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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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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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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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와 소년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너 소식 들었어?


뭐를?

난데없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건조하고 그래서 무료하기도 한 나른함 끝에

단호해진 무의미한 음색이었다.


다시 돌아왔다는데.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이.


유학 기간이 길었나 봐.

역시 약간은 냉소적인 대답이 또 돌아왔다.


유학 기간이 길었다기보다는,

앉아 있던 금박의 도금 문양들이 뒤덮인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키가 크고 금발이 멋진 소년이

금발만큼이나 싱그러운 미소로 말했다.


그만큼 수치스러워서였겠지.

너무 창피했었을 테니까.


틀림없어.

그가 바지의 양쪽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확신에 찬 어조였지만 혼잣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등을 돌리고 유리창 밖의 눈부신 오월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말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절은 맑은 물로 채워놓은 마법 액자 속의 풍경화처럼

아름답고 투명했다.


그거야,


뭐 한두 사람이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넓고 큰 그러나 얇은 책을 천천히 한 장 한 장씩 넘겨가면서

책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있던 다른 소년이 대답했다.

그 꿀처럼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년은

먼저 말을 꺼낸 소년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키가 큰 소년보다 더 사랑스러운 미남이었다.

다만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듯한 무표정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눈 코 입의 얼굴 생김새와는 달리.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가 창궐하고

그 악령들에게 물려서 죽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고

그런 집안이 이 왕국에 어디 한두 집이야?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년은 유심히 그 넓고 큰 얇은 책을 읽고 있어서

책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친척들과 가족들이 그것도 자기 어머니도 그렇게 해서


비로소 얇고 큰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을 향해

몸을 돌리면서 키가 큰 소년이 말했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많이 괴로웠겠지.



당연하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악령에게 물린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외국으로 도피하듯이 음악 교육을 받으러

서둘러 유학까지 가고 그랬지?

유학을 갈 필요도 없었어.

다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


무슨 자신감?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이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피아노를 잘 쳐.

아무도 그 녀석을 피아노 연주에서는 이기지를 못 해.


키가 큰 소년은 뚫어지게 의자에 앉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넓고 큰 고급스러운 종이들로 된 얇은 두께의 책을 보고 있는

키가 작은 소년은 앉은 채로 쳐다보지도 않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키가 큰 소년은 그래도 뭐라도 들어보겠다는 듯이

키가 작은 소년이 무슨 말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내가 그런 말을 하겠냐?

아무튼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도 말자고 전해.


뭐를?


아, 난 배고프다고.

자꾸 짜증나게 말을 시키고 그래.

탐스러운 꿀빛이 흐르는 밝은 갈색 머리의 소년은

책을 탁, 하고 소리가 나게 덮었다.

그 책을 자신의 앞 탁자에 함부로 던지듯

그리고 수직으로 내려놓듯이

탁자를 오른손에 든 책으로

책의 직각선이 아닌 수평선이 탁자 위에 닿게 치고는 내던지면서

벌떡, 소년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역시 키가 큰 소년이 앉아 있었던 의자와 비슷한

금박 문양이 여기 저기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있고

똑같이 빨간 가죽 부분이 앉는 자리인

하얀색 목제 의자였다.

소년이 보던 책은 요리책이었다.


뭘 먹으러 갈까?

난 배고파.

갈색 머리의 소년은 그 귀여운 잘 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래. 뭐라도 먹으러 가자.

우리 집인데도 마치 내가 손님이라도 된 것 같기는 하지만.

키가 큰 소년이 상대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덤덤하고 아무 생각도 담겨있지 않은 듯한 어조로

선선히 말을 했다.


그야,

내가 주방이나 기타 여러 장소들을

이 저택에 대해선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서가 아닐까?


소년은 자신감이 있는 경쾌한 목소리에 어울리게

가볍고 신 나게 걷고 있었다.


키가 큰 소년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흰색의 거대한 문을 향해서 넓고 큰 방을 먼저 걸어가기만 했다.

두 소년은 문을 열고 나가서

붉은 융단이 깔린 길고 긴 흰색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벽도 천장도 바닥을 제외하면 모두 삼면이 다 흰색인

비교적 좁고 그렇게 가늘고 그러나 상당히 긴 모양의 복도였다.


키가 큰 소년이 키가 작은 소년이 있는 쪽인

오른쪽으로 약간 몸을 틀듯이 고개와 오른쪽 어깨를 돌리며

자기 옆의 소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은 왜 모습이 음악 학교 교사인

레이피엘페이셔스님의 얼굴을 닮은 거냐?


둘이 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거든.


아?

키가 큰 소년은 놀라서 입을 잠깐 딱 벌렸다.

언제부터?

주인 혹은 주인의 아들인 소년은 다시 물었다.


그게 아마도... 꽤 오래 되었지 않았을까?

나도 잘 몰라. 내가 남의 집안에 대해서 뭘 알고 있겠어?


그런데 왜 우리 집에 관해서는 이것저것 잘 알고 있냐?


그야,

키가 작은 소년은 시종일관 앞만 보면서 걷고 있다가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년을 보려고 몸을 조금 왼쪽으로 돌렸다.

여전히 걸어가고는 있으면서.


너는 내게 있어서

음악의 천재인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이나

그 누나인 레이미엘페이셔스님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내가 타인의 삶에 왜 관심을 갖겠니?


두 소년들이 걸어가는 복도는 의외로 길어서

그들이 이런 쓸데없는 잡담을 하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여전히 복도의 끝까지 닿지 못했다.

복도의 정면 마지막에는 좌우로 갈라지는

새로운 통로가 수평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키가 큰 소년이 나온 방에서 걸어가고 있는 복도는

수직으로 그 분기점까지 도착하게 곧고 깨끗하게 뻗어있었다.




세계와 나는 같으나 다르고

그 사람들과 나는 같으면서도 달라서 일치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내가 될 필요가 없고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그런 것처럼.

이것이 세상의 균열이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좁고도 무한한 간극을

차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모호한

그만큼 아득한 거리를 만든다.

이 거리가 다시 당신과 나 사이의 각자 다른 삶을 보장한다.

이 불가항력의 차이에서 비극을 보든 희극을 즐겁게 누리든

인간 세상의 불완전한 완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가능하게 한다.

빛도 어둠도 슬픔과 기쁨도 행복과 불행도 고통도 쾌락도.

불확실한 완전만이 세상에서 존재한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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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회: 나는 누구인가 23.11.05 5 0 5쪽
» 12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와 소년 23.11.04 6 0 7쪽
11 11회: 한낮의 음악 학교 23.11.03 45 0 5쪽
10 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23.11.01 4 0 12쪽
9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23.10.30 8 0 9쪽
8 8회: 연금술에 대하여 23.10.27 12 0 15쪽
7 7회: 칼 판매상의 마지막 이야기 23.10.26 15 0 9쪽
6 6회: 내게는 뭔가가 없었다네 23.10.25 17 0 12쪽
5 5회: 칼 판매상과 도시 23.10.23 28 1 15쪽
4 4회 : 내 이름은 엔티레이미크 23.09.19 44 1 4쪽
3 3회 : 금지된 마법서 +1 23.09.18 48 2 10쪽
2 2회 : 세상에서의 처세 +1 23.09.13 93 3 10쪽
1 1회 : 시장에서 +2 23.09.12 264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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