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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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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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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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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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달빛은 무심하고도 태평해서 평화로울 정도로 잠잠하고

모든 것은 편안한 깊은 잠에 들어간 듯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럼에도 자신만의 몫을 챙기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역할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일부의 구성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어서

적적하고 괴괴하면서도 끝없이 늘어서 있는 듯한 풍경은

그 자체로 어떤 움직임과 활동을 숨기고 있어서

세상은 은밀하고 비밀한 기척과 소음(騷音)들이 간혹 들릴 때가 있었다.









사내는 긴 장검을 들고 있었다.

땅으로 비스듬히 사선으로 내려진 장검에서

칼날의 길이를 따라서 같이 흐르고 있는

붉고 검고 가끔은 검푸르며 짙은 자주색이 되어버린 핏줄기들과

칼날에 엉키듯 묻어있는 핏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왼손을 들어올렸다.

왼손에는 은그릇인지 알 수 없는 반짝거리는

금속 그릇이 쥐어져 있었고

그 왼손으로 장검의 칼날에 대고 조용히 물이 흐르도록

칼날의 경건한 각도를 함께 따라가면서

신중하고도 태연한 자세로

장검의 위와 아래로 천천히 비스듬히 오르고 내리면서

그 그릇의 서서히 물을 부었다.

오른손은 고정하다시피 잠자코 정지시키고

왼쪽의 몸과 왼쪽의 손으로 달밤의 차갑고 푸른 공기만큼이나

싸늘한 물을 냉혹하고 장대하며 강렬한 장검에 흘려 내려보내는

그의 의식은 무엇인가 비장하기도 하고 침울해 보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엷은 우수(優愁)와 슬픔이 느껴지는

그의 비애는 달이 뜨는 밤이라서 으스스하기보다는

단지 어두운 밤이라서 처연하고 두려워 보였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사람의 시체도

하다못해 털이 뽑힌 닭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장검은 차츰 차츰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검붉고 진한 피는 사라지는 만큼

번쩍거리는 아름다운 금속이

달빛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 속에서 그 칼날의 면과 면적처럼

잠들어 있던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사내의 머리칼들은 억세지만 부스스하게 짧게 잘라져 있었다.

다듬었다기보다는 그냥 방치한 것처럼 보이는 식으로.

몸통엔 가벼운 경장갑으로 흔히 하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하반신의 바지는 가죽 갑옷의 하반신 부위에 착용하는 종류는 아닌

그냥 가죽 바지 같아 보였다.

사내는 단순하지만 집중된 태도로 계속 물을 내리부어서

차갑고 고요한 정신처럼 느리고 차분하게

자신의 장검을 정화(淨化)시키듯이

장검에 달라붙은 핏방울들을

죄악과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분리라도 시키듯이

자신의 무기를 천천히 아주 세심하게 씻어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르고 있었던 것과


무슨 차이가 도대체 있다는 말인가


그의 이상하게 낮은 음성의 탄식은

자문자답 같기도 하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그저 혼잣말 같기도 했다.

무엇인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신경질이 난 것 같은,

가벼운 분통이 터진 것 같기도 한.



아무리 많이 집에 돈과 옷과 음식이 쌓여 있어도

잊어먹거나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쓰지 않은 것과


처음부터 너무 가난해서

집에 돈도 옷도 당장 먹을 음식도 없는 것이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내는 중얼중얼거리며 가볍게 머리까지 양쪽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지 않고 불쾌하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뜻에서 하는 식으로.






이 세상 도처에 창궐하는 악령들이

그 검은 흑마법의 힘으로 이 왕국과 대륙의 일부까지도 유린했었다.


나는 이런 지옥과도 같은 사태에

그저 살아남기만 했을 뿐,


내가 귀환을 해도 나를 반겨주는 사람조차 드물다.


난,


왜 이런 길을 걸었을까.



인간이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인가?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가 인간인가?


사람들이 악령보다 더 악할 수도 있다면

그렇다면 악령을 퇴치하고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몰아내고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내의 얼굴을 보려고 해도

달밤엔 사물이 희미하고 아련해져서

식별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그의 얼굴은 흐릿했다.

그가 등을 돌리고 걸어나갔다.

세상은 다시 정적처럼 침묵을 지키는

무질서하지만 무의미한

원래대로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정지된 듯한 고요로 돌아갔다.

점차 구름들이 검고 어둡고 짙어졌다.



약속의 땅을 연주해보지 않겠나?


