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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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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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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5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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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DUMMY

이 나라는 6·25라는, 임진왜란마저 상큼하게 뛰어넘는 국난을 거치며 세계 극빈국 대열의 틈바구니에 치욕적으로 끼어들기당한 이력이 있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전쟁 이전에 잘 살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뭐 고풍스런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멋들어진 이름과 함께 망하며 바로 옆엣 섬나라 사람들에게 종살이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거지꼴이었다는 건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는 명명백백한 사실이니까. 그런데, 그 힘든 머슴살이를 어떤 식으로든 끝을 내고 이제 좀 자유로워지나 했더니 대한해협 건너편보다 더 머~언 바다에서 온 아메리카씨와 사대부들 영혼의 고향이 서려있는 나라 뒤편에 꽁꽁 숨어있던 소비에트씨라는 두 거인이 갑자기 나타나 겨우겨우 나라꼴 갖춰나가나 싶었던 우리 한국님을 두 동강내어 쥐어짜다가 결국에는 세계역사에 이름을 올릴만한 국제전쟁까지 벌여놓는 통에 그나마 있던 동냥 쪽박마저도 작살나며 이도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당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는 상거지 꼴에서 역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이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장의 상흔에서 힘겹게 피워 올린 꽃 한 송이가, 당장 시들어 죽어버린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던 그 가녀린 풀 한 포기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거대한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나 세계무대에 다시 멋들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 정말이지 이건 지금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남녀노소 모두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진짜 이 아름다운 대부등을 일궈낸 모든 이들에게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근데, 그게···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울 수가 없는 이 자긍심이, 꽃보다 향기로워야 할 청춘을 지난세기말과 이번세기 초가 겹치는 지금 이 기간 동안에 걸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리 강하게 와 닿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현실을··· 알고들은 있는지. 어린 시절 누구나 듣고 자랐던 동화들 속의 「그리하여 모두들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끝맺음 이야기가 철저한 기만이었다는 건 어른이 되며 저절로 깨달아지는 삶의 슬픈 무르익음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 아무도 없는 것처럼···.

한국전쟁 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다고는 말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베이비 붐 세대가 태어나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무서운 고속성장의 시대가 열린다. 정말이지 이때 우리사회는 일할 곳은 넘쳐났지만 일할 사람은 부족한 시기였기에 고등학교만 나와도 취업할 곳이 천지삐까리였다. 사정이 이러한데 대학까지 나오면···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이 시대상을, 조잡하기가 비할 데 없는 나의 이론에 조합해 보자면 차고에 있던 전철이 슬슬 기착지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한 때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이때 열차 안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러다가 열차는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962년 드디어 첫 번째 정류장에 도착한다. 유명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승강장에 도착한 전철은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고 제일 먼저 일제강점기 끝 무렵과 6·25를 거친 세대들이 텅 빈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친일민족반역자가 상당수 섞여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그리고 당연히 이들이 제일 좋은 곳에 골라 앉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는 건 세 살배기 꼬맹이들마저 짐작할 정도로 자명하나 이 부분은 넘어가자. 슬프지만. 어쨌든, 이윽고 열린 한국의 고속성장시대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힘차게 달리던 열차는 나라 곳곳에서 태어난 셀 수 없이 많은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를 정차하는 역마다 무작위로 실으며 점점 가속도를 붙여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객차 안에는 제법 공간적 여유가 있었고 사람들은 비록 앉아갈 수 있는 의자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다. 서있기 힘들면 기둥손잡이에 몸을 잠시 기댈 수 있었고, 또 무료해지면 같이 올라탄 사람들과 삼삼오오 모여 무리 지으며 담소를 나눌 수도 있었으니까. 심지어 간혹 자리라도 나면 천천히 걸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느긋함도 부렸다. 그렇게 전철은 이 나라의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며 몇 십 년을 질주했다. 아무런 장애도 느끼지 못했다. 그 어떤 방해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시간 역시 거침없이 흘러 어느덧 「전쟁이나 또는 혹독한 불경기를 거친 후 사회적·경제적인 안정기 속」에서 태어난 진정한 의미의 베이비부머, 즉 포스트 베이비 붐 세대까지 사회에 대거 진출할 나이가 되었다. 그들은 대략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대거 「한국」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올라탔고, 60년대 초반 시발되었던 이 나라의 경제성장은 이때 번영의 절정을 구가하게 된다. 이 시절 정말 사회는 안정된 듯했고 경제는 끝 모를 호황의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모두가 행복한 것처럼 보였고 마치 선진국 진입 따위가 아닌, 선진국이 이미 된 듯한 착각을 느꼈으며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 라는 말까지 나돌아 다녔었다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고기는 상하기 직전이 제일 맛있다는 뻘소리가 있듯 한국경제의 가장 맛깔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나니 정말 거짓말처럼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했다. 마치 강대국 에스파니아의 아르마다를 제압하고 바다의 왕자로 급부상하며 유럽의 강국으로 호령하려던 잉글랜드가 엘리자베스 사후 제임스1세 치세를 거치며 급격히 몰락했던 것처럼. 그런데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는 당시 잉글랜드처럼 떵떵거릴 수 있었던 강대국문턱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저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만 남긴 채 속절없이 주저앉아 이 땅,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금할 길 없는 아쉬움만을 남겨 놓았을 뿐.

