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저질러도 어차피 사람들은 (3)
“실종되지 않습니다. 교통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습니다. 이건 뭐야?”
류 산이 수호처럼 강 혁의 거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스마트 폰을 보며 물었다.
그 발밑에 기대 앉은 수호가 피식 웃었다.
녀석은 강 혁의 집에 널어 놓았던 자기 짐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과격한 발언 싸지르는 인플루언서들한테 쓰는 밈이에요. 거대 세력한테 쥐도새도 모르게 치워지지 말라고.”
“오, 대중의 관심이 지켜준다는 개념인가?”
“법이 적용될 수 없다면, 법보다 강한 힘에 의존해야죠.”
그렇다.
녀석은 여전히, 정의 구현이나 진실 고발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마틱한 기자 회견조차도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한 쇼에 불과했다.
류 산이 스마트 폰을 살짝 내리고 수호를 바라봤다.
“나는 얘가 좀 무서운 것 같아.”
“그래서, 다음 주부터 형 집에서 살아도 되죠?”
“뭐하러? 어차피 이제 죽이러도 못 온다며?”
두 사람은 한참을 저걸로 논쟁하는 중이다.
강 혁의 집에서 약속한 일주일을 지냈으니, 다음 거처로 가겠다는 거다.
하지만 류 산은 최근 일련의 사건 이후로, 갑자기 여러 이유를 대며 거절하는 중이다.
“혁이 형한테만 계속 빌붙을 순 없잖아요.”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냐?”
물론 수호의 설득 방식 탓도 있었다.
류 산은 수호가 저렇게 말할 때마다 항상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뭐, 형이랑도 같이 살아보고 싶어서?”
“엎드려서 절 받아봤자 나만 손해지.”
류 산은 한숨을 푹 내쉰다.
다시 스마트 폰을 보며 마음의 문을 조금 닫았다.
수호도 다 챙겨넣은 여행 가방을 닫은 뒤, 다시 폰을 꺼냈다.
“숙박비도 낼게요. 기자 회견이 목숨줄만 살려준 게 아니거든요.”
녀석은 기자 회견과 동시에 업로드한, 태만 고등학교 사건에 대해 정리한 영상의 조회수를 보여줬다.
알려진 계산법에 따르면, 못해도 저거 하나로 수백만 원은 벌 것이다.
“와, 끝내주긴 하네.”
“아칸 녀석이 흥분해서 거의 쇼크사할 뻔한 거 겨우 살려놨어요.”
“근데, 그럼 네 집을 직접 마련해도 될 일이잖아?”
강 혁이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폰 보는 척 하던 류 산이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어차피 나랑 살아도 초능력자 둘이라서 아무 보호도 못 받잖아? 남의 집에 빌붙을 이유가 있어?”
“이번엔 반대로 내가 형을 보호하는 거죠.”
“엥?”
수호의 말에 류 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나는 막 죽이지 못하겠죠. 근데 여전히, 형이나 라희 누나는 얼마든지 칠 수 있어요.”
“뭐, 그야 그렇겠지만,”
“그래서 라희 누나는 연주희와 함께 살아야 돼요. 형은 내가 붙고요.”
수호의 제안에 류 산이 잠깐 눈을 위로 들고 생각했다.
참 건조하게 말하는 녀석이지만, 그 안에 생각보다 많은 고민과 고려들이 들어있다.
“근데 그러면... 음, 안 되겠구나.”
“뭐가요?”
수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는다.
저 무감정한 표정이 류 산의 속내를 알아챈 걸까?
거의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아니야, 됐어. 근데 그러면, 내가 여기 강 혁 씨랑 사는 건?”
“불편하죠.”
강 혁이 딱 잘라 답했다.
류 산은 살짝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다.
“오.”
“당연하죠. 나는 나니까 이렇게 하는거고, 보통은 혁이 형 같은 반응이 맞죠.”
“우리를 살리려고 그렇게 한다?”
류 산의 질문에 수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질끈 감고, 잠깐 고개를 숙인 채 뭔가 고민한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하아, 오늘 밤에 이동할 거야?”
-
밤하늘을 날며, 류 산과 수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류 산은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고,
“라희 누나랑 결혼까지 할 거죠?”
수호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한 번도 둘 사이를 말한 적 없었기에, 류 산은 화들짝 놀랐다.
“어어어!”
그 탓에 순간적으로 수호가 바닥으로 추락할 뻔했다.
“아이고, 미안.”
“와, 그거 물어봤다고 사람 죽이려고 하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니까요?”
“어떻게 알았어?”
류 산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당연히 뒤를 돌아볼 순 없었다.
