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일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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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ithrone
작품등록일 :
2024.05.0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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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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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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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DUMMY

계산상으로는 급하게 서둘러도 되지 않아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대략 10분 정도 움직이니 집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이 시야에 서서히 들어왔고, 때마침 내가 타야할 버스도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 그런데 어쩌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신호는 빨간불이고. ‘아이고 저거 한 번 놓치면 진짜 안 오는데’하는 생각으로 발을 동동거리는 와중, 차고지 지척인 정류장엔 가뜩이나 사람도 없어 버스는 정차하기 무섭게 발차를 하려한다. 에혀~ 하며 혀를 차는 순간 하느님 보우하사 신호등이 파란불로 빠르게 바뀌었다. 이도 저도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뛰는 거다. 그러자 이런 안쓰러움을 눈치 챘다는 것 마냥 차가 잠시 멈칫 해주네? 이야~ 센스 만점 기사님 덕분에 오늘 운수는 좀 길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애태움은 나 혼자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는지 정류장 이편에 함께 서있던 사람들 중 몇 몇 역시 내 앞으로 뒤로 뛰어올라와 교통카드를 찍어대며 연신 헐떡거린다. 은광 일렁이는 썬글래시스로 감히 마주 눈 뜨는 짓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강렬히 번쩍이며 하루의 지배를 시작해 나가려하는 해님의 무서운 기세를 멋지게 반사시키고 있는 기사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엿 돈다. 시내 중심지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이 종점마을만의 온정을 출근길마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그리고 이 버스에 헐레벌떡 올라탄 같은 동네 주민들을 제외하고 과연 얼마나 될까.

거칠게 뛰어다니는 가슴을 찬찬히 고르며 버스 안을 둘러보니 차고지 바로 다음다음 역이어서 그런지 거의 텅텅 비어있다시피 하다. 아~ 이 여유! 게다가 이 녀석은 정말 신묘하게도 우리 회사 바로 앞까지 한 번에 가주는 꿀의 노선!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 매일 아침마다 사람 꽉 찬 마을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가까운 전철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탄 뒤 인파 넘치는 환승역을 한두 번 거친 후에야 겨우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회사에 도착할 수 있는 이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가! 도회지에서 약간 벗어나있어 일견 불편해 보일 순 있겠으나 이 한산한 종점마을에는 나름의 여유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신비로운 마력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흥미진진한 곳이라는 점을 못내 자랑하고 싶다.


차내에는 방금 전 같이 올라탄 사람들을 포함한 총 다섯 명의 이웃주민이 누가 봐도 제일 편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각각의 영유권을 틀어대고 있었고, 나 또한 내 최애석에 느긋하게 다가가 몸을 의지하기까지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 곳은 버스 맨 뒤에 위치한 긴 오인용 의자 맨 오른쪽 창가자리. 이 자리가 나에겐 으뜸 중 으뜸이다. 이유인즉 비록 출근시간이라곤 하지만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올라탄 탓에 접근이 매우 용이하다는 점과 회사 역시 절묘하게 회차 지점 부근에 입지하고 있다는 것, 이와 맥을 같이하여 퇴근 후 집에 올 때도 번잡한 사람들 틈바구니 안에서 부대끼고 앉은 채 눈알 굴리고 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들어가 자리 잡고 서서히 사람들이 차오르는 것을 감상하면서 잠시 한숨 붙이고 나면 이번엔 반대로 그 넘실대던 인파가 흡사 터진 김밥에서 삐져나오는 밥알들맨치 버스 옆구리에 있는 문으로 하나 둘, 때로는 무데기로 뛰쳐나가 각자의 보금자리를 향채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가는데, 이 광경을 보며 멍 때리고 있다가 급기야 화려했던 도시의 불빛들까지도 어두운 여름밤 점점이 떠다니는 반딧불이 같이 희미해질 즈음 슬슬 내릴 채비를 하면 만사형통! 이쯤 되면 기분 좋게 그날의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도 어렵잖아진다.