저녁은 일찍 당도하여 세상은 어둡고 침울한

무겁게 가라앉은 계절답게

음침하고 흐릿했다.

거리도 건물들마다의 실내도 벌써 어둠에 잠기면서

일찍부터 남은 날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글쎄.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청년은 담담히 웃고는 왼손 한 손을 들어올려

자신의 왼뺨 머리숱 부근을 만지며

자연스럽게 그 손으로 턱을 고였다.

청년의 왼팔이 대고 있는 의자는

갈색의 단단하고 큰 나무 목재로 만든

단순하고 실용적이며 저렴한 가격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청년은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가슴에 대듯이

의자를 거꾸로 앞뒤를 바꿔서 앉아서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 이미 잘 보이지 않았다.

키가 크고 친절한 미소가 눈에 특징적으로 잘 띄는 청년은 그러나 어두운 방의 등잔처럼

폭발적인 섬광 같은 아름다운 빛이 자연스레 섬세한 격랑이

끊임없이 그에게서 흘러나오듯이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구 혼돈의 범람으로 분출하면서

어두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미(美)와 도취와 찬탄의 쾌락이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다면

청년의 지위와 신분은 확실해지리라.

청년은 세상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매력의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평생을 살면서 찾으려고 애를 쓴다고 해도 찾지 못할

외모의.





그러나 그 놀라운 반열에 오른 용모도

어떤 빛도 일찍 사라지는 계절의 복판에서는

실내와 실외를 가리지 않고 빛을 발할 수 없었다.

자꾸 둘이 있는 방은 어두워져만 가고 있었다.

가을은 조락과 쇠퇴의 우울함으로

사람들을 서글픈 체념으로 초대한다.

그렇지만 청년들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도 없이

그들 스스로 온전히 만족스러운 행복에

편안하게 도취해 있었다.


젊음이라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인생에서 시간의 나무가 드리운 신록의 그늘 아래에서

그들은 쉬고 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단지 선호만 해도 부분적으로는 즐길 수 있었으니까.

소질과 재능은 전문적인 직종의

창작을 해야만 하는 종사자들만이

소유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피아노를 꿈꾸고 있었다.

소리가 잠시 잠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지기 위해 물러나면서

아주 잠깐 그 현전과 상실 사이에 만들고 마는

그 덧없는 일시적인 황홀한 미(美)에 대하여,

그들은 경건하고도 열정적인 숭배의 집념처럼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전장(戰場)에서의 영광과 평가로 얻는 것과는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것을

그들은 피아노 한 대에 모두 걸은 것이었다.

그들의 삶도 그들의 시간도 그들의 열정도

그들의 사랑도 그들의 신념도 그들의...


어둠 속에 들어가 있어서

목소리만 들리지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친구가

그 진정으로 놀라운 미청년에게

다시 말했다.


왜? 지금 같은 시간이면

영원히 그리워하는 유랑(流浪)하는 자의 슬픔이

무척 잘 어울리지 않겠나?


상대방은 잠깐 짧은 생각에라도 잠긴 것처럼

말을 순간적으로 끊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연주해줬으면 해.

듣고 싶어.


아, 또 뭘 듣고 싶어?

우리가 매일 듣고 매일 연주하는 게 음악인데.

피아노는 그만 치고 싶어.

적어도 음악 학교를 나오고 난 다음부터는.


상대는 어디선가 웃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 않는 실내의 어디에선가.


마치 그 말은 꼭 우리의 음악 학교를 졸업하고 난

그 다음부터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청년도 따라서 가볍게 웃었다.

반쯤 어둠이 가리기 시작한 얼굴은

부드럽게 웃으며 잔잔하게 짓는 표정이

해변에 밀려오는 가벼운 파도의 물결처럼

보는 사람의 가슴을 그러나 미칠 듯이 설레게 뒤흔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렇게 들렸나?

난 집에 돌아가면 그냥 편히 쉰다네.

손가락이든 팔이든 신체를 그리고 정신마저도

더 자극시키지 않고 이완시키는 것이

오히려 회복 효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것인지

그 다음 날 연습과 훈련에 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더군.

무리해서 미친 듯이 연습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달린다고 해서

더 나은 실력이 쌓이지도 않더군.

적어도 나는 그래.


적어도?

상대는 한쪽 어깨 같은 것을 들썩였는지

어둠 속의 그림자가 몸의 일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이젠 등잔을 켜야 하지 않을까?

너무 어두운데.

자네는 방에서 그렇지 않으면 초를 켜나?

