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벽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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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kkoma
작품등록일 :
2023.11.21 15:32
최근연재일 :
2024.01.31 19: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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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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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184.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1)

DUMMY

재호가 서둘러 경매대로 달려가자 빨간 모자를 쓴 경매사 여럿이 재호가 다가온 것을 보고는 문어에 눈독을 들이며 입맛을 다셨다.


이윽고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첩 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무언가 적는 사람도 있었고, 손가락을 활짝 펴 이상한 모양을 하며 수신호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내 밖으로 기어 나온 문어 한 마리를 서둘러 노란색 플라스틱 통에 다시 담아둔 재호가 시원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에헤! 삼촌! 그 가격엔 안 돼! 어어! 거기 사장님! 그러지 마요! 문어도 만지면 아퍼! 만지면 안 돼요!”


주황색 모자 쓴 사내 몇이 남색 고무장화를 신은 채, 곳곳에 펌프로 끌어올린 바닷물을 호수로 뿌려대고 있었다.


몇몇은 문어를 들어 올려 크기를 가늠하려는지 손을 대려하자 재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를 저지하고 있었다.


전쟁터 같은 이 곳에서 경매는 빨간 모자를 쓴 경매꾼들만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수신호와 이상한 용어는 경험이 오래된 장사꾼들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뱃놈으로 나고 자란 재호는 걸음을 떼면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탔고, 아직 17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경매꾼들 못지않은 노련한 전문가가 되어 아버지가 잡은 수산물을 좋은 가격에 팔고 있었다.


“재호야! 오늘 비싸, 너무 비싸!”


“어이구! 삼촌 재밌는 소리 하시네! 비싸면 사덜 마셔! 저기 이모 산다? 이모 산다? 삼촌? 난 몰라? 저기 뚱땡이 이모가 다 가져간다? 난 몰라? 나 몰라요?”


능청스럽게 말하는 재호를 향해 눈을 흘기던 사내는 이윽고 체념했다는 듯이 재호에게 손가락 일곱 개를 펴서 가리켰고, 재호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소리쳤다.


“에이! 삼촌! 벌써 내년이면 2000년이야. 이제 막 세기가 바뀌는데 문어 값도 바뀌지? 뭐가 그리 비싸다고 난리셔? 선수끼리? 그러다 놓치면 후회한다니까! 어 거기 삼촌! 오케이! 고거 두 마리 가져 가셔!”


재호가 연희에게 건네 준 통영 특상 돌 문어는 씨알도 굵고 상태가 좋아 족히 한 마리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거래되겠지만, 지금 좌판에 펼쳐놓은 문어들은 씨알이 특상보다는 작았다.


제일 실하고 좋은 놈은 연희를 위해 빼돌려놓았으니 적정선에서 타협을 보고 적당한 가격을 받아야만 오늘 잡은 문어들을 모두 팔 수 있는 것이 자명한 이치였다.


- 으이구! 저 병신같은 놈!


얼마 남지 않은 종이컵 안에 믹스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은 재호의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이미 재호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아들 재호가 연희를 위해 바다 위에서 잡은 것들 중 크고 실한 좋은 놈들을 몰래몰래 빼돌려 건네주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 재호는 자신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는 눈치였지만, 이미 재호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던 터였다.


사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었던 것은 자신의 절친인 병철이가 죽고 난 뒤, 홀로 이 거친 바다 생활을 해야 하는 제주댁과 연희가 너무나도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그 무엇보다 죽은 친구 병철이를 위한 마음이 더 컸다.


어느새 아침 7시가 되어 새벽에 나갔던 배들이 모두 돌아와 항구에는 그 여느 때보다 활기가 끓어 넘쳤다.


밝게 떠오른 주황색 해가 가득 차올라 바다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재호의 아버지에게 있어 문어를 몇 마리 건졌든 간에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푸른 곳간에서 오늘 많이 잡지 못해도 괜찮다며 환하게 웃던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 병철이를 생각하며 재호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문어가 열 마리면 어떻고, 스무 마리면 어떻냐... 병철아.... 병철이 이 놈의 새끼야... 보고 싶어 죽겠다. 이 놈아....


오늘따라 친구 병철이 무척이나 그리웠던 탓일까.


자꾸만 연희의 하얀 얼굴을 흘끗거리고 돌아보게 되는 하루였다.


재호의 아버지는 병철을 생각하며 햇빛에 반짝이며 별처럼 빛나는 이른 아침 욕지도 앞바다를 그렇게 오랫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찰랑이는 파도위로 햇빛에 반사된 빛이 눈부시게 일렁이는 1999년 8월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철썩이며 검은 바위들 틈으로 파고드는 거친 파도에 하얀 물보라가 공중에 흩어졌다.


거센 파도가 일 때면, ‘큰고랫여 바위’에서는 위아래가 뒤집히는 파도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파도가 뒤집히는 곳에서 자라야만 미역이 더 맛이 좋다고들 했다.