기필 오른쪽 창가자리를 선호하는 것도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과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는 재미 역시 놓치기 싫어서인데 그 사이 우연히 이쁘고 몸매 좋은 아가씨를 발견한 순간 넋 놓고 쳐다볼 수 있다는 건 또 하나의 아름다운 덤. 하지만 이 모든 사유와 이유를 통틀어 가장 큰 하나는 태조 이성계께서 조선을 건국한 이래 500년 넘게 이 땅을 통치해오며 나름 괜찮은 역할을 해왔던 유교사상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와 그 악습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거지쓰레기만도 못한 절대적 상명하복의 똥군기문화에 의해 극악하게 오염되고 변질된 후, 가장 큰 오명을 죄다 뒤집어쓰고 있는 「장유유서」의 커다랗고 촘촘한 망태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게 해주는 면죄부를 스스로에 쉬이 발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받게 될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한마디를 좀 빙빙 돌려 표현해 보았다. 암튼, 어렸을 땐 연로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선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고 또 그렇게 웃어른들에게 교육받았기에 폭풍성장해가고 있는 드센 몸뚱이를 가녀린 다리로 지탱해가며 열심히 실천에 옮겼었건만, 요즘 들어서는 그 확고했던 가치관이 매우 심하게 붕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점점 사회 물을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가며 수많은 사람들과의 다양한 접점을 경험하게 되어 그런 건지, 결코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수 연로한 이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매우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수차례라는 표현으로는 도무지 부족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우에서 목격해댄 탓에···. 과연 그들에게 늙었다는 이유로 자리를 무조건 양보하는 것이 도리이고 인륜인가? 라는 물음에 예전처럼 선뜻 대답을 내어 놓기가 힘들어지게 된 근간이다. 만약 그 노인이 6~70년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혈을 파내먹으며 암약하던 소매치기의 일원이었다면? 자신의 더러운 잇속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눈물을 빨아대던 사기꾼이었다면? 술에 취해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했으나 심신미약을 이유로 큰 처벌을 요리조리 피해온 치졸한 범법자라면? 거기에 더해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여자아이를 유린해 나중에 그 소녀가 당연히 누려 마땅해야할 여성으로서의 즐거움과 행복과 권리를 평생 행사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 놓은 천인공노할 전과자라면? 그저 당연히 나이 먹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대우해주고 배려해 줄 필요가 과연 있을까? 난, 나는 결단코 아니라고 본다. 이미 서른 넘게 살아오며 내 스스로가 인류애가 부족하고 심각한 패악적 기질이 성격 밑뿌리에 잔디처럼 깔려있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지만, 이건 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으리라.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빠진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늙으며 노인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버렸다는 것을.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던 경춘선 비둘기호마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깔린 건 더욱더 빨리진 경춘 복선철도. 그러나 그 편리함의 이면에는 심각한 노령화-고령화로 인한 사회문제 때문에 허리와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척해선 안 된다. 춘천 가는 길목에서 서울로의 출퇴근이 가능하게 된 아는 여자사람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각각의 종점인 춘천역과 청량리역에서 이미 할아버지·할머니들이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앉아 가뜩이나 힘든 몸으로 출퇴근하고 있는 젊은 직장인들의 짧지만 소중한 휴식마저 원천봉쇄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다 행여나 자리라도 나게 되면 주변에 노인들이 있나 우선 한번 살펴야 되고,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거북이나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늙은 누군가를 발견하게 된다고. 어쩌다가 앉기라도 하면, 예의 그 느린 발걸음 결단코 멈추지 않고, 기어코 마침내 젊은이가 앉은 자리 앞으로 비집고 다가와 눈에서 레이저광선을 쏘기 예삿일. 그래도 무시하면 헛기침 '에헴.' 그러고도 가만있으면 '요즘 젊은 것들은~' 하며 일장연설을 발포할 자세를 취한단다. 할 수 없이 일어나긴 하는데, 그러면 고맙다는 말 대신 의기양양한 미소를 흘리며 앉는 그 꼬락서니가 왜 그리도 보기 싫다던지···.

아아··· 생각이 너무 길었다. 이 꼴 난 자리에 한번 앉으면서 뭔 그리 잡설이 많냐. 이젠 숨도 제법 가라앉았고 편안한 자세도 잡았으니 잠을 청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그 전, 시간을 봐야하는 습관이 무의식중에 발동하여 정장 상의 오른쪽 주머니에 있던 전화기를 꺼내들게 만든다. 정확히 7시 21분. 사무실 문을 통과해야 하는 마지노선은 직장 생활하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공유하고 있는 아침 9시. 이대로 간다면 차가 좀 막힌다하여도 회사 앞 정류장까지는 8시 30~40분 도착예정이다. 거기서부턴 자빠져서 기어가도 10분이니 여유가 있다. 아~ 이럴 때 기분 너무 좋다. 시간에 쫓기지도, 맘이 급하지도 않고 흐흐. 현대를 살아가는 빡빡한 일상 중 느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버스는 꾸준히 도심지를 향해 달려갔고, 몇 번의 정류장을 거치자 벌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상념에 잠겨있는 도중 차안에 있던 의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루 종일 격한 업무에 시달려 땟국물 줄줄 흐를 저녁때의 그것에 비해 비교적 깨끗하고 상큼한 엉덩이들을 주인으로 맞이했다. 이 이후부터 올라오는 승객들의 표정에는 다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가끔 자리가 있기도 하는 지점이라 사람들은 살짝 기대감을 갖고 타는가 본데 그만큼 더 눈치싸움이 치열하고, 그에 비례하여 실망감도 더욱 크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오히려 한참 나중에 합류하는 승객들은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앗쌀하게 기대 같은 건 접어버린지 오래인 듯, 아예 모든 것을 체념한 무념무상의 얼굴을 하고 올라온다. 아주 먼 옛날 육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신 싯다르타께서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을 깨달으셨을 때의 표정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너무나도 평온한··· 삼라만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구나··· 하는 듯한. 킥킥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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