청년은 정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상대의 불분명한 윤곽으로만 보이는 몸을 향해 물었다.




아니야.

나도 등을 켠다네. 초는 너무 번거롭고 그래서.

청소하기가 너무 귀찮잖아.

상대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서

방을 이리저리 성큼 성큼 그리고 뚜벅 뚜벅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곧 실내가 사물이 제대로 보일 정도로 밝아졌다.




자네는,

피아노를 그만두면 뭘 할 생각인가?

상대방도 청년처럼 장난스레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

몸을 기대지 않고 정반대로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마주 보고

거꾸로 앉아서 두 다리를 의자의 바깥 양옆으로 벌리고 있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세계의 질서가 미(美)로 구현될 가능성의 확률이

인간의 몸으로 완성된 용모의 청년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천진하고 선량한 성격처럼 어떤 잡된 감정이 없어보이는

깨끗하고 신선한 미소로.


나?

나는 글쎄... 뭐를 하고 있을까?

아마도,


나는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상대방도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쾌하고 폭발하는 신 나는 폭소였다.


자네도 참.

자네는 별 고민도 없어 보이고

그리고 어떤 감춰둔 다른 속셈이 없어.

그게 참 좋아.



청년도 역시 웃었다.

내가 피아노를 관둔다면 도대체 뭘 할 수 있겠어?

지금까지 계속 피아노만 쳐왔는데.


바깥은 이미 창밖이 새카만 흑색이어서

거리도 건물들의 높은 층 부분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미 한밤중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 이리 오게나.

저녁 식사는 못 되겠지만,

우리 같은 가난한 학생들이 다 그렇지 뭐,

간단한 요기라도 해야지.

이미 시간이 다 되었어.


내가 자주 마시던 차라네.

자네도 한 잔 마시게나.



상대는 잔을 한 잔 들고 청년에게로 다가왔다.

청년은 의자에 앞뒤를 거꾸로 앉은 채로

다가와서 선 상대의 허리와 그 위의 상반신을

마주하고 올려다보면서 그가 내민 잔을 받았다.


고맙네. 아주 향기가 좋은데.

미소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청년이 감사를 표시했다.

상대방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유쾌한 기분이었다.

청년은 천천히 음미하듯이 찻잔의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뜨거운데.

역시 추운 계절엔 이런 걸 마시니까 몸이 대번에 따뜻해지는군.


상대는 잠자코 그런 청년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조용하고 느린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리고 청년의 손에서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부서지는 소리가 파편이 튀듯 실내의 어두운 흐릿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이, 이게, 어 어 떻게, 된 건가?

난, 나는...


지금 내가 뭘 마신 거지?


청년의 꺼져 들어가는 낮은 목소리는

의문스러워서 묻는 것이 아닌

경악과 당황과 그리고 공포스러워서

물어보는 것처럼 들렸다.




그냥 그렇게 닥치고 조용히 사라지게나.

세상은 그런 거야.


전신을 격렬하게 경련하듯이 떨면서

방바닥을 기어가면서 비참하게 온몸을 뒤틀고 구르던 끝에

두 눈이 까뒤집혀지고 입에서 이상한 거품이 끊임없이 나오다가

얼굴의 피부 색깔까지 그렇게 환하지 않은 실내 상태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이상하게 변해가는 청년에게

무심하고도 건조해서 오히려 담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상대방은 청년의 시체로 변해가는 몸을 내려다보면서

침착하게 비웃었다.

상대방의 얼굴은 눈빛이 이상하게 사납고 차갑게 뒤틀린

감정을 싸늘하게 띠고 있듯이

괴상한 각도에서 위를 올려다본 모습처럼

낯설고 잔혹한 인상이었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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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회: 한낮의 음악 학교 23.11.03 45 0 5쪽
» 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23.11.01 5 0 12쪽
9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23.10.30 8 0 9쪽
8 8회: 연금술에 대하여 23.10.27 12 0 15쪽
7 7회: 칼 판매상의 마지막 이야기 23.10.26 15 0 9쪽
6 6회: 내게는 뭔가가 없었다네 23.10.25 17 0 12쪽
5 5회: 칼 판매상과 도시 23.10.23 28 1 15쪽
4 4회 : 내 이름은 엔티레이미크 23.09.19 45 1 4쪽
3 3회 : 금지된 마법서 +1 23.09.18 48 2 10쪽
2 2회 : 세상에서의 처세 +1 23.09.13 94 3 10쪽
1 1회 : 시장에서 +2 23.09.12 264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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