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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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73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작성
24.06.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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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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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32화 - 속내

DUMMY

히로유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화가 급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 해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의 곁에서 일하였으나, 그의 입을 통해 제 이름 석자를 들은 것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 네······? 방금 제 이름을,”


“잠시 앉아보련.”


옅은 떨림과 함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정화의 눈에 비로소 히로유키의 다른 쪽 얼굴이 들어왔다. 한 눈에도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은 늘 하얗고 곱상한 피부를 갖고 있던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도, 도련님, 괜찮으셔요?!”


소스라치게 놀란 정화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탄식을 내지르며 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놀란 두 눈이 평소보다 더 커진 채로 떨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일이 없었고, 히로유키의 방에 다녀간 사람은 저 아니면 오사무였다. 얼굴이 이리 되었다는 것은······ 정녕 제 생각이 맞는 걸까? 허나 그 외에는 말이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가 아니 섞였어도 제 아들이었고, 나름 아들이라 생각했으니 그리 많은 걸 지원해주었을 텐데. 대체 이 자가 무슨 말을 했길래 얼굴을 저 지경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인가? 머릿속으로 온갖 것을 따지는 정화와 달리, 정작 다친 히로유키는 상처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피식, 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어때 보이느냐.”


“다치셨습니다, 약, 가서 약을 가져오겠습,”


“되었다, 이 정도로 무슨.”


“하오나 그리 두면 흉이 남습니다. 어찌······.”


“군인이 상처에 신경쓰는 것만큼 한가하게 보내는 일이 없다. 어서 앉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제 주인에 손을 뻗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정화였다.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약을 가져와 치료를 해야 제 마음이 편하겠지만, 크게 다쳐 본 적도 없어 어찌해야 하는 지도 몰랐고,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지 않았다가 어찌 될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참을 쭈뼛거리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고 말았다.


“술을 못 한다 하였던가?”


또다시 생각도 못한 질문이었다. 1년을 넘게 보아왔지만 근자에 들어서는 무엇 하나 제 예상이 들어맞은 적이 없었다. 범인 (凡人) 이 아니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기로서니, 설마 얼굴이 저리 부은 채로 술을 마시려는 건가? 게다가 히로유키는 술이라고는 그 독하다는 노국 술만 마셨다. 저러다 내일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가,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셔 본 경험이 적어서······.”


“하하, 참······.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리 말했지, 내 또 괜한 것을 물었구나.”


히로유키가 일전 보드카를 꺼내던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잠시 뒤 다시 탁자 앞에 앉은 그의 오른손에는 꽤 큰 술병 두 개가, 왼손에는 자그맣고 긴 잔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잔까지 따로 두고 마실 요량이라면 애당초 제게 술잔을 가져오라 명을 하지 말지, 라는 생각에 정화가 고개를 틀고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그 때는 마시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한 번 들어 보거라.”


히로유키가 소주잔만 한 얇고 긴 병에 술을 따라 건네었다. 맑고 투명한 것이 그저 물처럼 보였으나, 꽤 멀리서부터 독한 향이 코 속을 파고들었다.


“어찌 안 마시느냐?”


“도련님께서 먼저 드셔야 마시지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름 거절이란 것을 해 보았으나, 그의 말에 히로유키는 제법 큰 잔에 술을 한가득 따르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비웠다. 결국 이 어색한 자리를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한 정화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술을 살짝 입에 대었다.


“윽······!”


“맛이 어떠하냐?”


“으읍, 아흐으······. 대체 이런 걸 어찌 마시나요? 독약 같아요.”


오만상을 쓰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정화를 바라보며, 히로유키가 답지 않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짙은 눈썹이 희미한 팔 자 (八) 를 그렸고, 도리어 정화의 낯빛을 살피며 그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독약을 먹어 본 양 말하는구나.”


“말이 그렇다는 뜻이죠.”


“뭐, 다른 술도 있으니 입에 맞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두거라. 와인은 마셔보았느냐?”


“아니요······.”


고개를 젓는 정화의 모습을 본 히로유키가 검붉은 빛이 도는 병의 마개를 열더니만, 이어 정화가 가지고 온 다른 잔에 술을 따랐다. 검디 검었으나, 중간중간 도는 핏빛에 생경함을 느낀 정화가 시선을 떼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았다.


“마셔 보거라.”


신기함과는 별개로 내키지는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입술에 술을 가져다 댄 정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억하는 한, 거의 처음으로 느껴보는 단 맛이었다. 굳이 표정을 숨기지 않는 이가 재미있기라도 한지, 히로유키가 작게 피식 소리를 내었다.


“입에 맞다면 자주 꺼내 먹거라. 내 자고 있을 때라도 들어오는 것은 막지 않을 터이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정화야······.”


제 이름이 이렇게까지 어색하게 들릴 수가 있을까. 아마 이 자의 입이라면 수백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못하리라.


“내 어찌해야 할까, 앞으로······.”


“······ 주인 나으리 때문에 그러십니까······.”


정화의 말을 들은 히로유키가 예상치 못했다는 듯 그와 눈을 맞추었다.


“들었느냐?”


“아니요, 실은 올라오다 뵈었어요. 헌데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 약혼을 한다는구나.”


