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벽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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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kkoma
작품등록일 :
2023.11.21 15:32
최근연재일 :
2024.01.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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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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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1-183.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3)

DUMMY

가늘게 손톱 마디처럼 보이는 주황색 일출을 바라보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고 있는 것은 하얗디 하얀 얼굴의 연희였다.


출렁이는 파도 위로 연희의 마음까지 함께 출렁이는 것 같았다.


거친 파도 위에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배에 서있노라면 자신의 머리까지 빙글빙글 돌며 속이 울렁거리는 연희였다.


하지만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재호의 아버지가 자신의 몸 상태를 안다면 당장 호통을 치며 크게 혼구멍이 날 것이 분명했다.


분명 욕지도에 태어난 여인이 무슨 멀미냐며 자신이 아니라 죄없는 재호를 향해 거친 욕을 하실 것이다.


연희는 어느새 울렁거리다 못해 무언가 쓴물이 올라오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재호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배 ‘춘심(春心)호’ 위에서 재호와 연희, 그리고 동네 바보 똥환이 함께 열심히 낚싯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야행성인 문어를 한 마리라도 더 잡기 위해서는 해가 뜨기 전,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새벽에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야만 했다.


배를 타고 30~40여분을 달렸을까, 미리 띄워둔 수심을 재는 흰색 부표를 발견한 재호가 아버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부지! 스탑! 멈춰요!”


조타실 안에 있는 아버지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며 큰 목소리로 외치는 재호의 모습은 어느새 듬직하고 건장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런 재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희는 괜시리 자신이 짐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영 꺼림칙하고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이 시작되려는 7월 말이 문어는 제철이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어 천천히 곱씹으면 느껴지는 달큰한 문어의 맛은 가히 일품(一品)이었다.


통영 앞바다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건진 문어는 특히 실하고 맛이 좋아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리곤 했다.


“야! 이 놈의 새끼야! 부표만 보지 말고, 물의 흐름을 보라니까!”


자신의 아들 재호를 향해 거친 말을 내뱉는 재호의 아버지는 배 갑판 가운데 앉아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며 안절부절하는 여리디 여린 연희의 하얀 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키는 자신의 아들 재호보다 15센티 정도는 더 작았고, 얼굴도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여타 다른 여자 아이들보다 곱디 고와 마치 ‘서울 깍쟁이’ 같아 보였다.


아담한 체형에 심성도 여리고 몸도 약한 연희는 거친 바닷일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분명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심하게 멀미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멀미 때문인지 더 하얗게 질려, 연희의 얼굴은 파리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 뱃일하는 바다 여자로 태어나 저 지경인 저 것을 어찌할꼬... 병철아! 쟤를 어쩌면 좋으냐...


하얀 목장갑을 낀 손으로 운전대를 잡으며 그가 애타게 부르고 있는 이는 바다로 영원히 떠나가 버린 자신의 가장 친한 죽마고우 병철이었다.


병철은 어린 연희와 그의 아내 제주댁 둘만 남겨둔 채, 깊고 차가운 바다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 것이 뱃놈들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친구 병철은 너무 이른 나이에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연희야! 이 것 좀 입에 물고 있어!”


뱃멀미에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더 새파랗게 질려 창백한 연희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재호가 건넨 것은 ‘놀쇠’였다.


놀쇠는 배에 노를 고정시키기 위한 방망이처럼 생긴 쇠붙이를 말했다.


뱃일을 하는 어부들 중에 종종 심한 파도에 멀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거친 바닷일을 하는 어부들 사이에서 미신처럼 행해지는 처방 중 하나가 바로 이 ‘놀쇠’를 입에 물면 금새 멀미가 멈춘다는 것이었다.


아들 재호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멀미를 하고 있는 연희에게 ‘놀쇠’를 입에 물려주는 것을 바라본 재호의 아버지는 이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재호의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갑판대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동네 바보 ‘똥환’을 크게 불렀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는 그의 이름 ‘동환’이 아니라 ‘똥환’이라고 부르곤 했다.


바보 똥환은 자신을 향해 마을 사람들이 ‘똥환아!’라고 불러도 누런 코를 훌쩍거리며 ‘허허’하고 웃고 마는 동네 모지리였다.


“똥환아! 문어 타라!”


“허헤..헤... 네!”


바보같은 웃음을 실실 거리며 똥환이 서둘러 갑판 위에 걸어둔 낚싯줄을 하나 잡고 천천히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낚싯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문어가 좋아하는 돼지비계와 알루미늄 합판을 4등분해 바람개비처럼 벌려둔 조각이 걸려 있었다.


