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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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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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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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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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DUMMY

1912년 12월 25일


“경성에서 사용하게 될 새로운 이름입니다. ‘최정자’, 왜말로는 ‘마쓰야마 사다코’ 가 되겠군요.”


이름을 받아들고도 자현은 낯선 눈치였다. 사다코, 앞으로는 그리 불리려나. 먼저 신한촌을 떠난 운의 심경이 이러할까 싶었다. 제 이름에는 언제쯤 적응하게 될는지, 지금으로써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사히 잘 다녀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동지 또한 무사하십시오.”


“경성에 가신다니,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바뀌었는지 이야기해주십시오. 학당에 다니던 시절이 벌써 수년 전이거늘, 지금쯤이면 상전벽해를 이루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영이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여유롭게 말하였다. 태평성대는커녕 나라마저 빼앗긴 마당에 어찌 저리 웃을 수 있는지, 그 어떠한 희망찬 생각을 하더라도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는 제게 관영은 늘 신이한 존재였다. 물빛 안개를 향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결코 모르는 바 아니나, 타고난 성정이 너무도 다른지라 자신에게는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동지였다.


“······ 인사는 짧게 하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물빛 안개를 이룬다면, 다시 이 곳에서 만나 못 다 한 술 한잔 하십시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관영이 제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때처럼 그 손을 바로 잡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참, 내 염치 없이 청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내 유일한 혈육 둘이 영흥에 살고 있습니다. 인흥면 능동리라는 작은 마을입니다만, 뭐 그건 그리 중하지 않고······. 친동생은 아니고 외가 친척이긴 합니다만, 함께 자란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중 동생 되는 계집아이가 왜말을 곧잘 합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는 않으나 머리가 비상하여 여고보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혹여 경성의 학당 (여기서는 이화 학당을 의미.) 으로 공부를 하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이름은 남정화이고, 저를 꼭 닮은 아이입니다. 경성 땅이 넓고 넓다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어찌 될지 모르니 행여나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부디 잘 대해주십시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도 구김없이 밝게 자란 그 아이를 떠올릴 때면 주책맞게 눈물이 흐릅니다그려.”


그 말을 하는 관영의 눈빛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오래 전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도 하였고, 뼈아픈 기억을 애써 꺼내는 듯 고통스러운 얼굴이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총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또한 저를 기억해달라 감히 청을 드립니다.”


늘 날이 서려 있던 자현의 기세가 일순간 누그러졌다. 아, 그래. 그 웃음은 결코 행복하여 짓는 것이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사는 다른 이들처럼, 이 자의 웃음도 매한가지였다. 그 웃음을 짓는 내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 물빛 안개를 함께 하면서 그러한 고충 하나 헤아리지 못했다니, 부끄러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 동지를 닮았다면 필경 그 눈빛이 총명하겠군요. 남정화, 그 이름 석 자는 제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자현이 관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악수였다. 무뚝뚝하기로는 이루 말 할 데가 없는 자현에게는 할 수 있는 가장 살가운 행동과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동지의 이런 면모는 또 새롭군요.”


“헌데 어찌 운에게는 이런 청을 하지 않으십니까? 미리 알았다면 그의 성정상, 백방으로 찾아보고 도움을 주려 할 텐데 말입니다. 행여 처지가 여의치 않은 이를 발견한다면 신한촌으로 보내라는 명도 잘 수행하고 있고 말입니다.”


“······ 본래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허나 어찌 된 일인지 동지에게만큼은 이 말을 하고 싶군요. 다만 홀로 알고 계시고 말을 아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제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대의를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 중 그 어떤 것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현이 그저 말없이, 관영을 안았다. 그 아픔이 어떠한 것일지 감히 헤아릴 수는 없으나, 적어도 조선 땅에 목숨을 내놓으러 가는 내게 조금이라도 덜어준다면 덜 괴롭겠지.


“내 본디 동지만큼 성정이 다정하지 못합니다. 하여 그간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저 또한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이 말 만큼은 해야 할 것 같군요. 관영 동지가 진심으로 그리울 겁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립고 또 그리울 테니,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시 만납시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4년 12월 3일


겨울의 어느 날, 자현은 잠들지 못한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새로이 여급으로 뽑을 이들을 위한 서류였다. 운의 배려로, 그는 여급들을 관리하는 영수 (領袖. 여럿 중의 우두머리.) 격의 일을 맡게 되었다. 외출이 자유롭고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몸이 편안한 일이었던지라, 밀서를 주고받고 교신하는데 데에도 용이하였다.