유독 거친 물결에 뒤집힌 물보라가 흩날리는 ‘큰고랫여’ 위에 바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것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정숙이었다.


바닷 사람들은 모두 바다 위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를 모두 ‘여'(礖)’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든여’는 잠겨 있는 바위라는 뜻이었고, ‘난여’는 나와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또 ‘고분여’는 숨바꼭질 하듯 숨어 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불렀다.


넓직한 커다란 고래등 같다고 하여 큰고랫여라고 부르는 바위 위에 서서 정숙은 아프고 지친 몸을 이끌고 간신히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었다.


제주댁 정숙은 자신의 남편 병철의 기일을 맞아 오늘 저녁 제사상을 차리기 위해 위험하기로 소문난 ‘큰고랫여 바위’에 홀로 찾아온 것이다.


넓직한 검은 바위들로 이루어진 작은 섬 같은 큰고랫여에는 미역 뿐만 아니라 해조류를 먹기 위해 전복이 모여 들었고, 전복과 성게를 잡아먹는 돌문어 역시 종종 그 모습을 드러냈다.


- 돌문어가 있으려나... 없으면.... 어떻게... 군산댁한테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정숙은 자신의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깊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재호의 어머니인 군산댁에게 부탁해, 재호의 아버지에게 문어를 구할까 싶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만 같았다.


이윽고 정숙은 거친 파도물결을 바라보며 고개를 세차게 휘휘 가로저었다.


- 요 년 난거 보라? (요 계집애 봐라?) 초마 가라, 도둑놈 심뽀구나! (아니 원, 그거 도둑놈 마음이구나!)


귓가에 늙은 자신의 할머니가 정숙을 향해 타박하며 뭐라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자신의 하나뿐인 딸 연희는 재호를 사랑한다고 했다. 아니 재호 역시 연희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사실을 재호의 부모는 모르는 듯 했다.


그런 그들에게 감히 귀한 돌문어를 달라고 부탁을 한다는 것은 영 도둑놈 심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정숙은 자신의 딸 연희가 뱃일하는 재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죽은 남편 병철의 유언처럼 여긴 연희의 혼례만큼은 꼭 육지 남자와 시키고 싶었다.


- 할망! (할머니!) 어떵 살아 점쑤과? (어찌 지내고 계세요?)


갑자기 자신의 할머니가 보고 싶어진 정숙은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옷소매로 거칠게 닦아내며 그립고 그리운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미 자신의 나이가 어느새 쉰 줄에 접어들었으니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진즉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절대로 다시는 제주 땅을 밟지 말라는 할머니의 말 때문에 정숙은 그 후로 고향 제주를 찾아가지 못했다. 일부러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다.


그 옛날 육지로 가는 배에 자신의 등을 세차게 떠밀며 정숙의 할머니는 말했다.


“호꼬만 촘앙 살암시라(조금만 참고 살고 있어라!)”


펑펑 우는 정숙의 눈가를 훔쳐 주며 눈물을 닦아주는 거친 할머니의 손가락은 이미 본인의 눈물을 닦아서인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칠 줄 모르고 닭똥 같은 굵은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는 어린 정숙을 애처롭다는 듯이 껴안은 할머니는 자신을 데리고 통영 욕지도로 떠날 정숙의 육촌 친척 어른을 향해 힘겹게 말했다.


“잘 돌앙 살아 줍서! (잘 데리고 살아주십시오!)”


육지로 자신을 보내기 전날 할머니는 가진 모든 돈을 털어 모아 아침밥으로 어린 정숙에게 ‘곤밥’을 해주었다.


흰쌀로 지은 밥을 말하는 곤밥은 제주도에서 무척이나 귀했다.


생일상으로도 받기 힘들만큼 귀하디 귀한 흰쌀로 가득한 밥상 앞에서 정숙은 아버지가 죽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거둬 키워준 친할머니와의 이별을 직감했다.


품 안에서 자신을 놓기 싫다는 듯이 꽉 껴안고 흐느껴 우는 할머니의 마음을 어린 정숙은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을 ‘그슨대’로부터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육지로 보내는 할머니의 마음은 오죽하랴.


마치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 어린 정숙에게도 느껴졌다.


일곱 살 어리디 어린 정숙은 이내 결심이 선 듯 단호한 눈빛으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육촌 아즈방! 날 도랑 가 줍서(육촌 아저씨! 나를 데리고 가주세요!)”


점점 작아져 하나의 점으로 변한 할머니를 향해 꼭 다시 제주도로 찾아 오겠다고 소리치며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자신을 향해 정숙의 할머니는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득이 멀어져 가는 친손녀 정숙의 귓가에 그 소리가 닿을 리가 없었다.


“게메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코마씀.... (그러게나...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니...)”


어렸을 적, 옛날 일이 생각난 정숙은 서둘러 고개를 휘젓고는 자신이 어젯밤 설치해둔 암초 사이 틈새에 놓은 통발을 들어올렸다.


