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일반소설, 판타지

새글

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2 회
조회수 :
1,153
추천수 :
9
글자수 :
512,582

작성
24.06.13 10:05
조회
4
추천
0
글자
16쪽

내게도 이 들판은 너무 좁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어떤 계획도 부재(不在)하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남자는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살피기 위해서 그런 듯 싶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다른 남자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연락이라고는 없는 건가?

남자가 다시 물어보았으나 역시 돌아온 대답도 미지근했다.

아직도 역시 없습니다.

남자는 실망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럴 줄 알았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고개만 가볍게 한 번을 끄덕였다.

남자는 팔짱을 끼고 먼 산을 보듯 저 멀리 저 앞만 바라보고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몰려올 줄은 짐작도 예상도 못 하고 있겠지?

다시 남자가 한참이 지난 후에 말을 꺼냈다.

팔짱을 끼었다가 오른팔로 왼팔을 깜싸며

그러다가 다시 오른손과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과 턱을 받치듯

어루만지면서 남자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부하들로 보이는 남자들은 그저 가볍게 웃어댔다.

동의하는 듯도 보이지만 뭔가 상대방쪽을 무시하는 듯한

공감대에서 나온

집단적인 비웃음이었다.

그럴 거야.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 자기가 대답하며 남자는

어딘가 자신만만함이 슬쩍 보이는 말투로 약간 신이 나 있었다.

남자는 금발 머리에 눈이 깊이 패이듯 들어가 있었고

코가 약간 길면서도 굳고 날카로운 콧날 어딘가에

차가운 염세적인 멸시가 항상 엿보였다.

굳게 길게 그어진 입술은 위아래 다 얇았으며

은연중에 입과 턱에는 자신만만한 도도하고 거만한 성격이

따라다니듯 감돌았다.

이젠 그만 철수할까요?

남자는 가죽 윗옷이 찬란한 자주색이었다.

상당히 반짝거리며 빛날 정도로 딱딱하고 견고한

특수 공정을 거친 듯한

비싸 보이는 가죽옷이었다.

가죽 왼쪽 심장 부근에는 거미 자수가 놓여져있었다.

흑거미가 위로 기어올라가려는 듯한

검고 선명한 검은색 실로 된 무늬였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듯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오른손으로 턱을 잠깐 몇 번을 문지르더니 그만 대답했다.

그래, 돌아가자고. 어차피 담력이 작아서

나타나지도 못할 인간들이니까.

어차피 싸움도 상대가 되는 인간들에게 해줘야지,

너무 시시한 것들을 상대로 전투를 해주면

내쪽만 손해라고.

일제히 기분 좋게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가볍게 폭소가 터진 것인지

그들은 등을 돌리고 모두 물러갔다.

이제 남은 것은 빈 적막이 흐르는 도시의

어둡고 차가운 새벽 공기였다.

밤을 새워서 기다려도 기다린 보람이 없자

그들은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적개심과는 무관하게 삶이란 가끔은

너그러워질 때도 있다.

이들이 지금 그랬으니까.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은 이제는 깊은 장막을 걷어치운 듯

서서히 여명(黎明)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푸른 빛으로

세상이 옅고 하염없이 멀리멀리

마치 번지기라도 하듯이

새로운 빛으로 다시 열리고 있었지만

한쪽 골목 귀퉁이에서는 말없는 사람이 있었다.

에팅켄퓌스였다.

그가 여기서 무엇을 지켜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그들은 물러갔고

그들이 습격을 하려고 했었는지 협상을 하려고 했었는지

모든 것이 무산되어서 그들은 가벼운 실망을 하고

비웃으면서 돌아가고 말았으니까.

에팅켄퓌스는 피아노를 치는

음악 학교의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과는 상관도 없는 이런

방황하는 듯한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또 추구하고 있었다.