흐릿한 전깃불 아래에서 천천히 종잇장을 넘기던 자현의 손이 멈추었다.


南靜花 (남정화)

1899年 4月 6日 出生

永興公立普通學校 卒業 (영흥공립보통학교 (보통학교.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 졸업)

咸興女子高等普通學校 中途退学 (함흥여자고등보통학교 중도퇴학)


남정화, 실로 익숙한 이름이었다. 설마 하였으나 관영이 말한 여고보며 영흥 지역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까지, 이 모든 것이 들어맞는 우연은 실로 드물 것이다. 헌데 학당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이가 어찌하여 여고보를 중퇴하고 여급 일을 하게 된 것일까. 정녕 일전에 말했던 집안 사정 때문일까. 소상한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손끝이 떨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이를 만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1915년 1월 8일


‘아······.’


새로운 여급이 오기 전날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던 자현이 터져나오려던 탄식을 힘겹게 삼켰다. 지원서를 낸 ‘남정화’라는 여급이 관영의 사촌 동생이리라는 것은 추측일 뿐, 확신조차 할 수 없었으나 얼굴을 본 순간 그것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관영의 눈코입을 판에 찍은 듯 그대로 닮은 이를 보고, 그 둘이 피가 섞인 사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이는 없었다. 친자매가 아니기로서니 이리도 닮을 수가 있는가, 싶었으나 그런 것은 중하지 않았다. 칼바람이 부는 날씨와는 별개로 자현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짧은 말이었으나, 조선인 특유의 억양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관영의 말처럼 일본어를 곧잘하는 모습에, 비로소 이 아이가 관영의 혈육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가슴 한 켠이 웅크러지는 듯 아파 왔다.


“저는 금일부터 일하게 된 남정화라고,”


“들어와.”


눈물이 고이는 것을 들킬까, 관영이 부러 쌀쌀맞은 어투로 이야기했다. 당황한 정화가 다급하게 자신의 걸음을 뒤따르는 소리가 어깨 뒤로 들려왔다.


“본적이 어디니?”


“함경남도 영흥이요.”


“영흥? 영흥 어디?”


“인흥면에 능동리라고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욱 강하게 확신했다. 이 아이는 분명 관영이 걱정하던 그 아이가 맞았다. 비록 관영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자현은 굳게 다짐했다.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게이샤가 나선 후, 방에서는 공포에 젖은 아이가 눈물을 떨구는 소리 밖에는 들려오지 않았다.공포에 잠식되어 제 상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법한 아이를 보는 운의 머릿속에는 재형과 주필이 지나가는 듯 했던 말 한 마디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행여 작전을 하는 동안 위험에 처한 이가 생긴다면 신한촌으로 보내거라.’


* “어찌 우느냐?”


* “살려주세요······.”


두려운 와중에도 마음 편히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아이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 “걱정 마라. 난 결코 널 해치지 않는다.”


* “저를, 저를 사셨다 들었습니다······. 전 이제 이 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나요? 어디로 갑니까······?”


어설픈 일본어로 더듬더듬 묻던 아이가 이윽고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는 사뭇 다른 표정을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웃지는 않았으나 온기가 느껴지는 눈빛, 그 속에는 저를 향한 측은함과 정이 가득했다. 정을 느껴본 지 너무도 오래된 아이였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믿어도 되겠구나.


* “가까이 오너라.”


허나 여전히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아이는 눈을 내리깐 채로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 “여기에 얼마나 있었느냐?”


*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허나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고, 그 이후로도 겨울을 두 번 더 보냈습니다.”


* “나이가 열 둘이라 하였느냐?”


* “예······.”


운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아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제법 묵직한 그것을 감싼 고사리같은 손이 봉투를 열더니만, 깜짝 놀라며 몸을 한 차례 더 떨었다.


* “이건······.”


* “이제 더는 아까와 같은 일을 겪을 필요가 없으니, 여기를 빠져나가 어디든 가서 살거라.”


* “······ 저, 그러나 갈 곳이 없어요······.”


* “가족은 없느냐?”


* “······ 다 죽었어요······. 그리고 떠돌아다니다가 붙잡히다시피 하여 여기 온 것입니다······.”