욕심이 많은 문어는 반짝이는 알루미늄 합판 위에 꽂아둔 하얀 돼지비계 덩어리를 보면 그것을 먹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문어가 낚시 바늘에 다리가 꿰뚫려 도망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알루미늄 조각 위에 올라타 돼지비계를 먹기 위해 스스로 내려가지 않고 매달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문어가 위에 올라탄 순간 낚싯줄을 끌어올리면 문어는 그대로 잡혀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뱃사람들은 마치 방석 위에 올라 탄 문어를 잡는 방식 때문에 문어를 잡을 때 ‘문어 탄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이러한 낚시 방식을 육지사람들은 흔히 ‘주낙 낚시’라고 불렀다.


한 시간 가량을 얽히고설킨 낚싯줄을 천천히 끌어 올리며 부지런히 문어를 타던 재호와 연희는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이른 새벽에 나간 문어잡이에서 그들은 총 열 다섯 마리의 문어를 낚았다.


풍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나 빈(貧)하지도 않게 문어를 낚은 셈이다.


저 멀리 푸른 바다로 출항했던 배들이 다시 항구로 돌아오면서 긴 뱃고동 소리가 선착장에 울려 퍼졌다.


배들이 하나둘씩 동항 입구에 도착하면서 이윽고 배들에서 나온 물고기들이 바닥에 널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새벽 6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경매가 시작된 좌판은 마치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가운데 같았다.


날카롭게 생긴 얼굴의 어부들과 시장바닥을 굴러먹은 굳센 아낙네들 간의 기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비싸게 팔려는 자와, 싸게 사려는 자들 간의 눈치작전이 시작되었다.


욕지도 이른 새벽 장이 서게 되면 욕지도 동항은 이런저런 작은 배들로 가득 찼다.


욕지도 주위에 있는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등의 섬사람들이 조그만 배들을 이끌고 미역, 전복, 소라와 같은 해산물부터 시작해 산나물이나 고구마 같은 농산물까지 머리에 이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것이 한껏 신이라도 난 것인지 바보 똥환이 어기적 걸으며 노란색 플라스틱 안에 가득 담긴 문어를 붉은 고무대야에 쏟아 붓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한데 달라 붙었다.


“어휴! 형님! 오늘 문어 참으로 실허네?”


“춘심(春心) 형님! 힘들게 경매를 한 대? 그냥 우리한테 넘겨요? 응?”


빨간 모자를 쓴 경매꾼들이 삽시간에 재호의 아버지를 향해 달려 들었다.


재호의 아버지가 모는 작은 배에는 검정 페인트로 멋들어지게 ‘춘심(春心)’이라고 써져있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향해 ‘재호 아버지’라는 호칭보다는 ‘춘심 형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재호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앙 다물고 앉아있었다.


이윽고 그는 어느 틈엔가 바보 똥환이 건네주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오른손으로 홀짝이며 귀찮다는 듯이 왼손을 들어 허공에 휘휘 저었다.


재호의 아버지는 손에 낀 장갑을 자신의 방수복 위에 거칠게 털어내며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이고! 갑시다! 가! 괜히 한 대 맞을라!”


“가야지! 내 우리 춘심 형님 성깔을 모르나?”


“그려! 어디 한번 붙어 보자고잉!”


과묵하고 무뚝뚝한 재호의 아버지는 평상시에도 말수가 적었다.


그런 그의 옆에 붙어서 계속 문어를 넘기라고 조르다가는 그대로 문어를 바다 위로 던져버리고도 남을 더러운 성미였다.


차라리 싼 값에 낙찰 받고자 열심히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눈치작전을 세우는 편이 나았다.


종이컵 위에 반쯤 담겨있는 믹스커피를 홀짝이는 재호의 아버지는 좌판위에 노란 플라스틱 박스 위에 앉아 찬찬히 욕지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지만 사실 오른쪽 시선 끝에 닿은 모습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 놓아 난장판이 따로 없는 구석에는 연희와 자신의 아들 재호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 부서진 생선을 담는 나무상자와 폐밧줄들로 엉망이 된 동항 입구 구석탱이에서 자신의 아들 재호는 연희에게 무언가 슬쩍 건네고 있었다.


“오늘 고생했다!”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새까맣게 탄 얼굴의 재호를 바라보며 연희는 마음 속에 몽글몽글 무언가 피어나는 듯 했다.


재호를 바라보며 연희 역시 보조개가 가득 맺힌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이거 가져가서 어무니랑 챙겨먹어! 알았지?”


늘상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는 아버지의 습관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재호는 아버지의 눈길을 피해 연희의 팔을 이끌고 구석으로 숨었다.