높고 우뚝한 그만큼의 세월이 묻어나는

고색이 창연한 유서 깊은 저택의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이제 다시 천천히 바뀌어 가려는 세상 속에서

에팅켄퓌스는 팔짱을 끼고

하염없이 먼 건너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만이 창백하고 핏기가 없었고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세상은

점점 더 온화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한 생동감으로 부드럽고 거대하게

설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생각에

물끄러미 빠져있는 걸로

착각을 할 만큼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서 독백을 할 수도 있는 법이건만

그는 아무 말도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팔짱을 낀 그는 키가 전체적으로 아담해서

귀여울 인상과 몸집이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서

왠지 오싹한 분위기가 전신에서 감돌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겠지, 뭐.

다 예정된 순서대로 가는 걸까?

내가 중간에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잖아?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고 먼 곳을 지켜보던 그가

다시 고개를 정상적인 각도로 내리고 그렇지만 변함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생각이라고는 없는 듯 보이는 눈빛으로

혼자서 중얼중얼거렸다.

회한이 약간 섞인 듯한 눈빛이기도 하고

모종의 싸늘한 분노가 엿보이기도 하는

복잡하고 타인은 잘 알 수 없는, 눈빛에는

떠오른 정신적인 무늬들은

기묘한 감정들이었다.

한참을 팔짱을 끼고 더 있던 에팅켄퓌스가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가 왼손을 들여다보다가 오른손으로

왼손의 검지 손가락을 뽑았다.

놀랍게도 왼손의 검지 손가락은 왼손에서

그냥 대번에 쑥, 뽑혔다.

담담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처연한 눈빛으로

엷게 물든 눈동자로

에팅켄퓌스는 그 뽑혀져 나온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그 손가락을 천천히 별로 크게

힘이나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거리의 땅바닥에 던졌다.

손가락은 차갑고 물질적인 작고 미미한

소음을 내며 골목의 흙바닥에 떨어졌다.

차츰 세상은 눈부시고 환하게 다시 생생한

활기를 조금씩 얻어가면서

그 탓에 온세상이 점점 어둠이 걷히고

그 공간 모든 곳을 새로운 빛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에팅켄퓌스가 던진 손가락은

검고 무광택의 장검이 되어서

땅바닥에 깊숙이 꽂혔다.

칼집이 없이 칼집에서 뽑은 듯한 장검은

부르르르르, 진동을 하면서

한참을 더 땅에 꽂힌 채로 있다가 그대로 땅속으로

점점 더 깊이 함몰되듯이 들어갔다.

땅은 약간 패여서 무슨 삽으로 퍼낸 것처럼

흔적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에는 검과 그 검에 걸었던 마법이

알아서 할 것이다.

에팅켄퓌스는 그곳을 말없이

등을 돌리고 떠났다.

곧 분주하고 명랑한 하루가 다시 또

행복하게 열릴 것이다.













모든 귀찮은 것들을 물리치고도 인간은 어떤 목표를 집요하게 추구한다.

그것이 어떤 종류가 되었든 목표를 향한 욕망은 그렇게 치열하고 감동적이어서

인생은 의미가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것이 언제나 아름답고 언제나 찬사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 점을 에팅켄퓌스의 친척인 휘케텔프도 어느 정도는 깨닫게 되었다.

그도 이제는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인 27세였다.

맑은 눈으로 바라보기엔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순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도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다양하고 너무 복잡했으므로

그도 이제는 희망이라는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도

약간씩은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그래도 그는 신체가 건강하고 무탈하게 어떤 병에도 걸린 적이 없었고

또 평생을 어떤 경제적인 걱정은 할 필요조차도 없는

대귀족 가문의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그래도 그도 역시 조금씩 세상의 심연 같은

인생의 고뇌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그도 나이를 계속 통과하고 있었으니까.

언제까지나 그도 젊을 수만은 없었다.

세상의 공평은 나이라는 법칙에서도 그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불이 타올랐다.

모든 것들을 다 집어 삼킬 듯한 맹렬한 화염의 불길이

아름답고 거대하게 그리고 느리고 꾸물꾸물거리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끄떡도 없이 동요하는 흔들림도 없이.