절망과도 같은 말에 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떠돌아다니다가 이런 인생을 살게 된 아이에게 고작 돈이나 쥐어주며 다시 떠돌아다니라 한 꼴이었다. 정말 내 이리도 무지하구나, 하는 자책감에 휩싸인 그가 다시금 아이를 바라보았다. 적지 않은 자금이었으나 너무도 어려 그것이 무어를 뜻하는지도 알지 못할 아이에게, 자신이 다시 한 번 실수를 하고 말았다.


* “이름이 무엇이냐.”


* “하나코입니다······.”


* “조선 이름 말이다.”


* “이경화여요······.”


일본인이 조선 이름을 묻는 이 기이한 상황 속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아이가 제 이름을 또박또박 읊었다.


* “기차를 타 보았느냐?”


* “예? 예······.”


* “경성역까지 길은 알겠지. 여기로 가거라. 가는 법은 그 안에 적어 두었다.”


운이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어 소녀에게 건네었다. 일본군 장교의 손에서 조선의 글이 나오자 제법 놀란 듯, 아이가 눈을 꿈벅이며 쪽지와 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 “나으리, 조선말을 아십니까······?”


“아무래도.”


결국 애써 억누르고 있던 충동이 본디 해야 할 일을 이기고 말았다. 이미 이 아이를 만나는 순간부터 제 정체를 알리는 것을 무릅쓰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어······? 일본인이 아니라,”


“자세한 건 묻지 마라.”


“네······.”


베푼 친절과는 사뭇 다른 냉랭한 목소리에도 아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헌데 여기 적힌 곳이 어디여요?”


“신한촌. 아라사 땅이지만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어린 조선인 아이가 찾아왔다 하면 흔쾌히 받아 줄 것이다.”


“가서 무어라 말하면 되나요?”


“그걸 보여주며 여기서 살고 싶다 하거라. 내가 보내어 왔다 하면 될 것이다.”


“나으리 존함은요?”


별 것 아닌 질문이었으나, 아이와 함께 방을 나서던 운의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충분하였다.


“나으리······?”


“······ 선윤. 그리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불러 내 이름. 입가에 감도는 기분이 한없이도 묘했다.


“저 나으리······.”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운이 몸을 낮추었다.


“어찌하여 제게 이리 대해주십니까?”


“······ 어린 아이가 고통스러운 세상이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없지. 지옥을 없앨 수는 없어도, 억울하게 발을 디딘 이는 구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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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화 - 과거 (7)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24.09.17 4 0 11쪽
» 57화 - 과거 (6) : 그 날의 진실 24.09.14 6 0 12쪽
57 56화 - 과거 (5) : 또 다른 밀정 24.09.10 5 0 12쪽
56 55화 - 과거 (4) : 고진감래 24.09.07 6 0 15쪽
55 54화 - 과거 (3) : 밀정 24.09.03 8 0 13쪽
54 53화 - 과거 (2) : 물빛 안개 24.08.31 7 0 11쪽
53 52화 - 과거 (1) : 스친 인연 24.08.27 7 0 14쪽
52 51화 - 진실 24.08.24 11 0 11쪽
51 50화 - 칼 24.08.20 9 1 12쪽
50 49화 - 상처 24.08.17 9 1 11쪽
49 48화 - 무너진 탑 24.08.13 10 1 12쪽
48 47화 - 눈물 24.08.10 16 1 13쪽
47 46화 - 일수차천 24.08.06 11 1 15쪽
46 45화 - 도시락 24.08.03 12 1 13쪽
45 44화 - 연민, 그리고 웃음 24.07.30 12 1 12쪽
44 43화 - 밤은 길고 24.07.27 13 1 13쪽
43 42화 - 약혼 24.07.23 11 1 14쪽
42 41화 - 양과자 24.07.20 13 1 12쪽
41 40화 - 백야 24.07.16 15 1 11쪽
40 39화 - 창살 없는 감옥 24.07.13 16 1 11쪽
39 38화 - 자처 24.07.09 17 2 14쪽
38 37화 - 가책 24.07.06 12 1 12쪽
37 36화 - 야 류블류 찌뱌 +1 24.07.02 17 2 12쪽
36 35화 - 진퇴양난 24.06.29 16 1 12쪽
35 34화 - 독주 24.06.25 21 1 11쪽
34 33화 - 두려워하는 것 24.06.22 18 1 12쪽
33 32화 - 속내 24.06.18 1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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