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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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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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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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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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DUMMY

“연유가 뭐야? 내가 대체 왜 그 자를 지켜봐야 하는데?”


“목소리 안 낮춰?!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래?”


크지는 않았지만 마당에 발을 디딘 자현의 귀에 들리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반가운 목소리, 필경 정화와 단희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소상히 알 수 없었으나 정화가 말한 ‘그 자’가 어쩐지 저와 관련된 이처럼 들려왔다. 몸과 더불어 기척까지 숨긴 자현이 둘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소리라도 질러서 다른 이들 들으라 해 볼까? 아니면 하는 수 없지. 네 말마따나 여기서 계속 기다리다, 그 도련님이라는 사람 나타나면 얼굴 보고 네 이야기를 해야,”


“아, 안돼! 안돼 그러지 마! 제발, 제발 다 얘기할테니 도련님께는 비밀로, 앗!”


“허면 바른대로 말해. 무엇 때문이야?”


“······ 주인 나으리가 시켰어, 도련님을 감시하라고······.”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자현이 튀어나오려는 숨을 있는 힘껏 참았다. 그 어떠한 기척도 내지 않았으나 심장이 터져나올 듯 뛰었다. 두려움도 긴장감도 아니었으며, 충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계단 근처에 얼씬거린다 하더니만 감히 저런 모략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 여급 한 명 정도를 더 꼬드겨서 도련님 눈에 자주 띄게 한 다음 둘이 밀회를 갖는다고 집안에 소문을 내라 했어. 그럼 소문도 퍼지지 않고 조용히 쫓아낼 구실이라도 생긴다고. 대신 도련님이 워낙 눈치가 빠르니 조심하라고 했지······. 그 일을 성공하면 언젠가는 좋은 집에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그 뒷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미 중한 것은 전부 실토하였으니, 그 이상으로 들어야 할 것도 없었고, 설령 있더라도 이보다 중하지는 않으리라. 그리 어여삐 여기던 아이는 아니었으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올랐다. 높은 자리에만 없다 뿐이지, 저년이야말로 나라를 팔아먹은 그 짐승만도 못한 작자들과 무어가 다르단 말인가.

더 이상은 감출 수 없을 듯한 노기를 애써 억누르고 자현이 2층으로 몸을 옮겼다. 다급한 소식이었거늘, 금일따라 운은 늦었다. 연유야 뻔하였다. 필경 뻬치까 선생께서 스치듯 하신 그 말씀을 따르고 있으리라. 운의 손을 거쳐 신한촌의 식구가 더욱 늘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왔으니, 알 만 하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익숙한 목소리에 자현이 문쪽을 돌아보았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노기를 숨길 생각조차 않았던 자신을 이상히 여긴 듯, 운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였따.


“그 늙은이가 너를 어여삐 여기리라는 기대는 당초부터 하지 않았다만, 생각보다 더 치밀한 놈이었어.”


“그 놈이 어째서?”


“넌 어찌 몰랐던 게야? 네 뒤에 버젓이 여급 하나를 붙여 놓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야?”


“1층에서 일하는 여급들 중에 옥단희라는 계집이 있어. 나이는 열여덟이고, 관저에 들어온지는 1년 여 정도 되었어. 방금 지나다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금일 새로 들어 온 여급이 너와 정분이 났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널 내쫓으려 하였더군.”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들 중 어느 것 하나 쉬이 믿을 만 한 것이 없었다. 가히 충격적인 듯, 운이 잠시 얼어붙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정립하던 운이 다음 순간, 피식 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여급이라면 2층까지 올라오지도 못하는 자 아닌가? 그런 자가 무슨 수로 소문을 내겠어. 제아무리 총독이 날 눈엣가시로 여기기로서니, 그딴 소문 하나에 쫓겨날 리는 없지. 허니 이번 일만큼은 그리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성 싶어.”


놀랍도록 태연한 운에 대한 답변은 코웃음이었다. 방 전체가 울릴 듯한 쿵쿵 소리와 함께 운에게로 다가선 자현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


“명색이 여우 (‘밀정’을 뜻하는 은어.) 라는 자가 어찌 이리도 태연한가?”


“친일파를 제하고 같은 조선인을 죽이는 것은 되도록 지양하자 한 것은 네가 아니었나?”


“정신 차려. 그 자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정녕 모르겠어?”


나직이 내뱉은 말을 끝맺자마자 밖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범인 (凡人) 이었다면 그저 밖에서 나는 소리이겠거니 싶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나, 두 밀정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작은 소리가 채 멎기도 전에 각자의 품 안에 감추어 둔 권총을 꺼내었다. 천천히 소리를 죽인 채, 둘은 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어 문에 귀를 가져다댄 채 온갖 신경을 기울였으나, 그 무엇도 더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 설마 그 여급은 아니겠지?”