거대한 저택이 타오르는 광경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환해서

어떤 꿈이나 또는 요정들의 숲에서 보는

지극히 아름다운 풍경처럼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온통 어두운 한밤에 저토록 저곳만 이렇게 두 눈이 멀 것만 같은

환한 빛의 덩어리들이 어떤 집적된 거대한 물체처럼

마구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공포스러운 협박 같기도 했고

또는 어떤 미지의 신성한 전달 같기도 했다.

저 멀고 먼 까마득하게 어두컴컴한 심연 같은

높고도 높은 상공(上空)에서 바로 밤의 땅으로 내려꽂힌

무언의 형태로 전달하고자 하는 일종의 예언이나 말처럼.

그것이 자연이라는 광경 속에

혹은 인간 세상 속에 홀연히 갑작스레 나타난 것만 같았다.

이 모든 무럭무럭 상승하려는 뜨거운 열망 같은

거대한 타오르는 불길을 말없이 휘케텔프는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편안히 밤의 거리에서 높고 큰 담장에 기대어 서서

얌전히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착잡한 듯 휘케텔프는 엷은 애수가 얼굴에 내비쳤다.

소심한 듯 가끔 무방비하게 웃는 꼭 어린아이 같은

그 성격의 일면과 그 점 때문에

주변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휘케텔프를 좋아했었다.





어둠과 한몸이 되기라도 한 듯 은밀하고 신속하게

매우 기습적으로 그리고 깜짝 놀랄 만큼 위협적으로

그들은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휘케텔프는

너무 놀라서 비명이라도 지르고만 싶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휘케텔프는 어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몸을 꼼짝도 못하고 단 한 걸음도 떼지도 못하고

도망조차 가지 못했다.

그대로 두 눈이 접시처럼 커져서 그가 물어보기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망연자실 쳐다만 보았다.

바람처럼 소리 없이 그리고 뱀처럼 은밀하게

걸어오는 소리도 없이 몹시 가볍게 그들은 더욱 바짝 다가왔다.

그들의 맨앞에서 선두에 있으면서 나머지 남자들을 이끌고 오던

남자가 갑자기 벼락처럼 빠르고 바위처럼 완강한 힘으로

휘케텔프의 멱살을 있는 힘껏 모든 힘을 다 해서

틀어서 꺾어가면서 잡았다.

휘케텔프는 더욱 한층 놀라고 말았다.

불의 접시는 왜 가져갔냐?

다짜고짜 묻는 그들의 의도는 너무 험악해서

아름답고 선량한 젊은이 휘케텔프는 상대적으로 약자이거나

비교했을 때 터무니 없이 불리해서 정의로워 보일 때처럼

그렇게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휘케텔프는 멱살을 잡혔고 또한 상당한 다수의 남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대단히 위험한 경우에

저절로 처하게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나, 나는, 난 몰라. 난, 불의 접시를 가... 져간 적이 없다고!

겁에 질린 것처럼 다급하고 긴장한 목소리에는

위험해서였는지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 특유의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위험하고 불온하며 정체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다 일제히 풍기는 흉악한 남자들이었다.

적어도 흉악한 분위기를 모두 다 공유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그들의 모든 몸에서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강력한 욕망이 걸린 문제에서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강렬한 적개심이 분출되고 만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휘케텔프는 그림이나 자주 그리는,

신분이 아무리 대귀족이라고 해도

선량하고 착실하며 일탈도 거의 하지 못하는

천생이 그냥 온화하고 무난한 착한 젊은이였다.

그가 극악한 용기를 이 위기 상황에서 내어서

그 모든 방법들을

생각을 짜내 보고 여러 가지로 써볼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럴 만한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그가 아무 말이나 마구 외치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내게 그래? 왜 나한테, 물 물어보냐고!

차라리 <푸른 성(城)>에 가서 물어보라고!

<푸른 성(城)>?

