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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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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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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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DUMMY

1908년 9월 17일


“결국 상황이 이리 되는군. 이대로라면 정말 망국은 시간문제일세.”


탄식과 함께 슬픈 응어리를 내뱉는 이는 황경섭이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뒤로하고 한데 모인 이들의 사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더욱 깊게 가라앉는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해졌다.


“조선 영토가 사실상 왜놈들의 차지가 된 이상, 신한촌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무력만으로는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더 해야 합니다.”


호소하듯 외치는 김이직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울분에 찬 주먹을 꽉 쥔 손등의 뼈와 함께, 다부진 턱 끝이 도드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동지들께 묻고 싶었네. 새로이 조직을 꾸려 대비하는 것이 어떠한가?”


재형의 말에 다섯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조직 말씀이십니까? 허나 동의회 (1908년 4월에 러시아 얀치헤에서 결성된 한인 구국운동 단체.)가 결성된 지 반년이라는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겠습니까?”


“작금의 상태로 ‘물빛 안개’를 위한 일들을 지속하기에는 확연히 무리가 있네. 처단해야 하는 이들은 너무도 많으나 우리의 사람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 아닌가. 하여 엄선된 자들끼리 조직을 꾸려 본격적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하네. 지금 계획하고 있는 모든 일들에 몸담은 이들 모두와 함께 하고 싶네. 우선 보재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호.)와는 이야기를 마쳤으나, 자네들의 의견을 묻고자 하였네.”


“선생님들께서 조직을 이끄신다면야 두말할 것 없이 따르겠습니다. 행여 염두에 두신 분이 더 있습니까?”


“작금은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네. 당장 보재 또한 미리견 (미국)의 일로 바빠서 말이지. 허나 갈수록 이 곳 러시아로 걸음하는 조선인들이 늘고 있네. 개중에는 ‘물빛 안개’에 뜻을 품고 있는 이들도 다수지. 훗날 이 일을 함께 도모할 이들을 수월히 모으기 위해서라면, 지금부터라도 체계를 잡아 놓아야 할 성 싶네. 지금으로서 어렵다면 우리의 뼈를 깎는 수밖에야 없겠지만서도.”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가 총칼을 겨누고 있었고, 상대를 일격에 쓰러뜨리지 못하면 죽는 상황이었다. 뼈를 깎는다는 것은 단순한 노력이 아니었다. 그대로 온몸을 갈고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이었고, 그 목숨의 개수가 몇 개일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설령 모든 목숨이 지더라도,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는 것에 반대할 연유는 없습니다. 허나 아시다시피 근자에는 이 곳도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말만 조선 영토 밖이지, 러시아 군은 우리 편이 아닐뿐더러, 날이 갈수록 왜놈들의 영향력도 거세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주필의 무거운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다소 날카로운 말에도 누구 하나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염두에 둔 이가 있으십니까?”


“지난 해 조선에서 산포대를 조직한 여천 선생을 기억하는가?”


여천 홍범도, 그는 산포수 (산속에서 사냥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여기서는 특히 호랑이 사냥에 특화된 포수들을 일컫는다.) 출신의 의병장이었다. 젊은 나이도 아니기로서니 수십 보 밖에서도 동전은 물론 손톱만한 유리병의 입구까지 정확하게 쏘아 맞춘다는 전설과도 같은 일화를 몰고 다니는 이에 대한 소문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이 곳 신한촌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백두산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니, 신한촌까지 근거지를 옮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달포 안에 그분께도 말씀을 드리고자 하네. 아마 별 일이 없다면 찬성하시지 않을까 싶네. 그 분이라면 자네들도 믿고 의지할 수 있겠지.”


“저 또한 함께 하겠습니다.”


어느새 스무 살이 되어 거사에 몸을 담게 된 자현이 나직하게 말을 보태었다. 어릴 때처럼, 그는 늘 차갑지만 단호하게 불타오르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언제부터 일을 시작하고자 하십니까?”


“여천 선생께서 내년 즈음에 돌아오실 성 싶으니 그 때 행할 생각이네.”


“그때라면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나겠군요.”


“혹여 염두에 둔 다른 자가 더 있는가? 있는 자가 있다면 말해주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허나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많은 듯 모두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고심에 잠겼다.


“관영이는 어떻습니까?”


이제껏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주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였다. 의외라는 듯, 재형 또한 자리에 앉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이화 학당을 통해 장학금을 주었던 그 ‘윤관영’이라는 아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금년 열일곱이니, 아마 당장은 아니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조직에 몸담을 수 있을 겁니다.”


“허나 그 아이에게 장학금을 준 것은 그저 선의에 의해서일세. 그걸 미끼로 삼아 우리의 편으로 끌어들일수야 없지, 아니 그런가?”


“그 아이가 먼저 연락을 청하였습니다. 부디 ‘물빛 안개’에 동참하도록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에 모두의 눈빛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서로를 불안하게 쳐다보던 여섯 명의 고개가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 자가 우리의 정체를 어찌 안단 말입니까? 설마 중간에 정보가 샌 것은,”


“처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합니다. 학당에 다니며 자연스레 ‘물빛 안개’에 대한 뜻을 품었는데, 그걸 실현할 때가 온 것 같다고 하더이다.”


