.

그가 그의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와 분노를 엉뚱하고 무관한

타인들에게 퍼붓고 괴롭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음악에 몰두했다.

마치 음악만이 그를 구원하고 그의 친구는 유일하게 오직 음악이라는 것처럼.

그러나 그러다가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을 만난 것이었다.

아직 선생님은 이 눈부시고 정교하며 아름다운 고풍스러운 다리를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기다리다가 지칠 법도 한데 왈디에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차츰 정오를 통과하고 있었다.

햇살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고 왈디에의 정수리 위로는 더욱

태양이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곤란한 점도 못 느끼는 듯

더위도 타지 않는 것처럼 낙천적이고 편안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더욱 많은 시간들이 마치 다리 밑의 유유하고 부드러운 물처럼 유연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여전히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은 지나가지 않았다.

아마도 이 다리 근처를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들은 정보로는 선생님은 오늘 여기를 지나가게 되어있었으나

선생님이 계획을 바꾸었을 것 같았다.

예정에 없는 다른 약속이나 다른 장소로 이곳은 그냥 염두에도 없을 것이다.

더 기다려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왈디에는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은 피아노 연습을 제외하고는 할 것도 없었으므로

이렇게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이나 하고 있어도 괜찮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피아노 연습은 그만 건너뛰고 말게 된다.

앞으로 음악 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고 나와서도

그는 계속 음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유명하고 굉장한 피아니스트가 되어서 계속 음악 곁에 머물고 싶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도 사랑하고 있는 것도 음악 외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먹고 사는 금전적인 걱정은 그는 할 필요가 없었다.

장차 물려받을 유산이라면 그와 또 그의 형제 자매들은 돈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게 살 가능성은 없었다.

소년은 그러나 어른이 된다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그 점을 몰랐다.

사람이 빵과 고기와 먹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도 무엇인가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는 사랑을 하고 싶었고 또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소식을 가르쳐준 그의 친구가 잘못 알았던 것만 같았다.











왈디에는 결국 다리를 떠나기로 했다.

다리 건너편의 수많은 크고 아름다운 장려한 건물들과

그리고 역시 이쪽의 고풍스럽고 섬세한 건물들을 뒤로 하고

다리 저쪽으로는 건너가지도 못하고 왈디에는

쓸쓸히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 돌아가고 있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가다가

건너편 구역 어디에서 갑자기 엇갈리며 나타나서

우연히 만나서 그래서 가볍게 놀란 척을 할 생각이었다.

도시가 의외로 복잡한 작은 골목길들이 종횡으로 있었으므로

옆으로 들어가서 먼저 미리 추월해서

역으로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다가

레이피엘페이셔스 선생님을 놀라게 했었으면,

그랬으면 좋았으련만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이제는 없어졌다.

오후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으므로 담담하고 아련한 빛들이

어두운 색채가 아주 조금 들어간 넓고 큰 그늘처럼

도시 전체를 평화롭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는 집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그는 홀로 또 지내야만 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혼자서 빈 방에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정원에 나가서 꽃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정원을 가꾸는 것이 아버지의 취미였으므로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정원을 가꾸는 방법을 유산처럼 취미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왈디에도 정원일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두워져서 완전히 해가 떨어지면 정원에서

꽃과 나무를 치고 자르고 물을 주는, 정원을 관리할 수도 없었다.

그의 비어있는 얼굴은 이제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인적이 끊어진 오후의 거리처럼 공허한 정적이

겸허하고 침착하게 깃들어져 있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는 음악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그렇게 크게 집중을 해가면서 심각하게 몰두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음악과는 다른 그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레이피엘페이셔스가 그렇게 악보에 음악들을 옮겨서 적고 있는 동안

해는 차츰 그리고 차근차근 저물어서 이윽고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당연히 레이피엘페이셔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촛불을 켜야만 했다.

촛대마다 하나 둘씩 심지에 불이 붙어서 이윽고

은은하고 아름다운 그림자들이 그녀가 혼자 있는 방에서

옅게 또 깊은 수렁처럼 작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촛대들의 촛불들을 물끄러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멀쩡하고 나지막한 시간이 그녀 주변에서 흘러갔다.

창밖은 같은 검은 어둠이지만 계속 어둠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그녀가 있는 방에서도 역시 시간이 고이듯 섬세한 결로

보이지 않게 그러나 확실히 또 시간이 흘러갔다.

완전한 무관심처럼 그녀는 그러나 두 개의 촛불들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참이라고 할 수 있는 적막한 순간들이 흘러갔다.

그녀가 옷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굳어진 냉각된 잉크처럼 경직된 그녀의 몸이 보이던 분위기가

서서히 어색하고 기묘하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하반신까지 그리고 속옷들도 천천히

완전하게 다 벗고 그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미 창밖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이미 너무 어두워져서 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실내에도 보이는 것은 그다지 없었다.

그녀의 등에 문신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의 색깔처럼 붉고 선명한 문신의 색채는

요염하다기보다는 적확하고 간결한 지시처럼

어떤 목적성만이 보였다.

왜냐하면 선정적인 관능을 위해 새겨진 문신이 아니라

어떤 도안과 표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정육각형과 그 정육각형 주변을 튀어나간 듯한 다른 도형들이

중첩되고 겹쳐지듯 평면 위에 차례로 층층이 쌓아서 올린 듯한.

다시 그 핏빛처럼 아름답덥 적색의 문신은

테두리들과 선들마다 파란색으로 빛나며 그렇게 변해갔다.

다시 얼마 후에는 파란색의 문신은 전체가 연보라색으로 변해가다가

완전히 흰색들로 이루어진 문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문신들은 차츰 저녁놀이 스러지듯

엷고 넓은 흰 자락의 안개가 언제 소멸했는지도 모르게

완전히 걷혀버리고 새 아침이 오듯이 그녀의 등에서 없어졌다.

그녀는 창턱에 두 팔을 얹고 흥미로운 창밖 구경을 하는 어린 소녀처럼

그저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도 즐거운 호기심이

내비치지 않았다.

문신의 비밀 레이피엘페이셔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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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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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신비한 나무: 기적의 갑옷 24.07.08 7 0 12쪽
73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시험 24.07.07 6 0 12쪽
72 불의 보석 24.07.04 5 0 11쪽
71 얼음의 보석 24.07.03 8 0 14쪽
70 용의 보석 24.07.02 9 0 13쪽
69 이 낙엽들도 언젠가는 타오르는 불길로 24.07.01 2 0 12쪽
68 다시 돌아온 이 계절에도, 그러나 24.06.27 4 0 12쪽
67 너와 나의 건널 수 없는 강물 24.06.26 4 0 12쪽
66 참을 수 없는 아픔보다 더 괴로운 건 24.06.25 3 0 12쪽
65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24.06.24 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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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너도 나도 다 사람이지만 24.06.18 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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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의 비밀 24.06.05 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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