저 녀석의 망할 눈깔에 생각보다 많은 게 보인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금 떠본 거에요. 눈치는 있었는데 확실하진 않았어서.”
“아, 씨.”
아니었다.
눈으로 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레 겁먹은 류 산 탓에 들켰다.
“어디까지 추측했는데?”
“뭐, 형이 라희 누나를 짝사랑하거나, 사실 비밀 연애중이거나, 아니면 옛날부터 가족들끼리... 아 가족은 없겠구나.”
“있었어. 둘다.”
류 산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저 녀석한테 이런 얘기를 다 하고 있을까?
그냥 며칠 자고 가기로 했으니까?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그 쪽 집안이랑 우리 집안, 어렸을 때부터 거의 의형제 같은 사이였거든. 부부동반으로 여행 가셔서 다 같이 끝장이 난 거야.”
“가족한테 끝장이라뇨.”
“우린 그렇게 표현하거든. 솔직히 원망 좀 해도 되잖아?”
류 산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모습에 비해, 머릿속이 굉장히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약간, 라희가 처음 자신에게 최면을 시도했던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원망 잠깐, 빡세게 한 다음부터 둘이서 어떻게든 아둥바둥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중이야. 그러다가 이 꼴이 됐고.”
“초능력이요?”
“초능력 말고. 아, 너 우리가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나?”
밤 공기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이 차가움도 염력으로 흩어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들어본 적이 없었네.”
“둘 다 전문직 프리랜서야. 집에서 일하고, 근무 시간이 자유로워야 했거든.”
“그건 초능력 때문이 맞겠네요.”
하지만 뒤에서 따라 날아오는 녀석의 목소리에선 조금도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자기 입에서 뱉어지는 숨결로 찬 공기를 몰아내려 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을 계속 파헤쳐야 했거든. 원망스러운 가족들 대신 더 강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조차 누가 방해하고 있었으니까.”
“방주 형은 어떻게 만났어요?”
“녀석 쪽에서 먼저 우리를 탐지해 접근한 거야.”
수호는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류 산과 한라희, 김방주.
이 세 사람의 초능력 집단은 이 세 사람이 전부다.
집단이 거대한 척 했던 건, 조수호라는 거물 초능력자가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봐 두려워서 한 거짓말이었다.
“뭘 믿고 접근했대요? 나쁜 사람들이면 어쩌려고.”
“나쁜 짓을 할 배짱도 없어 보였대나?”
두 사람은 잠시 가볍게 웃음을 나눴다.
류 산은 수호가 알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녀석은 단 한 번도 이 집단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는 것도.
“그럼 좀 문제가 있겠는데요? 마냥 착하게만 사는 사람들이면 손발이 안 맞는데.”
“뭣모르는 애들 줘패고 다니게 할 땐 언제고?”
두 사람은 웃은 김에 잠깐 농담을 더 주고 받았다.
정말로, 수호의 온기로 차가운 밤공기가 조금 물러갔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 자식 괘씸하네. 왜 내가 먼저 한라희를 좋아하는 선택지밖에 없냐?”
“당연히 라희 누나가 형보다 몇 배는 아까우니까요.”
“웃기는 자식이네 이거. 그러는 너는?”
류 산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사람 다 꿰뚫어보는 눈 같은 거 없어도, 사람의 눈치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있다.
“저 뭐요?”
“너도 연주희씨 좋아하잖아?”
“아, 그거요? 그건 뭐 숨기려고 한 적도 없는데.”
하지만 반격이 생각보다 맛있게 들어가지 않았다.
류 산은 다음 공격을 고민했다.
“근데 형이 어떻게 알았어요? 주희랑 만난 적도 별로 없으면서.”
수호가 먼저 질문을 다시 던졌다.
류 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냥 떠본 거야.”
“아, 똑같은 전법?”
“너야말로 짝사랑 아니냐? 고백 안 할 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을 몰아 붙였다.
수호 녀석이 자주 하던,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상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몰아쳐서 최대한 많은 답변을,
“걔는 저랑 되면 안 돼요. 걔는 멀쩡한 집에서 잘 자란 애고, 나는 부모도 없는 고아잖아요.”
“뭐야?”
“왜요?”
류 산은 순간 당황했다.
그리고 수호는 이전의 류 산처럼, 너무 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똑같이 부모 없는 고아가 듣기에 좀 불편하지 않겠냐?”
“형이랑 라희 누나는 둘 다 없으니까 괜찮잖아요.”
“진짜 너는 말이...”
그리고 동시에, 류 산은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좋은 아파트 잔뜩 늘어선 도시는 다 지나가고, 건물 높이가 현저히 낮고, 낡고 검붉은 동네로 접어들 때 쯤이었다.
