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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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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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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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키가 큰 소년은 비로소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스승님에게 할 말이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저


미소년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멈춘 듯이 말을 하지 않는 소년은

무엇인가 사라져버린 공백의 실감처럼

분위기의 중단이라는 일종의 크기로서의

비어버린 암흑 같은 느낌을 주었다.


너무 어두워서 미소년이 미소년인지

그냥 평범하게 생긴 소년인지

구분조차 잘 안 되는 그 고요는

소년에게나 노인에게나 다 그럭저럭 편하고 익숙해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노인은, 소년의 스승이었던,

백발이 무성한 할아버지는 잠자코

조용히 그리고 차츰 사라지는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찬란한 섬광들이 자잘하고 비밀한 부서지면서 낙하하는 순간처럼

음악이 휘황찬란하게 흩어지듯이

편안하게 풀어져서 해체하면서 비산(飛散)하는

안개나 물살의 갈래들인 것처럼 쏟아지듯이

장대하고 부드러운 침몰처럼 내리는

여름 소나기들의 차갑고 선명한 작은 폭발인

빗방울들의 와닿는 촉감처럼

그의 육신은 이제는 차츰 차츰 조금씩 섬세하고 부드럽게

스러지고 있었다.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는 여행객처럼

순례의 허무한 끝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드디어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내려놓으며

방에 들어가려는 순례자처럼

그의 두 눈은 허무와 공허의 세상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저항의 표시처럼 혹은 저항 없이 감은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눈꺼풀의 내부와 눈꺼풀 밖인 어둠이 이젠 같이 투명해지려는 듯했다.

빛과 아주 내밀하고 얇게 깔리는 느리디 느린 소리들에 휩싸여서

그의 몸은 별빛이 내리는 밤하늘처럼

눈부시고 아름답게 그러나 격한 섬광들과 불꽃들이 아닌

조용하고 은은한 빛들로 타오르듯이 점점 더 커지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휘황찬란한 빛들의 무더기와 뭉치들로 변해갔다.

정수리와 이마부터 그리고 부스스하게 산발하듯이 뻗쳐져 있었던

아름답고 섬찟섬찟했던 백발들과

그리고 주름진 굴곡들로 뒤덮였던 얼굴의

곳곳에서 간신히 역할을 하던 피부 가죽들도

조용히 빛으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어깨와 가슴과 배와 두 팔과 등과 허리 등등

모든 몸들이 결국엔 먼지 부스러기들 같은

신비하고 휘황하며 아주 자잘하고 섬세한 빛들로 변해서

바닥에 미세하게 깔리듯이 자꾸만 자꾸만

천천히 천천히 아주 조금씩 조금씩 쌓여갔다.

마지막엔 그런 빛의 소복한 작은 산처럼 변해버린

옛 스승의 유해나 혹은 잔해를

무덤덤하지만 건조하고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듯이

키 큰 미소년은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네가, 그거 참.

내게 어떤 유언이나 말 한마디 남기지도 않고

숨을 거두고 돌아가버렸네?


소년은 중얼중얼거렸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 말은 들렸다.





이거 참.

거 너무 한 거 아니오?

소년은 계속 말을 덧붙였다.


이제는

피아니에지스테에 대해서 질문도 할 수 없게 되었잖아?


이제는 아무도 없는 실내에서

비록 그 방이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완전한 어둠처럼 무거워서 짓눌린 것만 같은 침묵 속에서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빛이 사라진

혼돈스러운 정적과는 무관하게

소년은 투덜거리고 있었다.


피아니에지스테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되었고

피아니에지스테에 대해서 심지어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으니


소년의 얼굴은 어둠에 뒤덮여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소년의 머리 위로 아주 작은 빛의 몇 점들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방의 높은 천장까지 도달할 것처럼.





키가 큰 소년이 중얼거렸다.

얼굴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서

목소리는 낮고 작았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하죠,

피아니에지스테에 대해선 그래도 말씀을 해주시고

저 세상으로 가셨어야죠.

어차피 저 세상엔 먼저 가실 만한 나이지만.

나이가 너무 많으셨잖아요?


소년은 고개를 들어 높은 그러나 시커멓고 불분명한

잘 보이지도 않는 실내의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잠시 두리번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 같은 천재야,

원래 연습도 하지 않지만.

그냥 치면 저절로 다 연주가 되니까요.


천재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겁니다.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꼭 있었는데

소년은 이제 말끝을 흐리듯이 희미하게 중얼거려서

말소리가 점점 더 불분명하게 작아지며

제대로 음절이 들리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을 돌리고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몸의 모습은 우수(憂愁)와는 다르지만

일종의 고독한 상념이 배어있었다.

몸이나 어둠이나 서로 잘 구별도 되지 않는

검고 흐릿한 색상들끼리 미묘한 경계선을 두고

슬픈 그림자와 그렇지 않은 무한한 암흑의

미세한 돌출로 달라져있었다.




스승님,

전,


소년은 다시 빛으로 변하여 소복히 쌓여있는

스승의 유해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빛의 무덤처럼 작은 산의 뾰족한 모습으로

가득 쌓여있던 그 빛의 부스러기들은

조용히 빛을 발하면서 타오르듯 눈부시게 광채를 보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광채들이어서

마치 어둠 속의 횃불들 같이 보였다.