재호는 연희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통발 안에 든 커다란 돌문어 한 마리와 장어 한 마리를 연희의 바구니 안에 쓰윽 넣었다.


꿈틀거리는 자줏빛 문어는 통영 돌문어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 중에서도 재호가 제일 실한 놈으로 골라 넣었으니 보통 큰 놈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어는 또 언제 숨겨둔 것인지 꿈틀거리는 그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보였다.


“야! 문어 작은 거 한 마리면 돼! 이렇게 특상으로 주면 어쩌냐! 아부지 아시면 화내셔! 내가 오늘 한 게 뭐 있다고 이런 걸 주면 어떻게 해? 장어는 또 언제 숨겨두고!”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재호의 아버지를 흘끗 바라본 연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쓴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어! 어차피 아부지 하나도 모르셔!”


짐짓 너스레를 떨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을 지은 재호는 아무도 모르게 연희의 희고 작은 손을 한번 어루만졌다.


그리고선 재호는 서둘러 총총 걸음으로 경매가 시작된 좌판으로 뛰어갔다.


희고 고운 연희의 손가락과 달리 덩치가 좋은 재호의 손가락은 거칠고 투박했다. 늘 아버지를 도와 배를 타는 재호의 손가락은 마디마디마다 낚싯줄을 당기고 매느라 생긴 상처가 아물 새가 없었다.


연희는 자신과 어머니를 위해 늘 신경을 써주는 재호가 고맙고 미안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재호를 바라보는 연희의 얼굴엔 사랑의 감정이 물씬 담겨 있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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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외전1-193. 신병(神病)- 여래아(黎崍阿) (1) 24.01.17 16 1 12쪽
192 외전1-192. 신병(神病)- 허주 (3) 24.01.17 17 1 13쪽
191 외전1-191. 신병(神病)- 허주 (2) 24.01.16 16 0 12쪽
190 외전1-190. 신병(神病)- 허주 (1) 24.01.16 14 1 12쪽
189 외전1-189. 신병(神病)- 바보 똥환 (3) 24.01.15 16 1 11쪽
188 외전1-188. 신병(神病)- 바보 똥환 (2) 24.01.15 16 1 12쪽
187 외전1-187. 신병(神病)- 바보 똥환 (1) 24.01.14 14 1 11쪽
186 외전1-186.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3) 24.01.14 15 1 12쪽
185 외전1-185.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2) 24.01.13 17 1 11쪽
184 외전1-184. 신병(神病)- 이어도의 전설 (1) 24.01.13 15 1 12쪽
» 외전1-183.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3) 24.01.12 17 1 11쪽
182 외전1-182.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2) 24.01.12 19 1 12쪽
181 외전1-181. 신병(神病)- 푸른 곳간, 욕지도 (1) 24.01.11 19 1 12쪽
180 챕터9-180(완). 화마 봉인- 사랑하는 그대에게 (2) 24.01.11 19 2 12쪽
179 챕터9-179. 화마 봉인- 사랑하는 그대에게 (1) 24.01.10 20 2 11쪽
178 챕터9-178.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4) 24.01.10 17 2 12쪽
177 챕터9-177.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3) 24.01.09 17 2 11쪽
176 챕터9-176.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2) 24.01.09 14 2 12쪽
175 챕터9-175. 화마 봉인- 진인사대천명 (1) 24.01.08 17 2 12쪽
174 챕터9-174. 화마 봉인- 모두 안녕 (5) 24.01.08 17 2 11쪽
173 챕터9-173. 화마 봉인- 모두 안녕 (4) 24.01.07 17 2 11쪽
172 챕터9-172. 화마 봉인- 모두 안녕 (3) 24.01.07 16 2 11쪽
171 챕터9-171. 화마 봉인- 모두 안녕 (2) 24.01.06 16 2 11쪽
170 챕터9-170. 화마 봉인- 모두 안녕 (1) 24.01.06 16 2 11쪽
169 챕터9-169. 화마 봉인- 양양 낙산사 (2) 24.01.05 16 2 11쪽
168 챕터9-168. 화마 봉인- 양양 낙산사 (1) 24.01.05 17 2 11쪽
167 챕터9-167. 화마 봉인- 드러난 진실 (2) 24.01.04 16 2 12쪽
166 챕터9-166. 화마 봉인- 드러난 진실 (1) 24.01.04 17 2 11쪽
165 챕터9-165. 화마 봉인- 기억의 편린 (4) 24.01.03 15 2 11쪽
164 챕터9-164. 화마 봉인- 기억의 편린 (3) 24.01.03 17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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