“한 쪽이 정상적이면 좀 그렇게 생각하게 돼요. 내 능력이 뛰어난 거랑 무관하게, 결혼은 두 가정이 합치는 거라고 하잖아요?”
“하긴. 나랑은 입장이 다르겠지.”
류 산은 반쯤 동의하며, 한 빌라 현관 쪽으로 향했다.
밤이 늦어도 고장난 가로등 하나 똑바로 고쳐주지 않는다는 장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이 조용한 동네라는 장점.
마음껏 날아서 오가도 사람들이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는 장점 때문에 이 동네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강 혁 씨 집보다 훨씬 허름해. 그 정도는 각오하고 왔겠지?”
“당연하죠. 근데, 슬슬 갔으려나?”
“누가? 아.”
그리고 류 산은 또 한 번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굳이 집을 향해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신을 놀리듯 웃는 조수호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
현관문을 벌컥 열었고,
“어, 왔어?”
“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한라희와 연주희가 그에게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류 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허공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자식 진짜.”
“뭐 어때요? 서로 빨리 알아가면 좋은 거지.”
수호가 위로랍시고 그의 어깨에 손을 탁 얹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집주인보다도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의 다 치웠네?”
“그러게. 이 정도면 차라리 결혼을 하시는 게 빠르겠어.”
연주희가 한라희를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한라희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류 산을 바라봤다.
“그러게. 어느 겁쟁이가 빨리 결단만 해 주면.”
“야, 내가 겁쟁이인 게 아니라,”
류 산이 발끈하며 한라희에게 뭔가 쏘아 붙이려 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뒤,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말 할 시간에 빨리 움직이기나 해.”
한라희가 제일 늦게 들어오는 사람에게 툭 핀잔을 던졌다.
물론 짐은 이미 다 정리해서, 두 여성은 그냥 집에서 떠나기만 하면 됐다.
“움직이긴 뭘. 이미 다 한 것 같은데.”
“그거 말한 거겠어요?”
연주희가 딱하다는 듯 류 산을 바라봤다.
류 산이 조금 놀랐다.
“아니 주희 씨까지...”
“됐고, 다 챙겼으면 술이나 한 잔 할래요? 혁이 형 집에서 하나 꽁쳐 왔는데.”
어느 새 류 산의 거실에 여행 가방을 펼친 수호가 양주 한 병을 꺼내 든다.
류 산은 입을 떡 벌리고 녀석을 바라봤다.
“어느 틈에...?”
“사실 챙긴지 좀 됐는데 형이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그 김에,”
“아니. 술은 일 하나 해결한 다음에.”
연주희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수호의 행동을 막았다.
류 산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저 막무가내 제멋대로던 녀석이, 연주희의 한 마디에 바로 술을 다시 집어 넣었다.
“최소한 ‘제일 커 조직’은 친 다음에 하자. 지금은 술이나 즐길 분위기도 아니잖아?”
“아, 그거는 시간 지나면 알아서 다 되는데.”
수호는 대화의 주도권이고 뭐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궁시렁대기만 했다.
너무 다른 모습이라 조금 역겹게 느껴질 뻔했다.
두 여성이 챙긴 짐을 들고 현관 앞에 섰다.
“좀 비켜줄래? 언제까지 멍 때리고 있을래?”
한라희가 부드럽게 물었고, 류 산도 화들짝 놀라 얼른 현관에서 비켜 거실로 들어섰다.
“어어, 그래.”
“진짜 웃기는 남자들이야. 그쵸?”
연주희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라희에게 물었다.
한라희도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한 명은 용기를 반이라도 냈잖아.”
“다행이네요.”
한 명이 누굴까?
류 산은 머릿속으로 그런 한심한 질문이나 하고 있었다.
두 여성이 집을 떠나고, 남겨진 두 한심함은 서로를 바라봤다.
“진짜 찌질하네.”
“응, 너도.”
이번엔 둘이 동시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수호는 다시 자연스럽게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간 지나면 알아서 해결된다는 건 또 뭐야?”
“아, 이제 나팔만 오지게 불면 되거든요.”
“나팔?”
류 산은 자기 거실이 강 혁의 집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꼬라지가 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평소의 거실보다 이게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집이 깨끗해진 걸 보니, 한라희가 상당히 고생해준 모양이다.
“그 뭐, 있어요. 기자들 많이 쓰는 용어인데.”
“아 그, 아칸이랑 한다는 사이버 렉카 그거?”
“여론 몰이를 해서, 놈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들 거에요. 좀 치사한 방법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수호의 표정이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데?”
“기자질 할 때는 절대 못 해보던 짓이거든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