가슴이 철렁하였다. 약혼이라니. 아이가 하나 정도 있을 법한 나이에도 혼인하지 않은 사실이 처음부터 신기하긴 했으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정화의 몸이 그만 굳고 말았다. 당사자에게도 충격적인 소식인지, 히로유키가 다시 한 번 잔을 비웠다.


“약혼이요······?”


“······ 내가 원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됩니까······?”


“그리 살아봤자 평생 일본 명문가를 등에 업고 신분 상승을 꾀한 조센징이라는 멍에를 벗지 못할 것이다.”


정화가 할 말을 잃고 히로유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약혼에 대해 들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으나, 삽시간에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다시 채운 생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 애써 부정해보아도 이 자는 결국 친일파였다.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주인 나으리께······?”


문득 그걸 면전에서 거절하여 저리 맞은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그러니 혼이······ 흡!”


나름의 자존심이었을까, 순간 제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그대로 끄집어낼 뻔한 정화가 이성을 되찾고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 순간 피식, 하고 터지는 웃음소리가 허공을 메웠다. 히로유키였다.


“혼이 날 만 하였다?”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정화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늘 냉랭하기만 하던 히로유키가 답지 않게 재밌다는 표정을 하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이 자는 속도 편한가, 저리 맞아놓고서는. 민망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얼굴을 한 정화가 고개를 숙였다.


“······ 많이 나무라시던가요······.”


“하하하······.”


히로유키가 쓰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술을 들이켰다. 저 독한 술을 어찌 저렇게 많이도 마시는지, 정화가 되려 눈썹을 올리며 놀랐다. 그래, 속이 편할 리가 없었겠지. 그저 표현에 서툴렀기 때문이리라.


“어찌 웃으셔요?”


“아니다.”


히로유키가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다시 한 번 술병을 들었다. 허나 그 뒷부분을 붙잡은 손길 떄문에 끝내 따르지는 못하였다.


“도련님, 자꾸 그리 드시면 내일 어찌하시려고요? 아무리 쉬는 날이라지만 위험합니다. 맛도 없는 걸 어찌······!”


“아라사에서 술을 배워서 그런가, 난 이게 입맛에 맞더구나. 뭐, 워낙 오랜만에 마시다 보니 취기가 좀 돌긴 한다만 오늘 하루 정도는 취해도 되겠지.”


히로유키가 제법 나긋하게 말하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취기가 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에 없이 부드러워진 제 주인의 눈이 슬퍼보였다.


“그간 힘든 일이 있으면 홀로 이리 푸셨습니까? 저도 어찌 풀어야 좋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건 아니어요. 이러시면 몸만 상합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정화가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피하고자,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입으로 갖다 대었다.


“알지 않느냐. 너는 내게 그리 해서는 아니 된다.”


탄식을 참지 않고 흘리는 정화를 보고, 히로유키의 입술이 흐릿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머금었다.


“······ 정신이 멀쩡하면 꿈에서조차 번뇌가 사라지지 않고 악몽이 되어 나타나지. 그저 잠시 동안 모든 걸 잊고자 할 뿐이다. 자주 마시지는 않으니 걱정 마라.”


조선인 핏줄이라서일까, 고집이 그리 셀 수가 없었다. 1년이 넘게 일했고, 이젠 사이가 가까워진 지도 제법 되었으나 매번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으니 앞으로도 제가 어찌 이기랴. 정화가 착잡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속내를 숨길 생각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푹 숙인 고개 너머로 다시 한 번 술을 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보다 네 고심이 더 깊어 보이는구나. 오냐, 둘 다 술도 마셨겠다, 내일 일은 기억도 못하겠지. 이참에, 각자 속내에 있는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볼까.”


취한 듯 나른한 눈빛이었으나 목소리와 어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나직하고 조용한 어투와 정확한 발음.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훨씬 나긋한 어투에 정화가 취할 겨를조차 없었다.


“속내에 있는 이야기요······?”


“오늘 여기서 나눈 말들은 오직 우리 둘만 아는 것이다 그마저도 우리가 술을 마셔 기억을 못하니 곧 사장될 테지.”


“그래도,”


“나 먼저 하마, 첫째.”


“아, 아니 도련님······!”


“······ 나는 선택되었으나 버림받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정화의 말은 듣지도 않고 히로유키가 제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느닷없는 고백에, 찢겨진 채 머릿속을 맴돌던 모든 궁금증이 어느 정도 원래 모습을 되찾아가는 듯 하였다. 저조차도 혼이 날 만 했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다시금 든 생각은 제법 다른 내용이었다. 제아무리 혼인이 인륜지대사이기로서니, 한 번 거절하였다 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저리 매질하나? 제 선친을 떠올려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두 부자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허면 어찌하여 입양을 한 것일까? 질문이 다시 꼬리를 물었으나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고, 도리어 정화의 가슴 속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내가 정녕 이 자를 걱정하는 건가.


“······ 온전한 핏줄이 아니어서겠지······.”


걱정을 할라 칠 때마다 뒤잇는 말은 늘 이 자가 친일파라는 걸 상기시키는 말 뿐이었다. 애써 묻어두려 했던 생각이 되살아날 때마다 무언가가 가슴 속을 난도질하는 느낌이 났다. 이를 악문 정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둘째, 나는······.”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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