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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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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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1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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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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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50화 - 칼

DUMMY

짙은 어둠 속에 한없이도 깊이 빠져들다 눈을 떴다. 그 와중에도 살고 싶었나, 눈을 뜨자마자 자조적인 웃음을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흐릿해진 정신이 돌아오자 다시금 실감이 났다. 결국, 죽지 못했구나. 술 때문일까, 어제의 일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무어라 하였는지, 거기에 얼마나 있었는지, 그리고 어찌 제 방으로 돌아와 잠들었는지. 다만 평생 울 울음을 전부 쏟아내었던 것만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사람의 윤곽이 드러나듯, 히로유키의 서글픈 눈망울이 생각났다.


짜악-


스스로 제 뺨을 쳤다. 미쳤다는 말로도 모자라니, 이제는 어찌 표현해야 할까. 어제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면서, 내심 그 자가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랐다. 깨질 듯이 아파 오는 머리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몇 점이나 되었을까.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열하다 부은 눈과 초췌한 낯빛과 달리 결연한 눈빛이었다. 주방에 들러 주위를 살피더니만, 작은 칼 하나를 집어들어 소매 안쪽에 집어넣었다. 한층 더 싸늘해진 얼굴로, 정화가 여느 때처럼 목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여느 때처럼 탁상 앞에 앉아 있던 히로유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에 띄게 놀란 눈치였다. 여전히 정화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인사도 없이 가져온 목반을 탁상 위에 올려 놓았다. 히로유키는 앉은 채로, 정화는 서 있는 채로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자그마한 바스락거림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몸은 좀 괜찮으냐.”


적막 속에 들려온 첫 번째 소리, 그것은 히로유키의 것이었다. 쉽게 놀라던 평소와 달리, 정화가 그제서야 스르륵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차가운 대답 뒤로 길고도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 적막을 더욱 불편해하라는 듯, 정화의 표정에서는 그 어떠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히로유키의 낯빛은 시시각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그는 차마 아무런 것도 더 하지 못하였다.


“······ 당분간 본가에 다녀오는 것이 어떠하냐.”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히로유키였다. 의외의 말에 정화가 한 번도 마주치지 않던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 본가라면,”


“그간 쉬는 날도 없이 일했잖느냐.”


“······ 가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돌아온 것은 차게 식은 한 마디 뿐이었다. 차마 더 말을 꺼내고 싶은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로.


“장사는 치렀느냐.”


“이미 그 쪽에서 묘를 만들었다 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답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한층 사나워진 어조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만 같은 무언가를 애써 뒤로하며 스스로를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다스렸다.


“······ 달포 간은 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아도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본가에 가도 되고, 네 처소에서 고단한 몸을 뉘이고만 있어도 되고, 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다 저녁에 와서 쉬어도 된다. 절대 찾지 않을테니 달포 간은 자유롭게 지내거라. 그저 기간이 끝나기 전에만 돌아오너라.”


“······.”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제 처지가 너무도 딱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그 심경이 괴로워서, 그리고 죽은 오빠와 죽은 듯이 살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해서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과연 이 자를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눈을 딱 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까. 소맷자락 깊은 곳에 넣어둔 과도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설마 네게 본가에 다녀올 시간도 주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느냐?”


“······ 허면, 왜 모르셨습니까······.”


“무엇을?”


“설마 오라버니가 죽으리라는 걸 예상치 못하셨나요?”


끝없는 침묵 뒤에 이어진 말은, 설마 하였으나 역시나 아팠다. 어제보다 더 처절한 것이 묻어나오며, 말끝이 바람 앞에 나부끼는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 정책이 조선 농민들을 죽이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행하셨잖습니까. 다른 이도 아니고 그걸 시행한 자에게 장사를 치를 수 있는 말미를 달라고 하는 것이 정녕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시나요?”


가슴 깊은 곳으로 날카로운 것이 파고들었다. 앞선 말보다 더욱 가슴이 아픈 연유는 곧 틀린 것 하나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두려워 말을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지 않은 겁니다. 무엇보다 오라버니가 원했으니까요. 마지막 청이라도 들어주고자 하였고, 또한 오라버니를 보기에는 스스로가 도무지 부끄러워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을 곁에서 모시는 이가 저니까요. 결국 오라버니를 죽인 건 접니다.”


“······ 자책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냐······.”


“이지러진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편히 살고자 했던 것 자체가 죄입니다.”


목소리를 삼킨 울음은 처절한 비명소리처럼 들려왔다. 차마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들끓어, 숨을 편히 쉬는 것조차 고된 일이었다.


“내가 내세운 정책이 아니다, 나는 반대하였다, 이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설혹 그러셨다 한들 제게는 중요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제게는 태생부터 일본인이든, 조선에서 귀화한 일본인이든, 조선인이지만 일본의 곁에 빌붙는 이들이든 다 같은 사람입니다.”


부러질 듯 앙다문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소리에 담긴 처절함,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곡소리에 섞여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 만큼은 가슴으로 와닿았다. 가슴 아프게도, 이 와중에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저리도 서글프게 울부짖는 이를 껴안고, 내가 지켜주겠다 말하며 온갖 것에 대한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든, 아니든 상관 없었다. 그저 이 자가 아프지 않는다면.


“제가 죽이고 싶으십니까? 더 이상은 그 무엇도 덮어주지 못할 정도로 증오하고, 이 자리에서 혀를 뽑지 않으면 미칠 것 같습니까?”