그러거나 말거나 전철은 쉬지 않고 달렸다. 아니 쉴 수가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거창한 국호를 달고 있는 그 열차는 결코 쉬어서도 멈춰서도 안 된다. 이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거나 역사적 흐름에 이끌려 다른 나라로 개치되기 전까지는.

그러고 30년. 어느덧 21세기. 어느 틈엔가 열차는 꽉 차버렸다. 아마 한 20년 전쯤부터였을 거다. 어찌어찌하여 지하철이 승강장마다 도착은 하지만 차창 안에 비춰지는 광경만으로도 애타게 전철을 기다리던 이들의 숨을 막히게 했던 것이. 기대조차 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예의상 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 안쪽으로는 조그만 플라스틱 통 속에 꽉 차 있는 이쑤시개들을 연상케 하는 잔인한 민낯이 드러내어졌다. 발 디딜 틈이 없다. 앉아갈 수 있는 자리? 자리는 고사하고 잠시라도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기둥손잡이, 같이 탄 사람끼리 모여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꿈에서조차 가당키 힘든 사치 중의 사치다. 이제서야 겨우 전철에 올라탈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은 예전 기성세대들이 객차 안에서 즐기고 누렸던 일들의 절반? 아니 반의반도 아니라, 아예 초장부터 열차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시대에 방치된 채 대지에 숨 붙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마저도 살그머니 열렸던 문은 승강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학수고대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운빨 날리는 청춘 몇 몇만 겨우 올려 태우고는 지체 없이 바로 떠나가 버린다. 올라탄 극소수의 사람과 남겨진 대다수의 사람. 이것이 지금 이 나라 위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구슬픈 표상이며 화려했던 지상세계를 뒤로하고 이제는 어둡기만 한 땅굴 속을 덧없이 내달리고 있는 한국이라는 地下鐵의 본 모습이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으로 지하세계의 반타블랙을 겨우겨우 가르고 있는 휑뎅그렁한 승강장에 남겨진 사람들은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세상을 비판하고 시대를 저주한다. 과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지하철에 올라타는 아주 간단한 일마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필생의 과업課業으로 삼게끔 만들었을까. 그저 내가 사는 이 나라의 경제를 원활히 하는데 일조할 자리를 찾는 것에 불과할진데···.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열차에 올라탄 소수의 젊은이들.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까도 나왔지만 첫 취업 후 평균 재직 기간 15개월. 50년을 넘게 달려온 시간에 비하면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겠지. 그들은 무론 운도 따라 주었겠지만, 어쨌든 지하철을 탄다는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 인생의 승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왜 2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힘들게 올라탄 열차를 뛰어내릴까···? 풋! 당연하지. 자리가 나는 것까지 바란다는 건 절대 미친 짓 일 테고, 푹 쪄진 채로 아귀살덩이 밑에 깔려있는 콩나물범벅마냥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드는 환경에 질려 다음 역에서 지하철이 개문하자마자 하릴없이 튕겨져 나온 경우가 대부분 일 테니까. 그들이 뛰쳐나오기 직전까지 열차 안에서 기성세대들에게 들었을 수많은 말들은 듣지 않아 들은 듯하다.