크고 황홀할 정도로 맑고 투명한 불길들.

그러나 그 광채는 어떤 것도 방의 물체들을 태우지 않았다.

그저 너울거림도 거의 없이 조용하고 의연한 부동의 기세로

서서히 그리고 끊임없이 타오르고만 있었다.

소년의 몸은 그 불길만 계속 보고 있는 것인지

그쪽으로 고정된 채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저는,

피아노의 모든 걸 다 익혔습니다.

그런데,





피아노의 불멸의 존재이자 신성한 교사였던

노인은 이미 빛으로 주저앉은 한 무더기 작은 산 같은 빛들로 화(化)해서

하염없이 언제까지고 타오르고 있어서

그런 그에게 작은 소곡(小曲) 한 곡조차도 쳐주지 못하므로

그는 대답을 들을 사람도 대답을 들을 방법도 없었다.

슬픈 저주 같은 푸념을 더 하고 싶었는지

소년은 계속 중얼거렸다.



왜, 스승님만큼은 제가 끝끝내 뛰어넘지 못한 걸까요?

스승님은 뭐가 그렇게 잘나셨습니까?


빛으로 변한 먼지들은 이제는 그 양도 자꾸만

증발하는 물이나 술 같은 액체의 종류처럼

어느새 줄어들고 있었다.

점점 더 그 빛의 작은 산은 높이도 전체적인 크기도

낮아지고 또한 작아지고 있었다.


제가 스승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했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제게 이러실 수도 있냐고요?


도대체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소년은 더 이상 지옥처럼 참혹한 어두운 방에서 유일한 빛인

노인의 유해 같은 타오르는 불길의 작은 산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그의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를 테면 자기 발 앞의 땅바닥 같은 곳을.

한참을 묵묵히 마지막 스러져가는 아름다운 불길들과 그 불빛은

외면하는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소년이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크게 질렀다.

소년이 내려다본 땅바닥에 뭔가 글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잘 보이는 야광 성분으로 칠한 듯한

황금색 글자들이었다.


내가 죽었으니

이제 세상에서 가장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유일무이한 연주자였으니까.





두 문장은 조용히 은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빛나면서

바닥에서 마치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노려보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년의 입에서 낮고 날카로운 소리가 다시 또 튀어나왔다.


으아!




아까는 앗! 이었으나

지금은 그래도 한 글자의 음성이 더 늘어난 두 글자의 음절로 된

음성이 되어서 목구멍에서 비명처럼 고함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헛소리는 그만 좀 작작해, 이 노인네야!

이 왕국엔 피아니에지스테가 단 1대만 있지만

대륙 전체에는 3대가 있었다고.

물론 그 중에 1대가 우리 나라인 이 왕국에 있었고.

당신만이 유일무이한 존재였다고?


소년의 목소리는 다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 1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직 노인네인 당신만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나를 만나려고 이렇게 기다려온 목적이

겨우 이런 것이었어? 이 살아서 송장이 이미 다 되어있었던 노인네야?



그래요, 그래.

에휴, 당신이 제일 잘났다고.


당신이 제일 잘 나갔어요

소년은 이제 돌아서려고 하고 있었다.

소년의 어깨가 왠지 축 쳐진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이 빠져나간 힘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연약함이 느껴지는 키가 훌쩍 큰 소년의 뒷모습이

점차 사라지려고 하는 순간에

멀리서 빛의 무더기들이 쌓여있던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음산하고 길고 낮은 비웃음은

틀림없이 노인의 평소 살아있었을 때의 목소리였다.


너의 음악은 너의 영혼처럼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뭔 소리야?

소년이 싸늘한 목소리로 고개를 돌리고는

어깨 너머의 뒤가 될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어차피 방은 거의 아무것도 식별이 가능하지 않았지만.

무슨 헛소리냐고?


살기엔 너무 답답하고

죽기엔 이 세상은 너무 무의미하다고.


소년은 이제 완전히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앞을 향해서 완전한 어둠 속을

심해(深海) 속의 밑바닥에서

물고기가 영원한 고요의 바다인

그토록 짙은 검은 물을 가르고 나아가듯이

보이지도 않는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완성된 존재야.

마치 내 음악처럼.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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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회: 한낮의 음악 학교 23.11.03 45 0 5쪽
10 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23.11.01 5 0 12쪽
»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23.10.30 9 0 9쪽
8 8회: 연금술에 대하여 23.10.27 12 0 15쪽
7 7회: 칼 판매상의 마지막 이야기 23.10.26 15 0 9쪽
6 6회: 내게는 뭔가가 없었다네 23.10.25 17 0 12쪽
5 5회: 칼 판매상과 도시 23.10.23 28 1 15쪽
4 4회 : 내 이름은 엔티레이미크 23.09.19 45 1 4쪽
3 3회 : 금지된 마법서 +1 23.09.18 48 2 10쪽
2 2회 : 세상에서의 처세 +1 23.09.13 94 3 10쪽
1 1회 : 시장에서 +2 23.09.12 264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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