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칼이 탁상 위에 던질 듯 내던져졌다. 짐작을 하였던 건지,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던 건지, 히로유키는 그저 멍하니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다면 죽이십시오. 저도 더 이상의 매국은 못 하겠습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칼날과 정화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가 칼을 잡게 된다면 그 끝은 어디로 향할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 못 하겠다면 내가,”


“안돼!”


차마 이도저도 하지 못하던 히로유키가 얼어붙은 순간, 정화가 칼을 집어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핏방울이 맺히기 직전, 몸이 침대 위로 던져졌다. 가녀린 손목을 억센 손이 움켜쥐며, 몸을 아래로 짓눌러 제압했다. 침대 위에 자빠진 채로도 끝까지 목을 향해 칼을 꽂으려는 정화의 양손을, 히로유키가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간절할 정도로 꽉 부여잡은 칼이 바들바들 떨렸다. 죽어서 모든 것을 끝내고자 하는 이를, 그는 마지막까지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목에 닿을락 말락 하는 칼끝이 번쩍였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라. 제발······!”


“놔, 놔! 당신이 내 심정을 알아? 내 가족을 다 죽인 친일파 새끼가 뭘 안다고! 당신은 평생 밝은 것만 보고 자랐으니 세상이 환하기만 하겠지······. 당신 손으로 죽인 그 사람들, 당신 눈에는 사람으로도 보이지 않겠지, 그러니 봐. 지금도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잖아! 네놈의 그 더러운 손에 스러진 내 사람이 몇 명인데 주제넘게 그런 표정을 지어?! 내 사람들이 당한 고통에는 비하지 못 할 만큼 고통스럽게 죽여버릴 거야. 역겨우니 같잖은 위선 떨지 마, 지금도 날 죽이고 싶잖아!”


“아니, 결코. 절대로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럼 어찌하게, 산 채로 가죽이라도 벗기고 싶나? 아니면 어떻게든 욕보여서 잔인하게 고문하고 그 비명을 들으면서 잠들고 싶어? 혀를 깨물어 자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음은커녕 얼굴조차 찌푸리지 않을거니까 기대 따윈 집어치워.”


눈물이 고인 채로 애원하는 표정 위로 정화가 침을 뱉었다. 누워서 뱉은 침이니, 또한 제 얼굴에 뱉는 침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닦던 히로유키가 다음 순간, 전에 없이 화가 난 얼굴로 칼을 빼앗아 방구석으로 집어던졌다. 무언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났으나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깟 것이 중할 리가 없었으니.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느냐? 1년 전, 누구보다 살고 싶다고 애원하던 너는 어디로 갔느냐? 정녕 너에게는 목숨이 그리도 쉬운 것이냐?”


싸늘하긴 했어도 분노와는 거리가 멀었던 표정. 언성을 높이고 거칠게 굴더라도 역정이 아닌 절규에 가까웠던 이는, 온 힘을 다해 분노하고 있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독사가 아닌 범과도 같았다.


“살아라. 네가 한 것이 정녕 매국이라면, 도리어 죽고 싶다는 그 마음으로 살아남아야 할 것이다. 살면서 겪은 모든 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반드시 살아남아서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허나 그럼에도 죽고 싶다면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그게 진정 네가 원하는 일이냐?”


히로유키가 정화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무서울 듯 내려앉은 침묵 속에 들려오는 것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그리고 정화의 눈에서 흐르는 구슬같은 눈물방울이 내는 소리 뿐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요, 곧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회심의 일격과도 같은 한 마디였다. 힘없이 내뱉은 말에 히로유키가 한 손으로 움켜쥐었던 정화의 양팔을 떨구었다. 미동조차 않은 채,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만 보았다. 분노와 울분, 설움과 한이 뒤섞여 있었으나 그 끝은 결국 애수였다.

그러기를 한참, 무슨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히로유키가 결박당하듯이 억눌려 있던 정화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바꾸지. 닷새 간은 죽지 마라. 죽고 싶다면 그 사이에 후지와라 가문을 나가거라. 그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


“······ 칼날을 잡든 칼자루를 잡든, 그 칼은 나를 향해 휘둘러질 거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말을 뱉은 이는 물론이거니와 들은 이조차 잠시 멈칫하였으나, 그는 곧 옷을 마저 갖춰 입고 방을 나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 하하하······.”


비참한 심경에 눈물이 흐르는 것은 친정(親情)을 나눈 사람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정(戀情)을 나눈 이를 잃었기 때문일까. 연정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연정이 담긴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았기에. 허나 그럼에도 가슴이 아픈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제서야 제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칼은 곧 그였다. 자루조차도 날카롭게 만들어져서 어디를 만져도 베일 수밖에 없는 검. 평생을 사랑해도 제게 상처만 내는, 애절하게 움켜쥘수록 손가락을 잘라내기만 하는 그런 존재. 양날의 검보다 더 위태로운 그를, 이러한 상황에조차도 놓을 수 없어 손가락이 잘려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 그 한심한 이가 바로 자신이었다. 손가락이 잘린 후에야 깨달았다. 그 칼을 여전히 탐하여 온 몸으로 품고 싶지만,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칼을 스스로 부수어야 한다는 것.

손톱이 이불을 파고 들었다. 해가 떨어지면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올 것이다. 이번에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리라.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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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9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 50화 - 칼 24.08.20 10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2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3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2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4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5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5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7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7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2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8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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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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