“요즘 젊은 것들은 왜 그래?”

“나 때는 말이야,”

“끈기가 없어 끈기가.”

그런데 더더욱 슬픈 건 나이 엔간히 먹었다고 생각하는 선배들이 차창 밖으로까지 몰인정하게 던지는 촌철로 인해 승강장에 애처롭게 서있던 수많은 청춘들조차 깊은 상처를 입는다는 사실이다.

“노오력이 부족해 노오오오력이.”

아니 이 냥반들아 노력이 부족하다닛!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알고 당신들만 모른다굿!

아··· 순간 흥분했다. 마음을 가다듬자 마음을.

후우···.

내 봐온 바로는 우리 젊은 세대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정말 「충분히」라는 말이 부족하리만치 전력을 다해 살고 있다. 이미 대학가에는 학점 4.5와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아예 입학하면서부터 캠퍼스의 로망 따윈 일찌감치 잔디밭에 던져버린 후 공무원시험에 매진하느라 그 잘난 면상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알지도 못할 교우들이 수두룩하다.

자기들은 운 좋게 먼저 태어나 먼저 올라탔다는 이유만으로 편하게 자리에 앉아 몇 십년동안을 달려온 전철 안에서 미동도 않고 있으면서 일찌감치 차버린 만원 열차에 애오라지 승차할 차례가 된 젊은이들에게, 발 디딜 샅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들어차있는 사람의 틈바구니에 끼어 눌러 터져있어야만 하는 청춘들에게, 어쩌다가 아주 가끔 생기는 빈자리 하나마다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비정한 세태에 내몰려진 우리들에게 끈기와 근성과 노오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조롱 가까운 말은 자의로 인해 태어난 것도 아닌 이 세상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의 길 위에 서있는 애련한 약관과 이립들의 어찌할 도리 없는 사정 따위에 대한 일말의 이해심도 내비치지 않는 가혹한 손가락질이 아닐 수 없다.

꼴랑 지하철 한번 타고 가면서 떠오른 잡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종요로운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나는 이 땅의 어른들을 비난할 의도는 단연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젊은 세대들이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삶을 영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이라고 한 손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상식선에서 단 한명도 없다. 아니 결코 있어서도 안 된다.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 나라는 전쟁의 상반을 빠르게 떨쳐 낼 수 있었고 그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 땅에서 대물림 되던 굶주림을 끊어 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이 우리 앞에 계셨기에 지금의 세대가 이렇게 빈곤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배는 곯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됐다는 것을 부인할 이는 절대로 없다는 말이다.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당신들이 얼마나 고생했고 또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고 있고 고마워하고 있으니 제발 「요즘 젊은이」라는 말로 덮어놓고 매도만 하지 말고 당신네 자녀들이 이 시대 위에서 겪고 있는 고초와 그 슬픈 속사정을 조금만이라도 이해해 달라는 거다. 우리네 실상을 좀 더 바로알고, 조금 더 보듬어주고 품어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위로가 없을 텐데···. 어른들이 자신들의 소중한 시절 다 바쳐가며 힘들게 일궈놓은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 1989년 이후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어쨌든 초기에는 선진국 위주로 회원국을 꾸렸던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등 이 나라 한국을 나타내는 국제적 수치와 수식어는 으리으리하지만 정작 그 화려한 불야성의 이면에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어두운 그림자 속을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청춘이 안타깝게 소진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주었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사색과 사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유치발랄하고 잡스러운 생각의 끈이 끝도 모르게 이어지다가 다시 지하세계로 진입하며 차창 밖의 빛을 고스란히 땅 위 세상에 반납하고 온 지하철에 의해 재차 끊겨졌다.

그럼 나 역시도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와야지.

이제 남은 역은 두 정거장. 대략 3분 후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건데 뭔가를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살짝 심기를 거슬리네.

