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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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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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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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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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48화 - 무너진 탑

DUMMY

떨리는 목소리에는 분명 물기가 배어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로서니,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로 그를 바라보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 속으로는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이녁이 정녕 나를 연모한다면, 부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마시오.


“요즘도 밤마다 우느냐.”


“······.”


“무엇 때문이냐.”


“······.”


질문이 끝없이 이어졌으나, 돌아오는 것은 정적뿐이었다. 그 어떤 대답도 쉬이 듣지는 못할 것이라는 걸 짐작한 듯한 히로유키의 눈빛이 일순간 바뀌었다.


“······ 따라오너라.”


자신의 손목을 향하는 그의 커다란 손을 정화가 온 힘을 다하여 거세게 뿌리쳤다. 당황하여 급히 바라본 정화의 눈에 잔뜩 고인 눈물을 본 히로유키의 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이게 무엇 하는 짓이냐?”


“······ 안 갑니다······.”


정화가 울먹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가슴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이 어느새 저를 에워싸고 있었다. 왜 이 자의 앞에서만 작아지는가. 파렴치한의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세상 천지에 또 있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 죽더라도 여기서 죽겠습니다.”


“하, 죽을 죄라는 것은 아는 모양이구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히로유키가 탄식을 내뱉었다. 이 자는 정녕 그 마음을 몰랐던가. 다른 이도 아닌 이 여인을, 그것도 내가 죽인다니,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나의 마음이 이 자에게는 고작 그 정도의 놀림거리로 와닿았던가.

두려웠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이 떨려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기분이란 이러한 것이구나. 차라리 죽여달라는 심정으로, 부러 더 저항하였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빌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고 싶었다. 보란 듯이 살아서, 보란 듯이 통쾌한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방도조차 없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를 본 첫 날, 두려움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그 때와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어조에 본능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허나 너도 알지 않느냐? 난 결코 널 죽이지 않는다.”


제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은커녕, 정화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갔다. 일그러지는 낯빛에 히로유키가 그만 고개를 한 차례 털었다.


“······ 아니, 말을 바꾸지. 난 결단코 너를 죽이지 못한다. 허니 걱정 말고 따라오너라.”


그럼에도 정화가 그의 말에 따를 리 없었다. 결국 고심하는 듯 하던 히로유키가 정화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다정하지는 못해도 결코 험하게 대하지 않던 이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본군 중위가 조선인 여급을 데리고 밤길을 걷다 퍼질 소문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에게 붙잡혀 끌려가다시피 한 곳은 술집이었다. 다른 군인들이 갈 법한 게이샤가 나오는 곳은 아니었다. 작고 작아서 그 누구도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곳.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방으로 정화를 데리고 들어갔다. 비좁은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정화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여긴 어찌 데려오신 겁니까?”


손을 내팽개치며, 정화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네가 하도 입을 아니 열길래 고문을 좀 하러 왔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간신히 꺼낸 질문에 이어지는 답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었고, 도리어 정화의 화만 북돋웠다.


“······ 차라리 혀를 뽑으십시오.”


“술을 마실 바에야 혀를 뽑아라?”


허망하게 내쏘는 정화의 말은 비수가 되었고, 히로유키의 답은 그에 상응하는 사나운 어조로 돌아왔으나, 두 쌍의 눈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원한다면 그리 해 주마. 그게 진정 네가 원하는 것이냐?”


“······ 더 이상은······ 그만 하십시오. 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화가 애써 시선을 피하며, 스스로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쥐려 하는 히로유키의 눈길을 뿌리쳤다.


“내가 무어라 물으면 대답을 할 것이냐? 네 바람대로 혀라도 뽑고, 늘 말하던 대로 손가락이라도 자르면 그 대답을 할 것이냐?”


“그래도 안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 없,”


“제발!”


별안간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외침에 정화가 화들짝 놀라 몸을 세게 떨었다. 제 눈앞에 있는 이에게 마음을 품었던 세월만큼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정작 그 자는 자신에게 위협을 한 적도, 언성을 높인 적도 없었다. 그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위치와 소문 뿐이었기에 그가 고함을 치는 것은 수 년간 정화의 상상 속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제발······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후지와라 히로유키, 왜놈보다 더 악랄한 조선인. 조선인들의 혀를 뽑으며 처절한 비명을 들을 때도 눈썹 한 오라기조차 흔들리지 않는 독사 장교가 누구보다도 비극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찢어지듯 절규한다. 그저 여급일 뿐인 나에게.


“네 앞에서는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 나와는 정반대가 아니더냐. 나와는 하등 관계없는 것들이다. 넌 지난 한 해 동안 내 측근에서 나를 지켜보았다. 허니 누구보다 네가 잘 알지 않느냐? 내 단언할 수 있다. 난 결단코 너를 해한 적이 없다, 그 무엇보다도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허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난, 난 그저······!”