이윽고 통발을 낑낑 거리며 끌어올린 순간 정숙은 통발 안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음을 알아 차렸다.


자고로 물질을 하는 해녀라면 자신이 들어 올린 통발의 무게만 느껴도 무엇이 잡혔는지 알 수 있기 마련이었다.


실망한 표정으로 그 옆자리에 놓은 다른 통발을 들어 올린 정숙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내려앉았다.


두 번째 통발 역시 텅텅 비어 있었다.


-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이를 어쩌면 좋나...


성치 않은 허리와 무릎으로 겨우 몸을 일으킨 정숙의 얼굴은 눈물을 쏟아내기 일보직전이었다.


이 험한 통영 욕지도 바다에 자신과 딸 하나만을 남겨두고 저 멀리 저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남편 병철을 위해 실한 문어를 제사상에 올리고 싶었던 정숙이었다.


정숙은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숙은 꺼내두었던 통발 두 개 안에 다시 돼지비계 몇 덩어리를 넣어두고는 좁디 좁은 바위 틈새에 살며시 넣어두었다.


정숙은 성치 않은 몸으로 조심스럽게 큰고랫여 바위를 내딛기 시작했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정숙은 요즘 따라 온몸에 찾아오는 저릿한 통증과 이유모를 근육통에 낑낑대고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무릎이나 허리 같은 관절을 무언가 차갑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으로 마구마구 쑤셔대는 듯했다.


게다가 깊은 잠이 든 새벽녘이면 찾아오는 고열에 정숙은 딸 연희가 깰까봐 밤새 숨죽여 베개로 자신의 입을 막고 끙끙 거리며 앓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분명 자신은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부엌에 앉아 미친 듯이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맨손으로 퍼먹고 있었다는 점이다.


- 노망이라도 난 건가. 벌써 치매인가... 우리 연희 고생시키지 말고 일찍 죽어야 하는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딸 연희의 저녁상을 차려주기 위해 집으로 나서는 정숙의 발걸음은 가벼운 망사리와 달리 무겁기만 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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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외전1-192. 신병(神病)- 허주 (3) 24.01.17 18 1 13쪽
191 외전1-191. 신병(神病)- 허주 (2) 24.01.16 16 0 12쪽
190 외전1-190. 신병(神病)- 허주 (1) 24.01.16 14 1 12쪽
189 외전1-189. 신병(神病)- 바보 똥환 (3) 24.01.15 16 1 11쪽
188 외전1-188. 신병(神病)- 바보 똥환 (2) 24.01.15 16 1 12쪽
187 외전1-187. 신병(神病)- 바보 똥환 (1) 24.01.14 14 1 11쪽
186 외전1-186.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3) 24.01.14 15 1 12쪽
185 외전1-185.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2) 24.01.13 18 1 11쪽
» 외전1-184.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1) 24.01.13 16 1 12쪽
183 외전1-183.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3) 24.01.12 17 1 11쪽
182 외전1-182.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2) 24.01.12 19 1 12쪽
181 외전1-181.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1) 24.01.11 19 1 12쪽
180 챕터9-180(완). 화마 봉인- 사랑하는 그대에게 (2) 24.01.11 19 2 12쪽
179 챕터9-179. 화마 봉인- 사랑하는 그대에게 (1) 24.01.10 20 2 11쪽
178 챕터9-178.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4) 24.01.10 17 2 12쪽
177 챕터9-177.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3) 24.01.09 17 2 11쪽
176 챕터9-176.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2) 24.01.09 14 2 12쪽
175 챕터9-175.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1) 24.01.08 18 2 12쪽
174 챕터9-174. 화마 봉인- 모두 안녕 (5) 24.01.08 17 2 11쪽
173 챕터9-173. 화마 봉인- 모두 안녕 (4) 24.01.07 17 2 11쪽
172 챕터9-172. 화마 봉인- 모두 안녕 (3) 24.01.07 16 2 11쪽
171 챕터9-171. 화마 봉인- 모두 안녕 (2) 24.01.06 17 2 11쪽
170 챕터9-170. 화마 봉인- 모두 안녕 (1) 24.01.06 16 2 11쪽
169 챕터9-169. 화마 봉인- 양양 낙산사 (2) 24.01.05 16 2 11쪽
168 챕터9-168. 화마 봉인- 양양 낙산사 (1) 24.01.05 17 2 11쪽
167 챕터9-167. 화마 봉인- 드러난 진실 (2) 24.01.04 16 2 12쪽
166 챕터9-166. 화마 봉인- 드러난 진실 (1) 24.01.04 17 2 11쪽
165 챕터9-165. 화마 봉인- 기억의 편린 (4) 24.01.03 15 2 11쪽
164 챕터9-164. 화마 봉인- 기억의 편린 (3) 24.01.03 17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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