뭐였지···? 뭐 였더라···? 분명 내리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난 이게 문제다. 매사에 생각이 많아 그 잡념의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막상 해면으로 올라오면 정작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들을 심심찮게 까먹는 단 말야. 그 일이 중요한 일이든, 중요치 않은 일이든 간에···. 그러다가 끝까지 안 떠오르면 진짜 사람 미치게 만드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게 하지 않을 정도로. 근데 여기서 또 웃긴 건 에라 모르겠다~ 하며 하던 일이나 하자 하고 관심을 접으면 그리 골똘히 집중에도 연상되지 않던 것이 별안간 퍼뜩 떠오른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 내 온 신경이 굼살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는 그 근지러움의 초입에 들어서려 하고 있음이다.

창문 밖으로는 진즉 어둠으로 둘러싸인 터라 때마침 시선을 방출할 필요 없어진 동공을 눈꺼풀로 지그시 덮은 나는 이 이상 근질거림 깊숙이 침잠되지 않도록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 나갔다.

으음···.

신천역···.

머릿속에서 맴돌아 다니던 단어들을 하나씩 되뇌며 각각에게 의미를 부여해 본다. 떠오르는 낱말마다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연상시키며.

신천 시장··· 새마을···.

순간 눈이 번쩍 뜨여졌다. 다행이다. 애타는 찝찝함으로부터 이렇게 빨리 헤어 나올 수 있다니!

오늘의 목적지가 신천역 부근인 만큼 인근 새마을전통시장에 있는 친구와 점심이나 같이 할까하는 요량으로 전화 한번 넣어보려 마음먹었었던 일이었는데, 사안의 간단함과 또 그것을 넘어서서 있던 사소함까지 깨닫자 살짝 허탈한 기분이 떠다니는 걸 막지 못하겠다. 뭐 어쨌든 다시 까먹을 일 없겠지만, 몇 분 상간으로 내릴 준비를 해야 하기에 지체 없이 전화기를 꺼내들어 주소록을 뒤적거렸다.

뚜르르르 하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오랜 벗의 반가운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넘실거려온다.

“오오 준호냐~?!”

“그래 정수! 잘 지내고 있냐~?”

“너 이시끼 어디야?! 서울이냐?”

간만에 전화한 친구에게 건넨 인사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옛 말씀처럼 아름다운 욕지거리로 정화되어 다시 돌아왔다. 사실 소중한 우리말 잘 순화하여 바르고 곱게 사용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특히나 남자사이에서는 서로 격식을 차려야하는 사회친구가 아니고서야 정말 오래된 Fire알 친구나 초등~고등학교 때의 교우들과는 만나자마자 시작된 육담이 헤어질 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체로다. 어찌하다 ‘내 오랜 벗아. 그동안 잘 지냈니? 매우 보고 싶었단다.’라는 등의 붕우사이 예를 하게 되면 대번에 ‘미친 새꺄, 뭐 잘못 먹었냐?’라는 깨달음 충만한 호응이 마주오기 십상. 지금 통화하고 있는 정수라는 친구 역시 그렇다. 세 번의 기회 중 같은 반 딱 한 번만 해보았을 뿐인 고등학교 동창인데 졸업한 뒤로는 소식도 모르고 지내가다 몇 해 전 우연히 근황을 알게 되어 나돌아 다니는 영업직을 전전하던 차에 얼굴도 볼 겸, 잠깐 앉아 쉬기도 할 겸 해서 녀석의 가게의 함 들러본 것이 빌미가 되어 지금까지 우정의 살림망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신기한 게 그렇게 친한 친구도 아니었고 그냥 무리 중에 같이 어울려 군것질 몇 번 해본사이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근 십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만난 자리에서는 피차간 참으로 반가워 마지않아 했다. 역시 같은 추억의 테두리 안에서 보배로운 성장기의 교집합을 가진다는 것이 이렇게나 사람들 사이에 무서운 끈적거림을 삽시 스며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으리라. 그 오랜 기간 동안 연락 한번 주고받은 적 없었고 어디서 뭐하고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지내던 놈들이 보자마자 대번에 서슴없이 서로 이새끼 저새끼 거리며 막말로 받아치는 투가 전혀 겸연쩍지 않은 것이 이래서 옛 친구 옛 친구 거리며 다들 그 푸근함에 빠져 살고들 있나보다.