그들의 두목 같은

맨앞에서 튀어나와서

휘케텔프의 멱살을

숨도 못 쉬게 강하고 억세게 틀어쥔 남자가

눈이 달걀이나 주먹보다 더 크게 크기가 변하면서

놀랐는지 조금 낮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놀라게 되면 오히려 목소리가 더 작아지는 사람도

가끔은 있는 법이다.

그, 그래. 난, 난, 몰라. 왜 나한테 물어! 왜 나한테 그러냐고!

그가 너무 겁에 질려서 얼굴이 새파래져서

마구 고함을 마치 사지 팔다리를 버둥거리듯

허둥지둥 외쳐댔으므로

웃기는 모습이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웃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그들이 찾고 있는 물건이나 문제가

너무 절실했었다.

그들의 사람 목숨쯤은 함부로 없애버리겠다는 듯한

공통된 태도가 그 점을 증언이라도 하는 듯했다.

왜, 너 따위가, 어떻게, 그 <푸른 성(城)>을 다 알고 있지?

그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무슨 극비라도 거론하는 것처럼 두목의 얼굴은

표정에 심상치 않은 살기(殺氣)가 뚜렷하고 팽팽하게

표면부터 그리고 그 밑으로도 흐르고 있었다.

자꾸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만 왔으므로

휘케텔프는

말을 하고 싶어도 대답조차 잘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남자의 완력은 굉장했다.

팔뚝의 힘만으로도 사람 한 명쯤은 쉽게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휘케텔프가 억지로 고개를 돌려서

아무 곳이나 두리번거렸다.

제발 나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나 달라고

애원과 간청이나 하듯이.

부하들 중에는 납작한 모자를 쓴 놈들이 몇 명,

세 명쯤이 있었다.

그들을 보다가 아무 말이나 또 휘케텔프는 내뱉고 말았다.

내가, 내가, 그들의 부하니까. 난 가장 맨밑 부하야!

끄나풀이냐? 그러면?

그, 그렇다. 그렇다고! 어서, 어서, 아 이거나 풀어줘!

휘케텔프는 사람 살려!라고 절규라도 하듯이

어서 선처를 부탁한다고 그저 간절한 애원을 하고 있었다.

두목 같아 보이는 남자는 한참을 그러나 불타는 눈길로

맹수처럼 험악하게 휘케텔프를 한 점에 모은 듯한

살기(殺氣)와 공격성으로 노려보다가

겨우 천천히 휘케텔프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멱살을 느슨하게 풀어주기만 했지

완전히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다.

휘케텔프의 비싼 상의가 완전히 목 근처부터는 아래로

구겨지고 말았지만 이제서야 한시름 휘케텔프도

겨우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넌, 아직 할 말이 많을 텐데.

왼손으로 가볍게 귀엽다는 듯이

휘케텔프의 뺨을 한 대 철썩 치면서

다분히 위협적인 비웃는 미소로

두목이 휘케텔프에게 더욱 가까이 얼굴을 숙이고

다가가며 다시 물었다.

오, 오늘, 그들이 만난다고 했어.

누가? 누가? <푸른 성(城)>의 남자들이?

<매의 성(城)>에서 <파란 해골단>과 함께?

휘케텔프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이었지만

그냥 대강 고개만 미친 듯이 끄떡거렸다.

빠르게 겁에 질려서 위아래로

반복적으로 끄떡거리며

맞다는 듯 표시를 말없이 비굴한 몸짓으로 하는

그를 보며 경멸감인지 안도감인지

두목을 비롯한 다른 모든 남자들의 얼굴에서

다 함께 차가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썩은 물건과 썩은 음식이나

그렇게 변해버린 옛 생명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등을 돌리고 떠나갔다.

가자.

이 짧은 단 한마디 말만을 남기고 두목 같은 남자가 등을 돌리자

일제히 그 지시를 따라서 다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휘케텔프가 말없이 작고 희미한 미소를 역시 차갑게 짓더니

오른손을 쫙, 뻗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마구 뻗어져나간 금빛 가루들을 닮은

아주 미세한 빛의 조각들은 무수히 많은 금빛 먼지처럼

경이로운 속도로 그들의 몸들로 날아가서 박혔다.