이성을 잃고 울부짖던 히로유키의 눈에 문득 정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공포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두려울지라도 언성을 높인 적만은 없었던, 늘 침착하기만 했던 그가 아이처럼 절규하는 모습을, 어찌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모습을 눈 앞에서 보는 것만큼 당혹스러운 일이 있을까. 정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 심정을 결코 모를 수가 없었다. 마음 한 켠에 고이 쌓아 두었던 돌탑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작고 여리지만 늘 그 특유의 강단만큼은 잃지 않았던 두 눈동자에서 모든 빛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아니······ 정화야, 미안하다······. 널 겁박하려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결코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정화야, 네게 성을 내어 미안하다, 내가 정말로 잘못했다······.”


간절히 애원하는 히로유키의 목소리를 듣는 정화의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무엇일까. 긴 침묵이 흘렀으나, 그것이 침묵이라는 것을 누구도 느낄 수 없었다.


“······ 네 눈에 내가 괴물이자 짐승으로 보이는 것을 안다. 그 시선을 바꾸라고 말할 일은 없을 거다. 허나 마지막으로 부탁하마. 밤마다 그 소리를 듣고도 그저 넘기기에는, 내가 도무지······”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으나, 간간히 들려오는 애달픈 소리가 정화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흐려지는 말끝 뒤로 다시 한 번 깊은 적막이 도래했다. 복잡한 마음을 씻으려는 것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정화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히로유키의 눈에서도 어렴풋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 듯 하였다. 차라리 내가 이 자였다면, 저리도 부끄러움을 몰랐더라면 지금처럼 괴롭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길은 아예 뻔뻔해지는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 약조 하나만 해 주시렵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화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히로유키가 고개를 들어 정화를 바라보았다. 무어라도 좋으니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양.


“무엇이냐.”


“제가 그 어떤 말을 하여도······ 절 살려주시렵니까.”


“약조하마.”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그저 이 자리에서 전부 듣고 그 즉시 잊어주겠다 약조하시면 말하겠습니다.”


“그리 하마.”


“또한 제게 그 어떠한 것도 묻지도, 말하지도 마십시오. 행여 입을 여시는 순간, 저는 그 즉시 제 손으로 제 혀를 뽑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두 눈으로, 히로유키가 답을 대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손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술조차 입에 대지 않았거늘, 늘 뽀얗던 얼굴이 분노로 한가득 물들며 점차 달아올랐다.


“······ 망설이지 말거라. 난 이미 너에게 그 어떤 연유도 더 묻지 않고 면회를 가게 해 주었다.”


“······ 제가 아직 취하지 않았습니다.”


한숨을 내뱉듯, 정화가 힘없이 뇌까렸다.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입술 사이로 힘없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혹여 제가 취하여 오늘 일을 전부 잊는다 하여도, 앞서 한 약조만큼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제가 한 말조차 잊는다 하더라도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히로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 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거니와, 정화에게 해가 가도록 두고 보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그런 히로유키가 말릴 새도 없이, 정화가 술병을 집어들고서는 한 병을 전부 들이켰다. 함께 술상 앞에 앉았을 때도 거의 입에 댄 적이 없었거늘,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손에는 빈 병이 들려 있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정화가 술병을 상에 내려놓았다. 한층 무거워진 손목을 상 위에 걸친 채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른 손으로 괴었다.


“허, 참······.”


“이 정도 먹었으면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안 아프겠지요······.”


당황을 넘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히로유키를 뒤로 하고 정화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잠시 감았다 뜬 눈은 그 사이 초점을 잃어 풀려있었고, 입술 사이로는 울음을 억누르는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전 부모도 없고, 고향을 떠나오며 다른 이들과 연락도 않은지라, 이제는 처지를 토로할 정도로 가까운 동무도 많지 않습니다. 유일한 혈육이라고는 우리 오라버니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이가 서대문 감옥에 끌려갔던 그 사촌 언니와 우리 새언니, 그리고 조카입니다. 헌데······ 헌데 그들을 모두,”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와 말을 막았다. 고개가 떨어졌다. 울컥, 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슴이 칼에 베어 난도질당하는 심정이었다.


“흐으윽······.”


난도질 당한 가슴에 뚝뚝, 뜨겁고 투명한 피가 떨어졌다. 차마 더 삼킬 수 없는 구슬픈 소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누군가에게 속내를 호소하고 싶은 마음도, 무엇도 없었으나 이것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울분에 들어차 웅크러든 몸 사이로 정화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밤마다 들어왔던 구슬픈 통곡 소리였다. 들을 때마다 뼈를 깎는 듯 괴롭던 그 소리에 차마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숙인 고개 위로 다시금 손을 뻗었다. 허나 이번에도 닫지 않았다.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이 가녀린 몸은 필경 바스라지리라. 내 손으로 결코 없앨 수 없는 내 사람, 할 수 있는 것은 약조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든 정화의 눈에는, 그간 보아왔던 순한 눈망울과는 판이하게 다른 짙은 노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왜놈의 손에 잃었습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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