좌우간 고등교과 과정을 마치고 대략 10여년의 광음이 지나는 동안 정수는 일찌감치 생선다루는 기술을 배워 장터내 몫 좋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어엿한 1인 기업의 사장님이 되어 찾아오는 친구들을 반가이 맞이해주고 있었다.

“그래 올라왔다. 한 한달 됐어.”

“그런데 왜 지금 연락해 이놈아!”

“아 씨~ 이제라도 했으면 됐지!!”

“좋았냐? 부산, 어땠어?”

“아 뭐 출장이 그렇지 뭐. 시차적응 안 돼 죽겠다.”

“미친놈.”

“아 시끄럽고~ 너 지금 가게냐? 나 오늘은 신천역 부근에 있을 건데.”

“어? 아···! 오늘은 안 되는데···. 나 지금 생물 띠러 밖에 나와 있어.”

“응?? 야 그럼 가게는? 닫은 거야?”

“아냐 아냐. 동생 나와 있다.”

“그래?”

“미리 연락을 주지 그랬냐. 월요일은 좀 바쁜데.”

“알아 인마. 나도 혹시나 해서 전화해 본거야. 그리고 새꺄 너 보러 온 거 아냐. 그저 근처에 있길래 일 끝나고 시간되면 잘생긴 면상이나 올만에 함 봐주러 갈까 한 거다.”

“큭큭. 야 준호야. 그럼 내일와라 내일. 내일은 나 가게에 있으니까 점심 같이 먹자.”

“그려, 그러자 그럼. 오늘 하루 가지고는 이 지역 다 못 도니까. 어차피 내일도 올라 그랬어.”

“그래그래. 내일 조금 일찍 와라. 여기 식당들 밥시간 때는 자리 없다.”

“알겠따. 그럼 조심해서 다니고, 내일 보세!”

“어 그려~ 나 바빠서 이만 끊는다~.”

“그려 수고!”

다급함 한 가득인 것 같지만 어찌했든 할 말은 다 하고 끊는 정수다. 기분이 좋다. 이 친구는 언제나 힘이 넘쳐서리. 원래 시장이라는 데가 활력 꿈틀거리는 곳이기도 하나 정수는 그 안에서도 우극 생기 가득하다. 나 역시 친구들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자양강장제 소릴 듣는 편이지마는 가끔 엄습하는 삶의 무게가 버거워 이따금 원기가 바닥을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신천 새마을시장에 위치한 이 「새마을수산」의 주인을 찾아간다. 이 녀석이 장사하는 모습을 아주 잠깐이라도 보고 있을라치면 없던 흥이 갑자기 어디선가 솟구쳐 어깨가 같이 들썩들썩해지거든. 그렇게 충만한 삶의 기운으로 주위를 전염시키고 있는 친구의 체취에 엄습당한 못난이는 ‘그래 씨발 까짓 거!!’라고 분연 속으로 외침과 동시에 사기 탱천하여 가게를 뛰쳐나오곤 한다.

오늘은 비록 놈을 못 만나지만 어찌됐든 잠깐 동안 들었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기분으로 하루를 뚫고 나가보자!

이런 내 맘에 호응이라도 하듯 오만가지 상념에 젖어들게 했던 지하철도 제때에 맞추어 문을 열어주는구나! 자 지상으로 뛰쳐나가자! 으아아아아아아~!!!!




대부등(大不等) : 매우 굵은 아름드리 나무. 또는 그런 재목

아르마다 : 에스파니아의 무적함대

개치(改置) : 다른 것으로 바꾸다

애오라지 : '오로지' 또는 '겨우'의 강조말

종요롭다 : 없어서는 안 될 매우 긴요한

상반(傷瘢) : 흉터, 상흔

육담 : 품격이 낮은 말

살림망 : 잡은 물고기를 넣어두는 그물 망

광음(光陰) : 세월을 이르는 말

생물 : 이 작품 에서는 '신선한 물건'을 이르고 있음

우극 : '더', '더욱'을 강조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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