그리고 그 모든 건장하고 우락부락했었던,

마치 동물도 그냥 단순한 가축이 아닌

야생 동물처럼 흡사 강렬하고 굉장한 생명력과

끓어오를 듯 흉폭했던 전투력이 들어있었던 신체들이

일제히 다 불에 타올라서 황홀한 불길들에 휩싸여서

각자 모두 불에 타서 이윽고 차츰차츰

투명하고 눈부신 빛들이 가득한

재로 변해버렸다.

떠날 때는 말없이, 그리고 쳐들어올 때는 더욱 말없이!

왕국에서 오랫동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적인 속담이었다.

휘케텔프는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나 곧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슬픈 듯

울상이 되었다가

복잡하게 찡그려가면서 괴상한 생각에 잠긴 듯한

괴상한 얼굴이 되었다가

그러다가 처연하고 처량한 표정으로

최종적으로 되돌아갔다.

목 밑과 가슴이 답답하다는 듯이

이곳저곳 몸의 그런 곳들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던 휘케텔프가

다시 오른손을 뻗었다.

이제는 오른손 손바닥에서 찬란한 빛줄기들이 뻗어져 나갔다.

작은 회오리 바람 같은 기이한 돌풍이 조용하고도 현란하지만

아름다운 무슨 환상처럼 그리고 그림처럼 눈앞에서 펼쳐져서

불어다니다가 이윽고 그 모든 작은 회오리 바람들은

돌고 돌며 회전하던 환상과 비현실 같았던 그 모든 풍경들과 함께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그 눈부신 빛들로 변한 재들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7 내가 아는 세상 24.07.10 8 0 11쪽
76 세상의 끝에서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24.07.10 4 0 14쪽
75 운명을 결정하는 자 24.07.09 4 0 13쪽
74 신비한 나무: 기적의 갑옷 24.07.08 7 0 12쪽
73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시험 24.07.07 6 0 12쪽
72 불의 보석 24.07.04 5 0 11쪽
71 얼음의 보석 24.07.03 8 0 14쪽
70 용의 보석 24.07.02 9 0 13쪽
69 이 낙엽들도 언젠가는 타오르는 불길로 24.07.01 3 0 12쪽
68 다시 돌아온 이 계절에도, 그러나 24.06.27 5 0 12쪽
67 너와 나의 건널 수 없는 강물 24.06.26 4 0 12쪽
66 참을 수 없는 아픔보다 더 괴로운 건 24.06.25 3 0 12쪽
65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24.06.24 3 0 12쪽
64 잠든 손의 반지 24.06.20 1 0 11쪽
63 타오르는 얼음처럼 24.06.19 4 0 12쪽
62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24.06.19 5 0 12쪽
61 너도 나도 다 사람이지만 24.06.18 6 0 12쪽
60 종이에도 피로 글씨는 쓸 수 있다 24.06.17 6 0 8쪽
59 산과 호수의 잠든 밤 24.06.16 7 0 11쪽
» 내게도 이 들판은 너무 좁다 24.06.13 5 0 16쪽
57 거미줄에 매달린 곤충의 유해(遺骸) 24.06.12 4 0 12쪽
56 잘된 것은 잘된 것일 뿐 24.06.11 4 0 12쪽
55 어디선가 그랬었던 것처럼 24.06.10 1 0 11쪽
54 문신의 비밀 24.06.05 3 0 12쪽
53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24.06.03 7 0 12쪽
52 인생에서 마침내 사라지는 사람들 24.06.03 7 0 12쪽
51 어쩌면 만났었을지도 모르는 24.05.30 2 0 12쪽
50 왜라고 묻지 말지어다 24.05.29 3 0 11쪽
49 다정한 어리석음은 이렇게나 달콤하구나 24.05.28 2 0 12쪽
48 쓸데없는 욕망의 시체들 24.05.27 2 0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