자현의 말을 잠시 멈춘 주필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과묵하였으나, 주필은 그만큼 가까운 이들을 잘 챙겼다. 허나 동시에 새로운 이를 좀처럼 반기지 않는 그조차,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염두에 두었던 인물인 듯 하였다.


“듣자 하니, 학당에서 함께 뜻을 모은 이들과 몰래 총포술을 연습하여 총을 웬만큼 쏠 줄 아는 듯 하더이다. 학당에 다녀 왜말도 곧잘 할 테니, 전투가 걸린다면 밀정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치의 틀린 말도 없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덜 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변절자가 될 수도 있는 이를 가까이 해서는 아니 되기에.


“어찌 하시겠습니까?”


“······ 다들 어찌 생각하는가?”


“그 정도라면 지금부터라도 능히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경섭“허나 아직은 너무 이르오. 당장 자네가 운을 반대하는 연유 또한 아직 약관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린나이 때문이오. 관영이라는 그 아이는 금년 열일곱이라 하지 않았소? 그래봤자 운보다 한 살 더 많을 뿐이외다.”


“그걸 어찌 모르겠소, 지금 당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그 아이 또한 성인이 된 이후에야 정식으로 ‘물빛 안개’에 참여할 수 있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곳 신한촌과 연줄이 없더라도 고려해봄직한 인재라는 뜻이오. ‘물빛 안개’를 향한 그 아이의 의지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지 않소? 잃고 싶지 않다는 연유만으로 떼어놓기에는 그 기개가 아까울 따름이외다. 게다가 총포술을 연습하고 있다 하면, 몸도 어느 정도 쓸 줄 안다는 반증이 아니오?”


틀린 것 하나 없는 주필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이범윤을 제외하고는.


“발로쟈 (Володя. 이범윤의 러시아 이름인 Владимир (블라디미르) 애칭.), 자네는 어떠한가?”


“설령 촌민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마을인 신한촌의 자치기구.), 아니 나아가 앞으로 생길 그 어떠한 조직의 일원이 된다 한들, 아직은 시간이 좀 남은 일이오.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직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았으니, 그 사이 의견이 어찌 바뀔지는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 헌데 만일 모종의 이유로 ‘물빛 안개’를 향한 그 자의 뜻이 틀어지고, 우리를 발고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자현이 문득 내뱉은 말은 차분하기 그지없었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체를 알고 있는 자가 신한촌이 아닌 외부에, 그것도 조선 본토에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우선은 기다려 보십시다. 우리가 장학금을 준 이가 그릇된 선택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고 싶지만, 정 불안하다면 다른 비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겠지요.”


범윤의 말을 끝으로 탁상 위에 놓인 촛불이 꺼졌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이 꽤나 바삐 움직였다. 비교적 늦게 몸을 일으킨 이직은 맨 뒤에서 나섰다. 제 뒤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였으나, 누군가가 살며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 아저씨.”


자현은 어디에서든 늘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다. 특히 조직에 몸을 담은 이후로부터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빼놓지 않았으나, 유일하게 이직에게만큼은 사석에서, 예전처럼 아저씨라 불렀다.

다소 은밀하고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자현의 눈에 담긴 속뜻을 눈치챈 이직이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무슨 일이냐?”


“혹, 바쁘십니까?”


“아니다. 어찌 그러느냐?”


잠시 뜸을 들이며, 자현이 앞서 방을 나서던 이들을 향해 시선을 힐끗 틀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였다.


“조금 이따 운에게 한 번만 가 주십시오.”


“또 혼났느냐?”


이직의 한숨 위로 자현의 한숨이 얹혔다.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떠한 심경인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늘 자신도 작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조르고 애원하기를 멈추지 않는 운이었다. 나이 스물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조차도 듣지 않았다. 어르고 달래고 엄히 혼내도 소용이 없었다. 동무가 된 입장에서 혼을 내는 것조차 우스울 따름이요, 자식과도 같은 아이를 꾸짖고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모두에게는 골칫거리일 따름이었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이직에게는 더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말이었다.


“주필에게 혼난 게냐?”


“그런 듯 합니다.”


“가서 달래주지 그랬느냐.”


“달래는 것도 불쌍해야 그리 하지요. 안쓰럽다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 나이에 혼인을 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이거늘, 여즉 철이 덜 든 모양입니다.”

곁에 운이 있었다면 서러워 마지않아 할 정도로 단호하고도 냉정한 자현의 말에 이직이 그만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다른 어떤 이의 말보다도 네 말을 잘 들을 듯 하구나.”


“가까운 것과 말을 잘 듣는 것은 다르더이다. 선생님들 말씀도 안 듣고 저리 어린아이마냥 떼를 쓰는 마당에 제 말을 들을 리가요. 저희는 동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하긴, 운이 어릴 적부터 너를 좀 따랐느냐. 나라고 하여 다를 바가 없다. 대체 어찌 고집이 저리도 센 것인지, 원.”


이직에 이어 자현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피식, 하는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아저씨 말이라면 듣지 않겠습니까?”


작가의말

극중에 나온 실존 인물들의 러시아식 이름은 최재형 선생의 별명인 ‘뻬치까’를 제외하고는 전부 제가 지은 이름입니다! 실제 역사와는 관련 없으니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정 방법: 한국 이름이랑 가장 비슷한 (?) 이름

(초성이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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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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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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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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