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현이 방문을 거세게 열어젖혔다. 어두운 복도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고, 방문을 열 때 났던 소리가 웅웅거리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잔뜩 죽인 채 소리없이 내뱉는 숨소리는커녕 1층에서 들려올 법한 소리 한줄기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같은 상태는 지속되었고, 그제서야 자현이 다시금 문을 걸어 잠갔다. 손에 든 권총을 천천히 내려 다시 품 속에 집어넣은 후에야, 그는 비로소 운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Похоже, что говорить на Чосонском языке было бы опасно в этой ситуации.

(조선어가 위험해 보이는군.)”


운의 탁상 쪽으로 몸을 옮기며 자현이 무심한 어조로 내뱉었다. 안도는 하였으나,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한 채 창문 너머를 살피는 모습이었다.


“Так вот, почему ты поднялся?

(그것 때문에 올라온 건가?)”


“Да, мне кажется, что уже прошло достаточно времени, ты правда не знал?

(그래, 보아하니 꽤 오래된 일인 듯 싶은데 정녕 몰랐던 게야?)


“В случае, это она постоянно сновала возле лестницы? Я видел одну женщину примерно твоего роста. На ней ещё каждый день было ожерелье.

(혹, 매번 계단 근처를 서성이던 그 자인가? 키가 너 만하고 매번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자를 근래에 들어 자주 보았어.)”


“Да, точно. Ты следил за ней, потому что понял всю ситуацию, не так ведь?

(그래, 맞아. 네가 생김새까지 눈여겨 볼 정도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내 말이 틀려?)”


“Я просто догадывался. Я просто не хотел верить в то, что Чосонцы это сделают.

(······ 혹여나 싶었을 뿐이지. 단지 조선인이 그러리라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Где лисы, которых мы так далеко убрали, родились?

(우리가 지금껏 제거한 수많은 여우들은 어느 나라 태생이던가?)”


자현이 냉랭한 목소리로 일침을 내쏘았다. 말없이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쉬는 운에게로, 그가 다시금 몸을 돌렸다.


“정신 차려, 백운. 지금 너와 내가 있는 이곳은 전장이야. 한가로이 누군가를 믿을 때가 아니야.”


“······ 미안, 내 그만 해이해졌어.”


대답 대신 자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찌 처리할까?”


“우리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아직 살려 보낼 수는 있어. 대신 티나지 않게 은밀히 쫓아내야 할 거야. 네 말대로 나 또한 조선인을 죽이는 것은 원치 않으니.”


“······ 방법을 강구해 보지. 전해줘서 고마워.”


운의 말에 자현이 보다 확실히 마음을 놓은 듯, 침대 한 켠에 걸터앉았다. 비로소 취하는 편안한 자세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모든 사실을 그 여급이 알아차렸다는 거야.”


“그 여급이라면, 소문의 당사자가 될 뻔한 그 자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던 자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정화가 관영의 친척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하였다. 목구멍을 넘어 입 안까지 들어왔으나, 곧 약조를 어길 뻔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서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자현의 고갯짓을 확인하고서야, 운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향하였다. 수많은 책들 중 거침없이 꺼낸 것은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익숙한 듯 펼친 책장은 그저 일반적인 책이나 다름없었다. 알 수 없는 글자가 깨알같이 빼곡하여 진절머리라도 칠 성 싶었으나, 운은 익숙한 듯 여러 장을 휙휙 넘겼다. 분명 두껍기 그지없는 책이고 손을 댄 흔적조차 전무하였으나, 그 어디에도 라스콜니코프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에 대한 이야기는 실려 있지 않았다.

죄와 벌, 그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오로지 물빛 안개를 위해 신한촌에서 다시 쓰인 책이요, 작전과 암어가 가득한 서적이었다. 중간중간 운과 자현의 필체가 뒤섞여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기로서니, 여즉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신이하군그래.”


“혹여나 싶은 일들을 대비하였거늘, 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내 몰랐다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야.”


자현의 혼잣말에 운이 화답하듯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손가락으로 하나의 구절을 짚었다.


12 февраля бомба должна была прибыть в Корейскую Слободку (신한촌의 러시아어 표현. 원형은 Корейская Слободка.).

(2월 12일, 신한촌에 폭탄 도착 예정.)


“신한촌으로 건너간 것이 이리도 잘 한 일일 줄이야. 여급들 중에 노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어서 천만다행이야.”


“서류에 그런 말을 적어놓은 이는 애당초 뽑지 않았으니 말이지.”


자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운에게 맞장구 아닌 맞장구를 쳤다.


“허나 조심해. 제아무리 서류가 Русский (러시아어를 뜻하는 말.) 로 되어 있기로서니, 행여라도 들키면 Корейская Слободка 전체가 위험해질 테니까. 행여 네가 정보를 들킨다면, 작전의 성공은 고사하고 우리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너도 조심해. 정체를 숨겨야 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니야. 권업회가 너와 같은 인재를 잃는 것이야말로 멸문이나 다름없는 재앙이니 말이지.”


결의에 찬 눈동자가 허공에서 서로를 마주하였다. 손을 잡지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나 적어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만큼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결단코 모를 수가 없었으리라.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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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24.09.17 5 0 11쪽
58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6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9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8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10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3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4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2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5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5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5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7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8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2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8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2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9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8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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